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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55)화 (55/123)

55화 다시 카스피언 공작 성으로

공작을 찾아 헤매던 라비니아가 발밑에 날아온 돌을 살폈다.

“누가 던진 것 같은데?”

돌에 묻은 물기를 확인한 그녀가 폭포 뒤에 숨은 공간을 찾아냈다.

“저기 뒤에 굴이 있어! 얼른 가서 살펴보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사내 몇이 좁은 길을 건너오려고 하는 것을 본 미오가 지오프리에게 말을 걸었다.

―끼잉끼잉.(이제 누군가 널 구해 줄 거야.)

제법 진지한 눈매를 한 미오의 몸짓에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뜻이지?”

평소에는 제법 말이 통하는 것 같더니 중요한 순간에 그녀와 지오프리 사이에 커다란 장벽이 세워진 것 같았다.

그녀는 소리 내지 않고 지오프리의 눈을 잠시 바라보았다. 여기에 계속 함께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우는 인간의 친구가 아니라 사냥감에 불과하니까.

‘우리는 여기까지인 거야.’

미오는 답을 하지 않은 채 폭포의 반대편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녀가 차가운 물을 뚫고 나오는 순간 병사가 들이닥쳤다. 그리고 폭포 밖에서 지오프리의 안위를 확인했다. 들려오는 말소리가 나지막한 것을 보면 분명 그는 무사한 거다.

‘다행이다.’

이제 그는 카스피언 공작 성으로 돌아가서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갈 시간이다.

‘줄곧 기다렸던 일인데 기분이 왜 이렇지.’

그녀의 몸을 덮치는 쓸쓸함에 미오의 꼬리가 아래로 축 늘어졌다.

* * *

“공작님! 이게 다 무슨 일이랍니까!”

“주인님. 전부 다 제 불찰입니다.”

지오프리 카스피언이 돌아오자 성이 발칵 뒤집혔다. 누군가는 울음을 참지 못했고, 누군가는 격분했다.

‘분명 누군가의 함정에 빠진 게 틀림없다!’

그게 아니라면 사냥터에서 주인이 다칠 일도, 이렇게 늦게 돌아올 일도 없었다. 그들 모두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알았으나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황실 소유의 숲에서 변을 당하다니…….’

그들은 한때 전장에 나간 주인 걱정을 하느라 여러 해 속이 새까매진 상태였다. 이제 마음을 좀 놓을까 했는데, 사냥터에 간 공작이 보름간 소식이 끊겨 버렸으니 그 속이 오죽했을까.

지오프리가 성에 돌아온 저녁.

“공작님. 이제 정신이 드세요?”

지오프리가 힘겹게 눈을 뜨자 그의 옆에는 금발 여인이 앉아 있었다. 라비니아 베일은 붉은 드레스에 어울리는 홍옥으로 장식한 귀걸이와 목걸이를 한 채 울먹였다. 그녀는 물을 적신 수건으로 지오프리의 볼을 닦아 주려 했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코를 찌르는 향수 냄새에 지오프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머리가 좀 아프군.”

두통을 핑계로 지오프리는 모두를 물리고 사무엘만 남겼다. 그는 부축을 받아서 몸을 씻고, 오랜만에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 상처 위에 붕대를 감은 지오프리가 침대 헤드에 기대앉았다. 그는 가운을 어깨에 걸치면서 사무엘에게 물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지?”

기억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지오프리는 눅눅한 동굴에서 있었던 일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여우가 나를 지켜 주고, 돌봐 주었다.’

누구도 믿지 않을 이야기였기에 사무엘의 입으로 다시 상황 설명을 들어야 했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이 믿고 있는 진실일 테니까.’

지오프리가 잔뜩 인상을 쓰는데 사무엘이 천천히 입을 뗐다.

“그게, 공작님이 낙마하셔서 크게 다치셨는데, 라비니아 아가씨가 공작님을 구하셨답니다.”

“며칠이나 지났지?”

“……그게.”

대답하기 전에 사무엘이 울음부터 터뜨렸다. 그에게 지오프리는 섬기는 주인 이상이었다. 그는 한미한 귀족가의 차남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 아무 쓸모도 없던 그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공작이 그를 알아봐 주지 않았다면 여전히 구차하게 살고 있었을 게 뻔했다. 눈물 콧물을 닦아 내던 사무엘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딱 보름입니다. 진짜 걱정했습니다. 황실 소유의 숲이라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베일 백작님이 직접 황제 폐하에게 허가서를 받으셨답니다.”

사무엘이 계속 울면서 설명했고, 지오프리가 한쪽 어금니를 꽉 물었다.

“사무엘, 보다시피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러니 울음은 당장 그치거라. 그리고 베일 백작에게 감사의 의미로 선물을 준비해서 보내도록 해.”

“흑, 죄송합니다.”

입술을 꽉 깨물면서 울음을 참는 사무엘에게 공작이 물었다.

“그 여인은…….”

“누구 말입니까. 공작님.”

눈물범벅이 된 사무엘이 훌쩍대면서 물었다.

“미오. 말이다.”

“그게 말입니다. 사냥 대회가 있던 날부터 행방이 묘연합니다. 그래서 저는 혹시 공작님과 함께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사람을 보내서 그녀를 찾아보도록 해라.”

지오프리의 얼굴에 알 수 없는 표정이 잠시 스쳤다. 그가 동굴에서 입었던 옷에 한가득 묻은 은색 털이 언뜻 떠올랐다.

“일단 좀 쉬어야겠으니, 나가 보도록.”

“네. 알겠습니다. 공작님.”

돌아온 주인의 얼굴을 몰래 훔쳐본 사무엘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건 하늘에서 내린 기회였다.

라비니아 베일은 초조한 얼굴을 감춘 채 하녀에게 물었다.

