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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53)화 (53/123)

53화 동굴에 새벽이 깃들고 (2)

‘뭐야. 날 내려놔!’

지오프리가 잠결에 그녀를 잡아채서 그의 허벅지 위에 올린 것이다. 다리를 틀고 앉은 그 위에 자리하게 된 미오가 놀라서 내려가려고 했다.

“……따뜻해.”

하지만 그의 만족스러운 음성에 몸이 얼어 버린 것 같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그의 손끝에 미오의 온기가 닿아서 조금씩 따뜻해졌다. 지오프리의 숨소리가 아까보다 조금 편해졌다.

‘아프니까 한 번 정도는 봐줄까?’

감히 애완 고양이 취급을 하는 지오프리가 괘씸했지만 말이다. 약 기운에 따스함이 더해지자 지오프리는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폭포수를 두드리는 빗소리에 둘의 숨소리가 하나로 엉겨들었다.

지오프리는 사흘을 꼬박 일어나지 못했다. 그동안 미오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주변을 경계하느라, 눈이 빨개졌다. 사무엘이나 우르체카 대공이 오면 지오프리가 있는 곳을 알려 주려고 했는데, 그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황태자의 수하만 두어 번 발견했지.’

그들은 지오프리를 죽이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는지, 단단히 무장해서 은밀하게 이곳을 뒤지고 다녔다.

‘지독한 녀석들이야.’

세상에 지오프리보다 잔인한 이가 많이 있었다.

‘나는 정말 우물 안 개구리가 따로 없었어.’

그녀가 아는 세상에는 오직 지오프리만 존재했으니까.

젖은 앞발을 핥아 대는데 그녀가 앉은 몸이 조금씩 움직였다. 드디어 사흘 내내 먹인 약초가 효험을 보이는 모양이다. 미오는 얼른 그의 몸에서 뛰어내린 후 마주 보고 앉았다.

“……너였구나.”

눈 밑이 푹 꺼지고 훨씬 더 깊고 진한 색을 한 검은 눈이 그녀를 강하게 응시했다. 지오프리는 정말 강인한 정신력을 가졌는지, 사흘 내내 검을 한 번도 손에서 내려 두지 않았다. 미오는 몸을 일으켜서 검을 머리로 툭툭 건드렸다.

“……아.”

그제야 검에서 손을 뗀 지오프리는 엄청난 통증을 호소했다. 사흘 내내 꼼짝도 하지 않은 터라 온몸이 저릴 것이다. 미오는 진통 작용이 있는 풀을 입에 물고 그의 다리 위에 올렸다. 그제야 동굴 내부를 살피기 시작한 지오프리의 눈에 놀라움이 서렸다.

“보통 여우가 아니로구나.”

약초로 보이는 풀이 그의 주변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리고 반짝거리던 여우의 은색 털이 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네가 나를 지켜 주었구나. 그렇지?”

미오는 말하면 입이 아픈, 당연한 말만 골라 하는 그를 향해서 턱을 치켜들었다. 이제는 그에게서 받은 도움에 보답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녀가 생명의 은인이 된 정도였다.

‘나를 죽일지도 모르는 남자를 살린 게 잘한 일일까.’

그런 의문을 지울 수는 없었지만, 눈앞에서 죽어 가는 지오프리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는 미오가 준 풀을 들어서 오물오물 씹었다. 입 안 가득 익숙한 풀 맛이 나는 것을 보면 그가 앓는 동안 여우가 입에다 이것을 넣어 준 게 분명했다.

‘기특하구나.’

며칠 호되게 아프긴 했지만, 기절하듯 잠을 잤다. 늘 불면에 시달리던 그에게는 일종의 휴식과도 같았다. 실컷 자고 났더니 머리가 여느 때보다 맑았다. 지오프리는 여우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냈다.

‘어미 잃은 개인 줄 알았는데.’

여우는 카스피언 공작 성에 모습을 드러냈었다. 한참 만에 보는 것이지만 워낙 특별한 털을 가진 짐승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이 여우는 더 많은 비밀을 숨기고 있었다. 지오프리는 희미하게 떠오르는 미소를 갈무리한 채 입을 뗐다.

“네 주인은 어디 있지?”

그의 질문에 미오가 깜짝 놀랐다.

‘주인이라니! 진짜 지오프리가 뭘 눈치챈 걸까?’

그녀가 바로 미오였지만, 지금은 증명할 수 없었다.

‘증명해서도 안 되고…….’

사냥터에서 벌써 끔찍한 이야기를 제법 들었다. 숲에 나타나는 것은 주로 붉은 여우란다. 하지만 드물게 다른 색의 털을 가진 여우가 있는데, 그것은 상서로운 기운을 가진 짐승으로 무조건 생포해야 한다고 했다.

‘수인이 아직 존재한다고 하니까요.’

수인이라는 말에 말을 타고 있던 미오의 등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원래 에카라오, 도르프, 키에트, 카스피언 네 개의 제국을 만든 것은 수인이었단다. 그래서 카스피언 전설에도 늑대가 나오는 거라고 했다. 하지만 인간이 점점 힘을 얻으면서 많은 수인이 죽임을 당했고, 제국에서 쫓겨났다고 했다.

‘살아남은 수인은 정말 지독한 놈들뿐이라고 하더군요.’

남은 것들은 힘이 강하거나 신비로운 마법을 부릴 수 있으니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고도 했다.

‘잡아서 가둔 후에 전시하게 되면 아마 금광이 부럽지 않을 테죠.’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은데요.’

그러니까 지오프리에게 그녀가 여우 수인인 것을 절대 들키면 안 되었다. 지하 감옥에 감금되거나, 연못 주변에 묻힐지도 모르니까.

“이리 와.”

