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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58)화 (58/123)

58화 시한부 공작과 여우 간병인 (3)

한편 지오프리는 벽에 비친 그림자의 형태로 낯선 손님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림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들어오지 않고, 창틀에서 뭉그적댔다.

‘올 때는 마음대로 왔지만 가는 건 마음대로 되지 않을 거다.’

그림자에서 눈을 뗀 지오프리가 격렬하게 기침을 내뱉었다. 입가에 적당한 피가 흘렀다.

콜록콜록.

커다란 손으로 피를 훔치고는 이불을 끌어당기려다가 그대로 손끝의 힘을 탁 풀어 버렸다. 그러자 예상대로 작은 그림자가 냉큼 방으로 들어왔다. 최대한 소리 없이 그의 침대로 다가온 존재는 잠시 머뭇대는가 싶더니, 협탁을 타고 침대로 건너왔다.

‘……이제야 오다니.’

다시 그를 찾은 여우를 보자 지오프리는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내색하면 짐승이 달아날까 봐 최대한 모르는 척했다. 짐승은 이내 그의 머리맡에 다가오더니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한숨을 쉬는 거지.’

놀라는 것도 잠시 작은 발이 그의 머리를 누르기 시작했다.

‘이게 뭐 하는 거지?’

두피를 꾹꾹 누르자 어쩐지 두통이 가시는 것 같았다. 지오프리는 그제야 여우가 마사지해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렉세이도 가끔 쓸모가 있군.’

아무래도 그가 죽는다는 소리에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러다 앞발을 떼고 또 망설이는 것 같아서 그가 중얼댔다.

“……추워.”

이번에는 거짓말이었다.

사실 이 침실에는 벽난로도 활활 타고 있고, 이불도 있으니까 전혀 춥지 않았다. 게다가 전장에서 노숙을 자주 했던 터라 지오프리는 웬만한 추위는 견딜 수 있었다.

―끼잉끼잉.

그때 작은 여우가 그의 가슴 위를 밟고 올라왔다. 실눈을 뜨고 가만 지켜보자니 여우는 입에 이불을 문 채 힘껏 당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불은 무거워서 여우가 끌기에는 벅찼다.

‘어쩐지 귀엽군.’

지오프리는 모르는 척 팔을 뻗어서 그 짐승을 끌어안았다.

―깨갱깨갱.

너무 세게 안은 건지 그의 품에 갇힌 여우가 버둥거렸다.

‘……미안.’

그가 팔에서 힘을 조금 풀자 더는 낑낑대지 않았다.

‘그때보다 조금 말랐구나.’

여우의 몸을 꼭 안은 지오프리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돌이켜 보면 돌아와서는 한숨도 이루지 못했다. 부드러운 몸을 꼭 껴안자 잠이 쏟아졌다. 핏줄이 불거진 손등으로 여우의 등을 토닥이자, 작은 짐승이 하품했다.

‘……미오.’

부드러운 털을 쓸자마자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한 지오프리가 작게 속삭였다. 잠의 여신이 내린 축복이 내려앉은 침실에 곤한 숨소리가 가득 차기 시작했다.

* * *

아침이 밝자마자 지오프리의 침실에 불청객이 찾아왔다. 함께 껴안고 잠든 상대를 보고 놀랄 틈도 없이 미오는 후다닥 침대 밑으로 몸을 숨겼다. 지오프리 역시 서둘러 가운을 걸쳤다.

“공작님. 좋은 아침입니다.”

“또 무슨 일로 나를 찾은 건가.”

그는 라비니아에게 허락도 없이 침실을 찾을 수 있도록 허락한 적이 없었다.

“어머. 우리 사이에 그런 말은 서운해요.”

수선을 피워 대던 그녀가 하녀를 시켜서 화병을 갈게 했다.

“이 꽃은 누가 가져온 건가요? 못 보던 건데.”

들판에서 아무거나 꺾어서 만든 게 분명한 꽃다발이 값비싼 화병에 꽂혀 있었다.

“아. 그건 우르체카 대공이 준 거니까 그대로 두도록.”

대공이 줬다는 말에 라비니아가 살짝 멋쩍은 미소를 짓더니 곧장 화제를 돌렸다.

“공작님. 이제 약을 드실 시간이랍니다.”

라비니아의 지시에 하녀가 약과 물을 쟁반에 올려서 대령했다. 라비니아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아서 그것을 내밀었다. 누가 보면 공작가의 안주인으로 착각할 만한 행동이었다.

