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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54)화 (54/123)

54화 그가 웃으면 심장이 아프다

“놀란 눈인 것 같은데……. 더 먹고 싶은 거냐?”

그는 희미하게 웃더니 쥐고 있던 검을 폭포 밖으로 잽싸게 휘둘렀다. 그러자 검 끝에 비둘기가 정확하게 꽂혀 있었다.

‘저런 몸을 해서도 대단한데……?’

날아가는 새를 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폭포 근처를 스쳐 지나가는 새를 잡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 그는 며칠 굶어서 검을 휘두를 만한 기운이 없는 상태일 테니.

‘지오프리를 다시 봐야겠어.’

그를 향한 미오의 눈이 하트 모양으로 살짝 변했다. 고기를 나눠 주는 사람은 그게 누구든 간에 훌륭한 인품을 지닌 것이다.

지오프리의 수고 덕분에 미오는 실컷 자고 일어나서 고기를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역시 익힌 것을 좋아하는구나.”

―끼잉끼잉.(그게 무슨 말이야.)

입가에 기름을 많이 묻힌 미오가 그를 향해서 소리 냈다.

“저번에도 훈제 고기를 훔쳐 먹었지, 아마?”

‘아, 쟤는 쓸데없는 걸 기억하고 있네.’

지오프리의 말에 미오는 다시 고기를 뜯는 척했다. 그때의 일은 진짜 부끄러운 일에 속했다. 굶주림에 이성이 마비되어서 인간이나 먹는 훈제 고기를 탐냈으니까.

‘아마 까마귀가 알게 된다면 백 년은 놀려 댈지도 몰라.’

그가 막 구운 고기를 먹으려는데 미오가 눈을 음험하게 떴다.

‘빚은 제대로 청산해야지.’

그녀는 재빨리 달려와서 그의 손에서 고기를 가로챘다. 번개 같은 빠른 속도였다. 그래서 지오프리는 속수무책으로 그녀의 공격에 당하고 말았다.

“더 먹고 싶었던 건가? 몸은 작은데 제법 많이 먹는군.”

‘내가 다른 변변찮은 짐승과 같은 줄 알아?’

그가 연신 헛다리를 짚는 동안 미오가 앞발의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더니 널따란 이파리에 가슴살을 갈가리 찢어서 올렸다. 그러고는 주둥이로 이파리를 그에게 밀자, 지오프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쳤으니까 이걸 먹으라는 건가?”

미오는 대답 없이 기름진 다리를 덥석 입에 물었다.

‘퍽퍽한 가슴살은 정말 맛이 없단 말이야. 너도 당해 봐!’

일전에 쉼터에서 당했던 일을 제대로 갚아 준 미오의 얼굴이 환해졌다. 지오프리는 난도질당한 고기와 의기양양한 여우를 번갈아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래. 네 말대로 하는 게 좋겠군.”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낼 줄 알았는데, 그는 아무 말 없이 미오의 말을 따랐다.

‘뭐야. 왜 웃어.’

언제나 냉랭한 표정의 지오프리의 얼굴에 희미하나마 미소가 어른대자 그녀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쩜 저렇게 잘생겼는지 매일 봐도 매일 놀라울 정도였다. 미오는 그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몸을 완전히 돌렸다. 하지만 세차게 뛰는 가슴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 * *

‘일주일이 지났나. 열흘이 지났나.’

동굴에서 지내다 보니 시간 개념이 희미해졌다. 그녀는 약초와 작은 과일을 구하느라 바삐 움직이는 한편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한참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왜 구조대가 오지 않는 걸까.

오늘도 미오는 폭포 바깥을 내다보면서 숲을 감시했다.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지만, 밖에서는 이곳을 볼 수 없어서 숨어 있기에는 더없이 좋았다.

‘그래도 계속 여기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어.’

지오프리는 천천히 회복하고 있지만, 외상이 점점 더 상태가 나빠졌다. 그 비열한 놈들이 화살에 독을 묻힌 게 틀림없었다.

‘이런 민간요법으로는 절대 낫지 않을 거야.’

그의 상처는 의원에게 제대로 치료받아야 했다. 불을 아무리 피워 댄다고 해도 동굴 내부의 습도를 잡을 수 없었다. 상처의 진물이 마르지 않아서 그의 셔츠가 고름과 피로 엉망이었다. 지오프리의 낫지 않는 상처를 볼 때마다 그녀의 가슴은 어쩐지 무거웠다.

“내게 왜 이렇게 잘해 주는 거지?”

지오프리가 건너편에 앉아서 두 발로 약초를 붙들고 짓이기는 미오를 보면서 물었다. 그녀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고, 그의 검은 눈은 여전히 작은 털 짐승을 향했다.

“나는 원래 불면증이 심한데…….”

이곳에서 여우를 껴안고 잠이 든 며칠 동안 깊은 잠을 취할 수 있었다. 낯설지 않은 느낌에 지오프리는 누군가를 잠시 떠올렸다.

“쓸데없는 말을 했구나.”

지오프리가 짧은 헛기침을 뱉었다.

‘……글쎄.’

그녀는 풀을 뜯는 척하면서 지오프리의 질문을 곱씹어 보았다. 지금 미오의 행동은 그녀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동굴까지 그를 데려다 놓은 다음에는 얼마든지 떠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약초 따위 구해 주지 않아도 괜찮았는데…….’

그대로 죽어 버리는 지오프리를 지켜볼 수 없었다.

‘그러니까 왜?’

