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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57)화 (57/123)

57화 시한부 공작과 여우 간병인 (2)

알렉세이의 빈정거리는 태도는 전혀 병문안 온 사람 같지 않았다.

‘혼자 있고 싶다.’

지오프리가 읽던 서류를 다시 쥐면서 중얼댔다.

“할 말 없으면 이만 나가 주겠나. 나는 환자라서 휴식이 필요하다네.”

“환자가 서류를 왜 검토하지? 정말 세상에 자네만큼 나를 웃겨 주는 이가 또 있을까.”

“알렉세이. 머리가 울리는군.”

“나처럼 소중한 친구가 어디에 있다고 나를 쫓아내려는 건가?”

명백한 축객령에도 알렉세이는 불쾌해하기는커녕 우스갯소리만 늘어놓았다. 얼마나 크게 웃는지 침실의 유리창이 덜컹덜컹 흔들릴 정도였다. 그렇게 한참 웃던 알렉세이가 돌연 진지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용무가 없다고 누가 말했던가? 나의 사랑스러운 사촌 소식을 들려주려고 했네만……. 자네가 쉬어야 한다면 내가 나가는 게 도리겠지.”

알렉세이는 창을 소리 내어 닫더니 곧장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가 등을 돌리자마자 지오프리가 헛기침했다.

“……그녀를 잘 데리고 있겠지?”

지오프리는 이곳에 와서 그림자도 보지 못한 누군가의 소식을 물었다.

“그래. 그녀는 무사하다네.”

“다행이군.”

“자네가 내 사촌을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는지는 몰랐군.”

알렉세이가 다시 빈정거리자 지오프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상대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카스피언가의 손님이니까. 그래. 지금 어디에 있지? 다친 곳은 없나?”

미오의 소식에 급격히 말수가 늘어난 지오프리를 보면서 알렉세이가 볼을 부풀렸다.

“그러게, 그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면 사냥터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안 가는 게 낫지 않았나.”

알렉세이의 훈계에 지오프리는 몹시 화가 났다.

“지금 나는 말장난할 기분이 아니야. 알렉세이.”

“나는 늘 진심이라네. 지오프리. 나도 보고 싶었나? 소식이 막 궁금했나? 내가 밥은 잘 먹는지? 지금은 또 누구를 만나서 연애하는지 알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나?”

침대 가까이 다가선 알렉세이가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덩치가 황소만 한 사내의 황당한 질문에 지오프리가 침대 등에 바싹 몸을 붙였다.

“자네, 드디어 미친 건가?”

그는 한 번도 알렉세이의 사생활을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알렉세이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툴툴댔다.

“한 번을 받아 주지 않는군. 자네만큼 재미없는 인간도 드물 거야. 안타까운 일이야.”

“제발 헛소리는 집어치우라고.”

서류를 내팽개친 지오프리의 이마에 주름이 잡히는 것을 본 알렉세이가 은밀한 음성을 냈다.

“약은 그만 먹는 게 어떨까. 지오프리.”

지오프리가 셔츠 아래로 불거지려는 손목의 핏줄을 감추었다.

“오늘따라 잔소리가 지나치군. 아무리 자네라도 참아 주는 데 한계가 있어.”

약을 먹는 것은 발작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러니 약을 그만 먹는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였다. 인간의 삶을 포기하거나 진정한 짝을 맞거나. 하지만 어떤 선택이든지, 지금 그로서는 멀게만 느껴졌다.

“이런, 너무 무서워서 눈물이 날 것 같은데?”

소리 없이 다투는데 두 사람의 그림자가 마치 맹수처럼 뒤엉켰다. 긴장감은 잠시였고, 알렉세이가 다시 장난기 어린 음성을 냈다.

“참고로 자네가 시한부일지도 모른다고 말해 뒀다네.”

“취미 한번 고약하군.”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 않나. 전장에 나가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게 전사의 삶이니까.”

알렉세이가 침대에 털썩 주저앉자 한쪽이 크게 기울어졌다. 그는 발치로 밀려 난 꽃 하나를 뜯어서 입에 넣었다. 그것을 오물오물 씹던 그가 말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말이야.”