“밤새 공작님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답니다. 얼른 쾌차하셔야죠.”

손수건을 꺼내서 눈가를 찍어 내는 라비니아의 모습이 퍽 그럴듯했다. 조소를 감춘 지오프리가 그녀를 향해서 힘없이 입을 뗐다.

“나를 구해 주고, 이렇게까지 애써 주니 무척 고맙군. 베일 백작에게는 따로 선물을 보냈다.”

“감사 인사가 웬 말인가요. 곧 가족이 될 텐데…….”

라비니아는 감색 가운을 걸친 지오프리의 어깨선을 훑어 내렸다. 넓은 어깨와 탄탄한 가슴, 뾰족한 턱선과 붉디붉은 입술, 음영 짙은 눈매, 어느 곳 하나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번에 아버지에게 부탁해서 정식으로 청혼서를 보내려고 해요.”

라비니아는 이미 공작이 수락한 것처럼 단정을 짓고 있었다. 확신에 차 있는 그녀를 향해서 지오프리가 물었다.

“내가 언제 그런 약속을 했던가.”

“어머, 동굴에서 한 그 뜨거운 맹세를 벌써 잊으신 건가요?”

“알다시피 내가 기억을 잃어서 말이야.”

공작의 말에 라비니아가 벌떡 일어나더니 두 손을 하늘로 쳐들었다. 그녀는 그날 밤을 묘사하면서 몹시 흥분했다.

“달빛이 부서지던 밤, 폭포수가 제 드레스에 막 튀었죠. 그때 그 차가운 감각이 생생한걸요. 그때 심하게 다친 공작님이 제 손등에 입을 맞추면서 청혼하셨잖아요.”

라비니아의 열연이 펼쳐지는 순간, 침대 아래 미오는 이를 부드득 갈고 있었다.

‘지금 뭐라는 거야?’

누가 누굴 구해 줬다고 거짓말을 하는 거지.

게다가 언제 지오프리가 라비니아에게 청혼했다고, 저런 말을 지어내는지 진짜 기가 막혔다.

‘그건 그렇고 지오프리는 왜 가만히 있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저러다 라비니아와 진짜 결혼이라도 해 버리면 어떡해?’

침대 아래 라비니아의 구두를 잔뜩 노려보면서 미오가 분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풀이 죽었다. 지오프리가 누구랑 결혼하든 그녀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으니까.

한참 혼자서 난리를 피우던 라비니아가 나가자 이번에는 사무엘이 들어왔다. 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공작에게 물었다.

“공작님. 저기, 라비니아 아가씨의 말이 사실인가요? 곧 결혼식 준비를 해야 할 거라고.”

“베일 영애가 결혼을 하나 보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네? 아가씨는 공작님과 결혼한다고 하던데요.”

“헛소리는 그만둬. 사무엘. 뭔가 다른 소식은 없나.”

지오프리가 사무엘이 하던 말을 끊어 버렸고, 그의 말에 사무엘이 급한 서신을 협탁에 올려 두었다.

“황실 무도회가 열린다고 합니다. 여기 초대장이 왔습니다.”

“……무도회라.”

지금이 과연 무도회를 열 만한 적절한 시기인가 의문이 들었다.

‘황태자의 생일 축하를 한 게 얼마 전인 것 같은데…….’

변방의 적을 소탕했다고는 하나, 적은 언제든 쳐들어올 수 있었다. 광물이 풍부한 카스피언의 땅을 호시탐탐 노리는 나라가 한둘이 아니었고, 지난 천 년간 숱한 침입을 막아 내야 했다.

지오프리가 떨떠름한 얼굴을 하자, 사무엘이 얼른 입을 뗐다.

“이번에는 벤 황태자님의 업적을 치하하는 무도회라고 합니다.”

“그자에게 어떤 업적이 있지?”

늘 술에 취해서 도박판을 전전한다는 황태자가 언제 공을 세운 건지 정말 궁금했다.

“……최근에 공작님이 계시던 변방에 가셔서 구호물자를 나눠 주고 오셨습니다.”

“……아.”

기가 차서 할 말도 없었다.

죽을 고생을 해서 적을 소탕한 것은 그였는데, 황제는 벤에게 상을 내린단다.