피를 토하는 그의 모습도 끙끙 앓는 지오프리도 다 보기 싫었다. 그냥 평소처럼 오만한 표정으로 늘 하던 대로 독설이나 내뱉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냥 카스피언 공작 성에서의 그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왜 그런 모습을 보고 싶은 거지?’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다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지오프리가 건재한 것은 그녀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그가 아니면 지금 나는 곤란한 상태니까.’

게다가 지오프리 역시 그녀를 여러 차례 도와줬는데, 이대로 외면하면 미오는 도리를 저버리게 된다.

‘그러니까 지금 내 행동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거야.’

이대로 지오프리가 죽어 버리면 그녀는 영영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직 남은 삶을 짐승인 채로 살 각오가 부족했다.

‘내가 그를 돕는 것은 그냥 지오프리를 이용하기 위해서야. 개인적인 감정 같은 것은 전혀 없어.’

여윈 탓에 더욱더 날카로워진 그의 턱선을 슬쩍 올려다본 미오가 고개를 끄덕댔다.

‘잘생긴 건 그냥 잘생긴 거지.’

그게 꼭 그녀가 지오프리를 좋아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때 가느다란 숨소리가 흘렀다. 퍽 피곤했는지 지오프리가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듣지도 말고, 보지도 말자.’

밤만 되면 미오의 감각은 더욱더 예민해져서 견디기 힘들었다. 동굴 안에 그의 체향이 가득 찼다.

의지로는 도무지 제어할 수가 없었다. 홀린 듯 지오프리를 향해 걸어가는 미오가 입을 헤벌렸다.

‘아픈데도 이렇게 아름다운 얼굴이라니.’

입맛을 쩝쩝 다시던 미오는 본능적으로 거스러미가 잔뜩 인 지오프리의 입술에 집중했다. 가느다란 숨소리가 흘러나오는 입술은 적당히 붉었고, 촉촉했다. 미오는 그의 입술이 어떤 느낌인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아니야. 참아야 해.’

발톱으로 허벅지를 찌르면서 미오는 이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지금 입맞춤을 하면 큰일이다. 인간으로 변한 그녀를 무슨 수로 설명할 것인가.

‘어디 있다가 온 거냐고 추궁할 테지.’

사실 줄곧 함께 있었는데…….

지금은 어떤 말도 그에게 해 줄 수가 없었다. 간신히 그의 입술을 바라보는 것을 멈춘 그녀는 바닥에 웅크렸다. 꼬리로 눈을 가리려고 하는데, 지오프리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

지오프리의 꿈에는 어머니가 종종 나오는지, 밤이면 저렇게 슬픈 음성을 내고는 했다. 인상을 잔뜩 쓴 채로 팔을 위로 뻗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어깨의 상처 때문에 곧 신음성을 터뜨렸다. 일전에 그녀가 화살을 뽑아 준 어깨였다.

‘가만있어!’

저러다가는 상처가 더 벌어질 것이다.

몸을 일으킨 그녀가 주둥이로 그의 손을 아래로 눌렀다. 버둥대던 손등에 미오의 털이 닿자 그는 이내 손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정말 누가 성가신 건지 모르겠다니까…….’

지오프리가 종종 그녀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밤새 또 발작을 일으키면 곤란하니까.

그의 손등에 아예 턱을 괸 미오가 눈을 감았다. 그녀의 머릿속에 찬란하게 빛나던 카스피언 공작 성의 호수와 부드러운 바람이 떠올랐다. 미오를 향해서 활짝 웃어 주던 로렌과 작은 간식을 챙겨 주던 마음씨 좋은 집사, 알프레드. 그리고 수줍은 미소를 지닌 사무엘의 얼굴도 차례로 스쳐 갔다.

“……음.”

그녀도 모르게 지오프리의 품에 깊숙이 파고든 미오는 그렇게 달콤한 잠에 빠졌다.

* * *

다음 날 아침 드디어 숲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폭포 밖으로 고개를 내민 그녀는 한 무리의 남자들이 숲 이곳저곳을 헤매는 것을 발견했다.

‘누구지?’

분명 공작의 수하는 아니었다. 입 안이 바싹 마른 미오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혹시 적이라면 낭패야.’

아직 지오프리는 환자였고, 저렇게 많은 남자를 상대로 싸우기는 무리였으니까.

‘내가 그를 지켜 줄 수 있을까.’

미오가 앞발을 들었는데, 작고 하찮은 솜방망이가 눈에 들어왔다. 원작에 나왔던 거대한 여우 따위와는 완전히 거리가 멀었다. 그때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카스피언 공작님! 어디 계세요!”

지오프리를 구하러 온 것은 사무엘이나 우르체카 대공이 아니라 라비니아 베일이었다.

‘쟤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그녀를 보자 화가 솟구쳤지만, 지금은 개인적인 원한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미오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라비니아 베일은 공작의 적일까. 아군일까.

‘그녀는 공작을 좋아해.’

그것만큼은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위기에 처한 지오프리를 숲 밖으로 데려가 줄 수 있는 것은 라비니아뿐일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상처를 치료해야 해.’

결심을 끝낸 미오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지오프리의 곁으로 다가갔다. 주둥이로 손등을 툭툭 건드렸다. 그래도 일어나지 않아서 옆구리를 그녀의 정수리로 세게 밀어 봤다. 그제야 잠에서 깬 지오프리는 자연스레 미오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일어나라는 거냐.”

그의 음성과 손길이 너무 다정해서 미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오프리에게 익숙해지는 건 위험해.’

두려움을 느낀 미오는 몸을 뒤로 물리면서 날카롭게 눈을 치켜떴다.

‘여기 잠깐 있어.’

미오는 입에 큰 돌을 하나 물고서 폭포 밖으로 내던졌다. 그러자 잔도 위를 구른 돌이 라비니아의 근처에 정확하게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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