심각한 얼굴을 한 알렉세이의 질문에 지오프리가 귀찮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게 뭐지? 빨리하고 나가.”

“왜 보름이나 거기 처박혀 있었지? 평소의 자네라면 하루도 있을 이유가 없지 않나.”

알렉세이의 질문에 지오프리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는 옆구리에 남아 있는 흉터를 손으로 더듬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영영 낫지 않을 것 같던 상처가 그의 손길에 금방 아물었다.

“상태가 나빴으니까 그랬지. 독화살을 맞은 데다 검으로 여기저기 찔렸거든.”

“지오프리. 지나가던 개가 다 웃겠군. 시체 더미 위에 앉아서 술을 즐기고는 하던 자네가 고작 사내 몇 명에게 당했다는 것을 나더러 믿으라는 건가?”

알렉세이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상처를 입었지만, 그는 끄떡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지오프리는 그냥 평범한 사람처럼 동굴에서 끙끙댔다.

“……기껏 차려 둔 만찬인데, 그만한 성의는 보이는 게 예의가 아닌가.”

지오프리의 대답에 알렉세이가 배를 쥐고 웃기 시작했다.

“일부러 당해 주는 척했다는 건가? 하, 정말 지오프리 자네다운 답이야. 자네는 정말 완전히 미친 게 분명해.”

눈물까지 보이며 웃는 알렉세이를 지켜보자니 마뜩잖은 감정이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네에게 그런 말을 듣는 건 달갑지 않군. 이제 정말 나가 보게.”

지오프리가 서류로 얼굴을 가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 * *

밤이 깊어졌고, 카스피언 공작 성이 적막감에 사로잡혔다.

“……흠.”

알렉세이의 방문으로 가뜩이나 무거운 머리가 더욱더 복잡해졌다. 어찌나 나가려고 들지 않는지, 내쫓는 데 시간이 제법 걸렸다.

“망할 알렉세이.”

알렉세이에게는 대충 얼버무렸지만, 이번 일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었다.

‘원래 계획은 그게 아니었는데…….’

숲에서 그를 공격하는 벤을 으슥한 곳으로 끌고 오는 중이었다. 그때 잡히기 직전의 여우를 보게 되었다. 화살을 날려서 구해 주면 그대로 숲 밖으로 달아날 줄 알았다. 하지만 작은 여우는 벤에게 공격당하는 그의 앞을 막아섰다.

‘동굴에서 머물게 된 데는 그 이유가 컸다.’

카스피언 공작 성으로 돌아가거나, 나가서 벤 카스피언과 일당을 모조리 죽여 버리는 것 대신 선택한 것이었다.

“우습지. 동굴에서 지내는 게 나쁘지 않았다.”

모처럼 시끌벅적한 곳에서 벗어나 조용히 지냈다. 들리는 것은 물소리와 바람 소리, 나뭇잎이 부딪히거나 짐승이 내는 울음소리뿐이었다.

“또 완전히 혼자는 아니었지.”

그의 곁을 맴도는 여우가 한 마리 있었다. 작고 약한 짐승이 그를 살리겠다고 약초를 물고 와서는 입에 넣어 주었다. 털에 즙을 묻혀서는 입술을 축여 주던 순간이 생생했다.

“그렇게 위험한데 왜 나를 돕겠다고 나선 거지.”

작은 짐승이 전해 주던 온기는 그의 차가운 심장에 불을 지펴주는 것 같았다. 지오프리는 털이 잔뜩 묻어 있던 그의 셔츠를 떠올리면서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하지만 무엇에서도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

몸은 그곳에 있었지만, 계속 여러 사람을 걱정했다. 그의 수하들과 성의 식솔들. 그나마 우르체카 대공이 있었기에 한시름 덜 수 있었다.

* * *

끼잉끼잉.

앙겔라스가 축 처진 볼을 한 채 그녀 근처에 와서 앞다리를 구부렸다가 뒤로 물러서기를 반복했다.

‘뭐야. 저 괴상망측한 행동은…….’

만사가 귀찮은 탓에 미오는 앞발을 까딱거렸다.

‘저리 가라. 아가야.’