“퍽 애를 쓰는군. 무도회엔 참석하겠다고 답을 하도록 해라. 그만 나가 봐.”

“알겠습니다. 공작님.”

모두 물러나자 지오프리가 침대 헤드를 손으로 툭툭 쳤다.

바닥에서 분노를 삼키고 있던 미오는 왠지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가만 웅크리고 있자 그의 손이 침대 바닥을 더듬어 댔다. 왠지 얄미운 기분이 든 미오가 발톱을 빼 들고 그의 손등을 콱 찍었다.

“이런, 왜 화가 났지?”

지오프리가 침대 아래로 내려와서 고개를 숙여 그녀를 찾았다.

“이리 와.”

―크르르, 크르르.(내가 부르면 달려가는 똥개로 보이냐?)

그녀는 후원에 있는 앙겔라스와 차원이 다른 맹수다. 화가 많이 난 그녀는 아예 돌아앉아서 그를 외면했다.

‘네가 청혼했다는 라비니아나 찾아가라고!’

볼이 불룩해진 미오가 그렇게 어두운 구석에 몸을 숨기는데, 그의 입에서 다시 격한 기침이 터졌다.

“……?”

놀란 미오가 슬그머니 기어 나와서 지오프리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자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저 바보!’

아직 침대에서 내려오면 안 되는데, 무리하게 움직여서 그런가 보다. 미오가 헐레벌떡 달려가 그의 허벅지에 정수리를 비비자 지오프리가 그녀를 바라봐 주었다.

“이런, 먼지가 잔뜩 묻었구나.”

그는 미오를 그대로 안아서 거울이 달린 세면대로 데리고 갔다. 세면대에는 은으로 만든 대야에 물이 절반 정도 차 있었다. 미오가 격렬하게 저항하면서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다.

“걱정하지 마. 해치려는 게 아니야.”

―끼잉끼잉.(이러지 마! 우리가 그런 사이는 아니잖아?)

아무리 여우의 몸이라고 해도 그녀는 여자였고, 지오프리는 건장한 남자였다. 지오프리가 씻긴다면 그녀는 수치스러워서 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그의 손아귀 속에서 옴짝달싹 못 하게 된 그녀는 곧장 대야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

“이것 봐. 물이 시꺼메지잖아.”

미오는 이 순간이 너무 수치스러워서 차마 눈을 뜰 수 없었다.

‘그건 때가 아니라, 침대 밑의 먼지야. 나는 원래 깨끗해.’

하지만 말 못 하는 짐승 상태라서 고개를 아래로 떨굴 뿐이었다. 몸도 안 좋다는 지오프리는 그녀를 정성스레 닦아 주었다. 거울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에 미오는 코피가 터질 뻔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자꾸 여윈 지오프리의 어깨선을 타고 가운이 흘러내렸다. 별것 아닌 그의 모습에도 가슴이 떨려서 숨이 턱턱 막혔다.

‘그만해! 내가 몇 번 털면 다 마른다고!’

부드러운 수건에서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철통같은 경비에 그럴 수도 없었다. 마른 수건에 둘둘 싸인 그녀는 지오프리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아까는 왜 그렇게 화가 난 거지? 손님이 자꾸 찾아와서 시끄러웠던 건가?”

미오는 그의 말을 못 들은 척 앞발을 핥았다. 조금 쉬다 가려고 했던 어제 계획은 또 실패했다. 아침에 일어나자 그와 사이좋게 꼭 안고 잠들어 있었다. 얼마나 황당했던지 그대로 창밖으로 달아나려는데 라비니아가 쳐들어온 것이다. 곧장 침대 아래로 숨은 미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참이나 듣게 되었다.

‘그나저나 얘가 좀 아프더니 왜 이렇게 다정해.’

목소리도 손길도 전에 없이 부드러워서 원작에 나왔던 악독한 인물과 도무지 매치가 되지 않았다.

“나를 도와줬으니 네게 보답을 해야 할 텐데…….”

그의 말에 미오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웬일로 이런 기특한 생각을 다 했을까?’

보답이라면 아무래도 보석이나 금덩이가 먼저 생각났다. 제대로 한 밑천을 챙기면 이런 끔찍한 저주에서 벗어날 방법을 아는 마법사를 찾을지도 모른다.

‘휴, 말을 못 하는데, 무슨 수로 원하는 걸 이야기하지.’

답답한 마음에 그녀는 수건에 주둥이를 파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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