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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56)화 (56/123)

56화 시한부 공작과 여우 간병인 (1)

숲에 혼자 남은 미오는 갈 곳이 없었다.

지오프리가 마차에 타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충동적으로 다음 마차에 몰래 숨어 탔다. 카스피언 공작령에 도착한 미오는 인적이 드문 곳을 찾다 보니 후원까지 오게 되었다.

‘너무 졸려.’

걷다가 마침 폭신한 볏짚을 발견했고, 그대로 쓰러진 그녀는 사흘간 깨어나지 못했다. 실컷 자고 눈을 떴을 때 미오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눈뜨자마자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커다란 개가 그녀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녀를 한 입 거리 간식쯤으로 생각하는지 침을 꿀꺽 삼켰다. 미오는 부들대는 다리에 힘을 주면서 턱을 치켜들었다.

―크르르, 크르르.(저리 가! 바보 개!)

미오가 송곳니를 드러내자 그녀보다 수십 배는 큰 개가 고개를 갸웃했다. 퉁방울 같은 눈에 몸은 시커멓고 볼이 축 늘어져 있었다. 곤봉이 달린 꼬리를 붕붕 휘두르는데, 꿈에 나타날까 무서운 외모였다.

―크르르.(나 먹어 봐야 별로 맛도 없어.)

다소 비굴하긴 했지만, 맛이 없다는 것을 강조해서라도 살고 싶었다. 하지만 개는 여전히 그녀에게서 관심을 거두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볏짚에서 완전히 나온 미오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서 몸을 부풀렸다.

―하아악.

금방이라도 그녀를 잡아먹을 것처럼 굴던 개는 꼬리를 다리 사이로 말더니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깨갱.

곧장 맥없이 몸을 돌린 짐승이 어슬렁어슬렁 자리로 돌아갔다. 미오는 덩치만 컸지, 그녀의 상대가 되지 않는 개를 향해서 혀를 내밀었다.

‘한주먹 거리도 안 되는 게 말이야. 괜히 까불고 있어!’

탈진한 그녀는 다시 볏짚 더미로 몸을 묻었다.

―끼잉, 낑.(이게 무슨 고생이람.)

어딘가 다친 것도 아닌데, 언젠가부터 계속 눈물이 났다. 아무래도 심장이 크게 고장 난 것 같았다.

그렇게 잠에 취해 있던 어느 날.

햇살이 눈 부시게 빛나는 화창한 오후였다. 그녀의 기분과 달리 너무 맑은 날씨 때문에 미오는 우울해졌다.

‘내가 왜 이렇게 우울한 거지.’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우울감에 젖은 미오가 다시 몸을 웅크리는데 멀리서 하녀들이 나누는 대화가 들렸다.

“글쎄, 라비니아 아가씨가 공작님을 구하셨대. 상처 치료도 직접 하셨나 봐. 의원 말로는 적절한 치료 덕분에 공작님이 무사하실 수 있었다더라고.”

“나는 처음부터 두 분을 지지했거든. 베일 백작가의 영애라니, 얼마나 낭만적이야. 두 분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기는 얼마나 예쁠까?”

“그렇게만 되면 정말 좋겠다. 우리도 백작가의 덕을 볼 수도 있을 테니까.”

“맞아. 언제까지 이렇게 무시당할 수는 없잖아.”

하녀들의 대화에 미오의 기분은 더더욱 가라앉았다.

‘내가 구해 준 건데…….’

혹시 지오프리를 해치는 사람이 있을까 봐 보초를 서고, 새벽마다 나가서 스텔라리아를 구해 온 것도 그녀였다. 의식이 없는 그의 입으로 즙을 넣어 준 것은 라비니아가 아닌데…….

‘게다가 결혼도 전에 아기 이야기를 꺼내는 게 유행인가. 라비니아를 닮은 아기라니, 어쩐지 전혀 귀여울 것 같지 않아.’

입을 삐죽대던 미오가 주둥이를 땅에 묻었다.

‘일단 좀 더 자야겠어.’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꼼짝할 수 없었다. 다시 짚 더미로 파고들려고 하는데, 인기척이 났다.

‘누구지?’