“그 여자는 소식이 없는 게 확실하지?”

창틀의 먼지를 훔치던 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석으로 치장한 작은 티아라를 머리에 올린 라비니아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녀가 죽인 여자가 살아 돌아와서 공작과 함께 사냥 대회에 갔었단다.

도무지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된 거지?’

그러니까 한 달도 더 전에 그녀는 이곳에서 쫓겨나다시피 했다. 라비니아가 미오를 처치하고 돌아오자, 공작이 그녀를 몰아붙였다.

‘함께 나갔다던 미오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겁니까?’

평소보다 더 냉랭한 그의 음성에 라비니아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약혼자를 만나러 간 것 같다는 그녀의 말을 지오프리는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니까.

‘공작님. 지금은 우리 이야기를 하기에도 밤은 짧아요.’

‘나는 확실한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얘기해 보죠. 베일 영애.’

공작은 그녀에게 한 시간 단위로 행적을 물어 댔다. 손에 끈적한 땀이 연신 맺혔다.

‘……이게 아닌데.’

라비니아는 귀족도 아닌 계집 하나를 처리하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것들은 기르는 소나 돼지와 다를 바가 없는걸.’

독살한 후 저주받은 땅에 내다 버리고 온 것을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주제를 모르고 기어오른 죗값을 치른 거니까.’

그래서 해맑은 얼굴로 그녀는 모르겠다고 했다.

‘어디 숨겨 둔 남자라도 찾아갔나 보죠. 그런 계집들은 뻔하잖아요. 돈만 주면 누구든 쫓아다닐 테니까.’

하지만 공작의 반응은 그녀의 예상을 벗어났다.

‘아무래도 영애의 증언으로는 부족하군요. 함께 나갔던 고용인을 불러오고 마차를 가져와서 살펴보도록 하죠.’

그는 고용인 하나하나를 불러서 따로 심문하겠다고 했다. 마차도 전문가에게 보내서 바퀴와 내부를 따로 살피겠다고 했다.

‘그런 계집 하나 사라진 게 무슨 대수라고?’

라비니아는 초조한 나머지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지금 공작은 그녀가 아는 사람이 아닌 것만 같았다.

‘이제 어쩜 좋아.’

일부러 베일가의 고용인만 데리고 갔었지만, 그들도 지오프리 카스피언의 집요한 심문에 진실을 털어놓을지도 모른다.

‘들키지 않으면 아무 문제도 없지만…….’

살인 사주는 무서운 죄였다.

귀족조차 처벌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그렇게 되면 베일 백작도 그녀를 구해 주지 못할지도 모른다. 숨통이 바짝 죄어 오는 느낌에 라비니아는 물 한 모금도 삼킬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일단 후퇴를 선택했다.

‘몸이 좋지 않아서 베일 영지로 돌아간다고 전해 줘.’

라비니아는 그렇게 사무엘에게 짧은 말만 남기고 허겁지겁 카스피언 공작 성을 떠났었다.

‘내 예상이 적중했어.’

그까짓 계집 하나 사라진 것은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아서 잊힐 일이었다.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잡는 법이니까.’

그녀는 병을 핑계로 일부러 여우 사냥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곧 카스피언 공작이 내게 연락할 거야.’

그런데 공작이 사라졌다는 말을 접하고, 아버지를 얼마나 졸랐는지 모른다. 베일 백작은 차라리 이참에 그녀가 카스피언 공작을 잊기를 바랐지만, 그런 일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았다.

‘아버지. 제가 죽는 꼴을 보고 싶어요?’

그녀에게 다른 남자는 의미가 없었다. 야생마 같은 카스피언 공작만을 원했다.

‘반드시 손에 넣어서 내가 공작을 길들일 거야.’

베일 백작은 은근히 벤 황태자와의 만남을 주선했지만, 그녀의 강한 거부로 취소되었다.

“얼른 와서 내 화장을 손보도록 해. 공작님께 가 봐야 하니까.”

라비니아는 지금의 흥분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병사를 이끌고 숲을 뒤지다가 공작을 발견한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폭포 뒤에 그런 공간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그녀는 데리고 갔던 병사들에게 뇌물을 써서 전부 고향으로 내려보냈다.

“아가씨. 정말 대단하세요. 그런 힘든 상황에서 공작님을 구하고 치료까지 하셨다면서요.”

라비니아의 얼굴에 분칠해 주는 하녀의 얼굴에 존경의 빛이 어렸다. 거울로 그것을 확인한 라비니아는 아주 거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부분이 너희 같은 하찮은 자들과 우리의 차이 아니겠어?”

“아무렴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눈엣가시 같던 미오가 사라지고, 라비니아 아가씨가 돌아오자 신이 난 베스가 연신 콧노래를 불렀다. 모든 것이 제대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 * *

카스피언 공작 성의 후원에는 사람이 잘 찾지 않는 장소가 있었다. 이곳에는 지오프리가 데려온 커다란 개가 한 마리 있었다. 몸이 정말 컸고, 흉포하게 생긴 개라서 사람들은 이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사실 개라고 부르기에도 적절하지 않았지만.

‘소를 한입에 먹는 걸 본 사람이 있대.’

‘개가 아니라 마물이라는 소문도 있어.’

‘하긴 그렇게 괴상하게 생긴 개는 내 평생에 본 적이 없다니까. 공작님은 왜 하필 그렇게 무서운 개를 데리고 오신 걸까.’

개가 머무는 나무집 근처에 있는 짚단이 꿈틀댔다.

―끼잉끼잉.

아주 작지만, 울음소리가 났다. 주둥이로 볏짚을 헤집고 나타난 작은 짐승 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에 갈고리 같은 송곳니를 드러낸 괴물이 침을 뚝뚝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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