지오프리가 힘없이 손을 내밀었고 미오는 천천히 그를 향해서 다가갔다.

“나는 원래 짐승을 좋아하지 않는다.”

언젠가 들었던 지오프리의 말에 그녀는 콧방귀를 뀌었었다.

‘웃기시네. 안 좋아한다면서 송아지만 한 개한테 자꾸 먹이를 가져다주고, 나뭇가지를 던져 주더라.’

지오프리는 자연스레 미오의 귀 뒤를 긁어 주었고, 익숙해진 손길에 그녀가 눈을 스르르 감았다.

‘아니, 내가 이럴 때가 아니잖아.’

지금 그녀의 꼴이 딱 카스피언 공작 성에 있던 덩치 큰 개와 별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정신을 차린 미오가 눈을 날카롭게 치켜뜬 채 속으로 화를 냈다.

‘나를 그런 바보 개와 동급으로 생각하지 마. 나는 맹수라고! 맹수!’

당장 저 손을 깨물고 싶었지만, 지금 미오는 그럴 힘도 없었다. 요 며칠 지오프리를 간호하느라, 주변을 경계하느라 온 힘을 다 쓴 미오가 그의 품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 * *

지오프리는 강인한 인간이었다. 사흘간 그녀가 주는 약초즙만 먹었는데도 금세 기운을 차렸다. 하지만 문제는 외부의 상처였다. 약초를 으깨서 환부에 붙여 두었지만, 검상이 워낙 깊은 탓에 쉬이 아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눅눅해서야 상처가 나을 리가 없지.’

그래도 지금은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했으니 이곳에 머물러야 했다.

“방심은 금물인데 말이야.”

미오가 밖에서 물어 온 나뭇가지에 불을 붙인 지오프리가 혼잣말했다. 지오프리는 며칠 새 수척해진 볼을 쓸어내리면서 헛웃음을 지었다. 날카롭게 빛나는 그의 눈이 어두운 가운데도 날카로웠다.

‘여우 사냥이 함정이란 것은 알고 있었는데…….’

피해 갈 방법이 없었다.

황후의 놀이에 장단을 맞춰 준다는 게 일이 조금 꼬였다.

‘아직 때가 이르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 생각한 걸까.’

지오프리는 그의 어머니를 억울하게 죽게 만든 사람들과 카스피언 제국 자체를 가만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복수를 위해서 이날까지 살아왔다. 그는 그 모든 일을 마치고 난 뒤의 일은 계획하지 않았다.

‘힘이 약해서 내 사람을 지키지 못했던 나를 용서할 수 없다.’

나약해 빠진 그는 평생 속죄해도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굳게 결심했던 그지만 요즘 들어 자주 의구심이 들었다. 로렌의 주름진 얼굴이나 알프레드의 굽어지기 시작한 등을 볼 때면 마음이 흔들렸다. 게다가 그를 좋아한다고 외쳐 대는 성가신 여인도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내가 완전히 망가진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을 겪고도 혼란스러운 것을 보면 그가 머리를 심하게 다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무엘과 미오는 괜찮은지 모르겠군.”

한창 상념에 잠긴 지오프리의 입술을 타고 다시 그녀의 이름이 흘렀다. 미오는 놀라서 귀를 쫑긋 세웠다가 애써 모른 척했다.

‘뭐야. 혼잣말을 저렇게 많이 하는 사람이었나.’

쓸데없이 그녀의 걱정을 왜 하는지 모른다. 아무리 많이 다쳐도 그녀는 지오프리와는 다른 용맹한 수인인데 말이다.

‘살다 보니까 진짜 별꼴 다 보겠네.’

그녀가 주둥이를 땅에 박고 몸을 동그랗게 마는데, 지오프리가 미오의 몸을 덥석 들어 올렸다.

“바닥은 차니까 여기에서 쉬도록.”

그렇게 그녀는 다시 지오프리의 허벅지에 똬리를 틀게 되었는데, 이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끼잉끼잉.(저기서 자게 내버려 둬.)

그녀가 촉촉한 눈으로 지오프리에게 불편함을 호소했다. 하지만 그는 두꺼운 손으로 미오의 털을 한번 길게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그래. 많이 힘들었을 거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날 내버려 두라니까.’

제법 대화가 통한다 싶었는데, 다시 엇나가기 시작했다. 지오프리의 허벅지는 탄탄해서 누워 있기는 좋았지만, 기분이 별로였다. 너무 가까이 있는 탓에 지오프리의 몸에서 나는 지독한 체향에 미오는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았다.

‘내려가면 또 잡아 오겠지.’

몇 번 그의 품에서 탈출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지오프리는 그녀를 잡아서 껴안았다. 적당히 기분 좋게 서늘한 그의 체온과 바로 앞에 피워 둔 화톳불의 온기 때문에 미오는 다시 졸았다. 며칠 쌓인 피로가 이렇게 시시때때로 그녀를 잠들게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미오는 동굴 안의 자욱한 연기 때문에 코가 매웠다.

‘뭐지.’

혹시 불이라도 났다면 당장 대피해야 했다. 놀라서 얼른 눈을 뜨자 지오프리가 그녀 앞에 참새구이를 내밀었다. 미오는 기름이 좔좔 흐르는 고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일어나서 이것 먹어라.”

미오는 잠이 덜 깬 상태였지만, 앞발로 고기를 공손히 잡았다. 날고기를 먹지 못해서 며칠간 쫄쫄 굶은 상태였다. 정신없이 한입 뜯었는데, 고기는 일류 주방장이 만든 요리 맛이 났다. 허겁지겁 고기를 먹어 치운 다음에야 의문이 들었다.

‘아직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지오프리가 무슨 수로 참새를 잡았지?’

앞발에 검댕과 기름을 잔뜩 묻힌 미오를 바라보던 지오프리와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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