이곳은 지오프리를 제외하면 누구도 발을 들이지 않는 곳이었다. 개에게 먹이를 주는 하인도 멀리 서서 기다란 삽을 이용했다.

‘혹시 지오프리일까.’

저벅저벅 발소리가 나더니 드디어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르르, 크르르.

큰 개가 위협적인 소리를 내자 상대가 크게 웃었다.

“이런, 앙겔라스. 벌써 나를 잊은 거냐?”

‘아, 이 목소리는…….’

볏짚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어서 확인하자 우르체카 대공이 맞았다. 대공은 그보다 훨씬 큰 개가 덤비려고 하는데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손을 뻗어서 개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강한 손길에 개는 이내 꼬리를 다리 사이로 밀어 넣었다.

“이것 봐. 앙겔라스. 내가 너한테 뭘 가져왔는지 보라니까.”

대공은 커다란 바구니에서 고깃덩어리를 꺼내서 개에게 던졌다. 위협을 할 때는 언제고 앙겔라스는 고기를 받아먹느라 여념이 없었다.

‘멍청한 짐승. 방금까지 으르렁대 놓고…….’

그런데 앙겔라스가 고기를 얼마나 맛있게 뜯어 먹는지 소리와 냄새가 미오의 오감을 자극했다.

꼬르륵꼬르륵.

‘그나저나 내가 얼마나 굶었지?’

제대로 식사를 한 게 거의 3주 전의 일이었다. 게다가 요 며칠은 아예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 몸이 더 작아졌다. 이 털이 아니었다면 앙상한 갈비뼈가 죄다 드러났을 것이다. 입가에 침이 절로 고였다.

‘설마 저 개가 모조리 먹어 치우는 건 아니겠지.’

미오는 제발 앙겔라스가 조금 남겨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때 대공이 혼자 중얼댔다.

“이런, 사과는 안 먹는 게로구나. 훈제 고기도 별로인 거냐? 입맛이 제법 까다롭구나. 이건 그러면 들고양이라도 먹게 여기에 두고 가야겠다.”

그의 말에 미오의 두 눈에 감동의 빛이 어른거렸다. 지오프리는 인정이 없었지만, 대공은 참 괜찮은 구석이 있었다.

‘……역시 사람은 오래 두고 봐야 알 수 있나 봐.’

미오가 감탄을 연신 하는데, 대공은 바구니를 앙겔라스 근처에 내려 두었다. 그는 가만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앙겔라스. 정말 큰일이야. 공작의 병이 쉽게 낫지 않아서, 저러다 큰일이라도 나면 어쩌나 모르겠군. 네 주인이 얼른 회복되도록 디아나 여신에게 기도라도 올리도록 해라. 알겠니?”

‘짐승한테 저런 거창한 말이 무슨 소용이야!’

아마 앙겔라스가 알아들은 것은 한마디도 없을 것이다.

대공은 그 말을 남긴 채 홀연히 그곳을 떠났다. 볏짚에서 빠져나온 미오는 바구니 위로 두 발을 뻗었다. 그러고는 향긋한 냄새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있다! 있어!’

탐스러운 사과 두 알과 훈제 향이 진동하는 오리고기가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 커다란 바구니를 뒤집어 보려고 버둥대던 미오는 그냥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어차피 이곳에는 누구도 보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일단 갈증이 심해서 사과부터 베어 물었다. 입 안으로 퍼지는 달콤한 과즙에 온몸이 덜덜 떨렸다.

‘이제 고기를 먹어 볼까.’

그녀는 황급히 고기를 뜯어 먹기 시작했다. 적당한 훈제 향이 밴 고기는 쫄깃하고 담백하고 고소했다.

건물 모퉁이 뒤로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어른거렸지만, 식사에 집중하느라 미오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 배부르다.’

다시 짚 더미를 찾은 미오가 몸을 숨기는데, 마음이 아까보다 더 무거워졌다. 일단 그녀가 앙겔라스를 욕할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구니에 들어가서 게걸스레 먹어 대기만 했으니까.’

그리고 배가 부르자, 대공이 한 말이 비수가 되어서 가슴을 콕콕 찔렀다.

‘왜? 지오프리가 죽어 간다는 거야.’

그녀가 그렇게 정성껏 돌본 데다 카스피언 공작 성에 돌아왔으니 의원의 치료도 받았을 게 아닌가.