커다란 개가 움직일 때마다 후원의 마른 흙이 미오의 앞을 죄다 뿌옇게 만들었다.

―크르르.(아! 진짜!)

그때 시무룩한 표정의 앙겔라스를 보면서 일전에 지오프리가 했던 것을 떠올렸다.

‘이렇게 했었나?’

대충 작은 나뭇가지를 툭 밀어 주자 흥분한 앙겔라스가 침을 뚝뚝 흘렸다. 얼마나 신이 났는지 제자리를 방방 뛰더니 곧장 그녀에게로 덤벼들었다.

―크르르, 크르르.(야! 오지 마!)

놀이가 아니라 저 커다란 입이 마치 그녀를 꿀꺽 삼킬 것 같아서 겁이 났다. 다행히 개는 나뭇가지만 물고는 제자리를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주인을 닮아 개도 제정신이 아니구나.’

잠깐 놀아 줬을 뿐인데 진이 다 빠지는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에 밤이 깊어졌고, 미오는 근심 어린 눈을 했다. 우르체카 대공이 했던 말이 귓가에서 내내 울리는 것 같았다.

‘지오프리가 곧 죽다니?’

그러려고 라비니아에게 동굴의 위치를 알려 준 게 아니었다. 이곳에만 오면 모든 일이 해결될 줄 알았는데…….

‘일단 가서 직접 상태를 확인해 보는 거야.’

지오프리의 파리한 얼굴이 눈에 아른거려서 어차피 잠도 이루지 못할 것 같았다.

미오는 그림자 속에 숨어들어서 은밀하게 몸을 움직였다. 건물 외벽의 덩굴을 타고 올라가서 창틀을 밟고 2층으로 올라가는 데 성공했다. 마침 지오프리의 침실 창이 조금 열려 있어서 진입하는 데 별문제는 없었다.

열린 창 너머로 작은 그림자가 너울졌다.

‘쓸데없는 짓일까.’

달을 등진 채 창가에 선 미오가 잠시 망설였다. 가만 누운 지오프리의 몸이 어쩐지 여위어 보였다.

‘아니야. 저대로 죽게 둬서는 안 돼.’

지오프리의 생사 여부권은 그녀의 손안에 있다. 죽이거나 살리거나 모두 그녀의 소관이다.

그때 지오프리가 기침하더니, 이불을 덮으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힘에 부치는지 커다란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지금 저만한 힘도 없는 거야?’

미오는 당장 용감하게 달려서 스툴로 뛰어오른 다음 협탁으로 몸을 날렸다. 한달음에 침대로 올라가는 데 성공했다.

‘얼굴이 정말 창백하네.’

달빛을 등진 그의 얼굴에는 한껏 음영이 드리워져 있었다. 초췌한 그의 날카로운 얼굴은 병약미가 돋보였다.

‘지오프리에게 병약미라니…….’

원래도 잘생긴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입가로 흐르는 침을 앞발로 쓱 닦고는 그녀는 이불을 덮어 주려고 했다.

‘무슨 이불이 이렇게 무거워.’

그녀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라서 끼잉 소리가 절로 났다. 그런데 갑자기 지오프리가 꿈틀대더니 그녀의 몸을 확 끌어안았다.

‘미쳤어! 날 놔줘!’

이러려고 온 게 아니었다.

그냥 상태만 살피고는 돌아갈 작정이었다.

앞발로 그의 굵은 팔뚝을 마구 때렸지만, 지오프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송곳니로 팔을 물어 버릴까 했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물리기까지 하면 더 슬퍼질 테니까.

‘지오프리가 시한부라니…….’

미오는 묘하게 입장이 뒤바뀐 두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 봤다. 언제 죽을지 몰라서 전전긍긍했는데, 그가 먼저 죽을지도 모르다니.

그때 커다란 손이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질색해야 마땅한데 어째서 그의 손길이 이리 따스하게 느껴지는가. 미오는 그제야 2층으로 올라온다고 여기저기 멍든 부위가 아프게 느껴졌다.

―후함.

하품이 절로 났다.

‘그래. 잠깐만 쉬었다가 가야지.’

그렇게 지오프리의 가슴에 주둥이를 파묻은 미오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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