‘상처가 너무 깊어서 치료가 힘들어진 걸까.’

살이 완전히 괴사한 거라면 팔 하나를 절단해야 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중독도 완전히 치료한 것은 아니라서 조금의 후유증은 남았을 것이다. 스텔라리아는 찬 성분이라서 몸이 차가운 사람에게는 부작용을 남긴다. 보통의 짐승은 괜찮았지만, 평소 수족 냉증을 호소하던 토끼 이모가 그걸 잘못 먹고 한참 고생했던 게 떠올랐다.

‘기운만 좀 차리면 이대로 떠날까 했는데…….’

지오프리가 없는 삶을 한번 살아 볼까 했었다. 인간이 되고 못 되고도 중요하지만, 마음 편하게 사느냐 못 사느냐가 더 중요했다.

‘지오프리와 함께 있으면 내가 이상해져.’

마음과 몸을 그녀가 제어하기 힘들었다.

‘빌어먹을 각인!’

함께 지낸 게 얼마나 된다고, 밤만 되면 그의 품이 그리웠다. 가끔 긁어 주던 다정한 지오프리의 손길이 생각나서 우울했다. 상냥하게 대해 주던 그의 음성이 다시 듣고 싶었다.

‘내가 점점 미쳐 가는 걸까.’

각인의 부작용에 그녀가 이상해져 가는 것만 같았다. 이런 모습은 너무 낯설었다.

‘아니. 싫어.’

하지만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저기 어딘가에서 그가 또 죽어 간다는 사실이었다.

‘지오프리, 절대 죽지 마.’

미오의 속삭임이 카스피언 공작 성의 본체에 닿았다가 스러졌다.

* * *

“참 일찍도 나타나는군.”

침대에 가만 기대앉아서 서류를 보던 지오프리는 느닷없는 방문객을 향해서 차갑게 굴었다. 꽃을 한 다발 안고 온 알렉세이가 침대에 그것을 툭 던졌다.

“내가 그렇게나 보고 싶었나? 공작. 환영 인사가 거창하군. 그나저나 방이 좀 답답하지 않은가?”

알렉세이는 답답한 내부 공기에 잔뜩 인상을 쓰더니 창문부터 열어젖혔다. 시원한 바람이 들이치자 그제야 이마에 맺힌 땀이 가셨다. 그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데 뒤에서 지오프리가 투덜댔다.

“알렉세이. 지금 나는 환자의 몸이야.”

“헛소리하고 있네.”

“끔찍한 상처를 보여 줘야 환자로 인정할 건가?”

지오프리는 대공이 가져온 꽃을 발로 툭 차 버리면서 이마를 구겼다. 꽃이 힘없이 나뒹구는 것을 본 알렉세이가 씩 웃었다.

“그게 고맙다는 인사인가?”

“……아. 굳이 생색을 내고 싶은 건가?”

지오프리의 대꾸에 알렉세이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카스피언 황제를 상대하는 일을 퍽 짜증 나거든.”

알렉세이 우르체카는 일전에 황제의 사유지에 병사 출입을 허가받았던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사교성이 뛰어나다고 해도 누군가에게 알랑방귀를 뀌는 것은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다. 상대가 아름다운 여인이 아닌 이상은 말이다.

“피를 철철 흘리는 내가 보이지 않던가?”

벤에게 위협받던 순간에 분명 알렉세이와 눈이 마주쳤었다. 그의 말에 알렉세이가 여유롭게 대꾸했다.

“지오프리. 자기 일은 자기가 해결하는 게 어른 아니겠나? 여하튼 나는 일전에 진 빚을 갚았네.”

알렉세이는 궁지에 몰린 지오프리를 위기에서 구출해 주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하지만 지오프리는 그의 노력을 별로 인정해 주지 않는 눈치였다.

“웃기는군. 나는 자네 목숨을 구해 주었는데, 그깟 파리 새끼를 쫓아내 준 것으로 셈을 하겠다니. 지나가던 개가 다 웃겠군.”

“환자치고 입이 퍽 매섭군. 안 그래?”

알렉세이가 잘생긴 얼굴을 심하게 구기면서 웃어 댔고, 지오프리의 표정은 더욱더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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