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동굴에 새벽이 깃들고 (1)
황태자 무리가 우르체카 병사들에게 둘러싸여서 숲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간신히 버티고 앉아 있던 지오프리가 격한 기침을 해 댔다.
쿨럭쿨럭.
피가 왈칵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면 내상을 심하게 입은 게 틀림없었다. 미오는 맞닿은 그의 피부가 평소보다 더 차가워지자 덜컥 겁이 났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상처 입은 지오프리를 보자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지금이야 우르체카 대공의 등장으로 황태자가 물러났다지만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를 일이다.
‘당장 몸을 피하는 게 우선이야.’
그녀는 일단 말에서 풀쩍 뛰어내린 후에 주변을 자세히 살폈다. 막다른 길이라고 생각했던 이곳에 숨겨진 공간이 있었다.
‘폭포 뒤라면 인간은 알 수가 없는 곳이야.’
그녀가 돌아오자 지오프리는 축 늘어져서 말에 기대 있었다. 미오는 있는 힘을 다해서 소리를 냈다.
―크르르, 크르르.(일어나! 여기 있으면 위험해!)
하지만 지오프리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미오는 앞발에 묻은 그의 피를 닦아 낼 생각도 못 하고 지오프리를 향해서 소리 냈다.
―끼잉끼잉.(제발 눈 좀 떠.)
그녀의 울먹이는 소리에 지오프리가 눈을 떴고, 미오는 곧장 그의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끼잉끼잉.(나를 따라오면 되는 거야. 알았지?)
눈을 반쯤 감은 지오프리가 아주 힘겹게 속삭였다.
“너를 따라오라는 건가?”
미오는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게 기뻐서 꼬리를 크게 부풀렸다. 그리고 곧장 폭포로 향했다. 험준한 계곡 아래 만들어진 폭포 뒤로 가려면 말은 버려야 했다. 미오가 잔도를 따라 걷기 시작하자, 그가 잠시 머뭇댔다.
―크르르, 크르르.(거기 있으면 오늘 밤에 죽어.)
“알―았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는 것처럼 지오프리가 대꾸했다. 그는 검에 몸을 의지해서 힘겹게 걷기 시작했다. 길을 걷다가 미오는 몇 번이고 멈췄다. 길이 미끄러운 데다 무척 좁아서 여차하면 지오프리가 물살에 휩쓸릴지도 모른다. 평소의 지오프리라면 전혀 걱정하지 않겠지만, 지금 그는 서 있는 것도 용한 정도였다.
“……읏.”
잘 따라오는가 싶더니 지오프리가 심장을 부여잡고 깊은 기침을 했다. 상체가 흔들거려서 그대로 그의 몸이 시꺼먼 물속으로 빠질 것만 같았다.
‘거기에서 멈추면 안 돼!’
미오는 지나온 길을 돌아가서 그의 바짓단을 물고 끌어당겼다.
―크르르, 크르르.(정신 차려!)
미오는 그를 끌고 겨우 폭포 뒤에 난 공간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입구에 지오프리를 세워 둔 미오가 얼른 동굴 내부를 살폈다. 어두웠지만, 다른 짐승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물비린내에 섞여서 사냥개 냄새가 좀 나기는 했지만, 이건 사냥터에서 묻어온 게 분명했다.
‘이만하면 안전해.’
“……으윽.”
검에 의지해서 간신히 서 있던 지오프리가 검을 쥔 채로 풀썩 쓰러졌다. 미오는 그의 입가에서 흘러내린 검붉은 피를 확인했다.
‘우선 적이 그를 찾지 못하게 해야 해.’
폭포 밖으로 나온 그녀는 꼬리에 물을 묻혀서 잔도에 남은 핏자국을 모두 닦아 냈다. 그리고 근처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말을 멀리 쫓아냈다. 그 일을 마치고 돌아오니 그녀의 코에서 뜨거운 기운이 쏟아졌다.
‘내가 먼저 죽을 것 같아.’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법이라고 하더니, 이게 무슨 낭패인지 모르겠다.
‘금발 미남은 무슨…….’
그녀의 인생은 한 번도 뜻대로 풀린 적이 없었다.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되었고, 책에 빙의했다.
‘누가 죽기를 소망할 거며, 책에 빙의하고 싶겠어?’
동굴 입구에 잠시 주저앉아서 엉망이 된 털을 그루밍했다. 하지만 혀를 내밀 기운도 없어서 그것마저 여의치 않았다. 힘겹게 앞발에 묻은 피를 핥아 내는데, 혀끝에 지오프리의 체취가 강하게 묻어났다.
‘이건 좀 위험한데…….’
기운이 없어서 머리가 어질한데 지오프리의 체취를 의식하자 속이 울렁댔다. 미오는 주둥이를 폭포 쪽으로 내밀어서 얼른 머리를 식혔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지난번처럼 그런 일을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너덜너덜해진 그의 셔츠와 그녀의 잇자국이 난 지오프리의 어깨가 동시에 떠올랐다.
‘기분이 무척 이상했어.’
차가운 물 속에 한참 고개를 처박아도 그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잠시 후 동굴로 돌아온 그녀는 벽에 기대앉아서 눈을 감은 지오프리를 응시했다. 여전히 검에서 손을 놓지 않은 채 잠든 그의 모습은 처참했다. 얼굴이 파리했고, 입가에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저런 모습의 지오프리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꼭 예전에 본 적 있는 것 같아.’
그게 언제인지 기억해 내려고 하자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주둥이를 땅에 박고 낑낑대던 미오가 앞발을 가지런히 포갰다.
‘오늘 너무 무리해서 그런가 봐. 조금만 쉬었다가 가야겠어.’
하지만 역시 지오프리가 신경 쓰여서 제대로 쉴 수도 없었다. 포갠 앞발에 기댄 채 고개를 돌렸다. 눈을 감은 채 불규칙한 숨소리를 내는 지오프리는 아무래도 오늘을 넘기기 힘들어 보였다.
‘지오프리가 죽는다니…….’
이건 생각도 못 해 본 결말이었다.
‘각인 상대가 죽으면 너는 살아도 죽은 목숨인 거야. 깍깍.’
다시금 까마귀가 해 준 헛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살아도 죽은 목숨이라니, 그렇게 재수 없는 말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지오프리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그녀는 이 동굴을 떠날 생각이었다. 숨을 거두는 마지막을 함께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나는 할 만큼 했으니까.’
그가 이제까지 돌봐 준 일이나 아까 구해 준 일에 대한 보답은 충분히 했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먹은 미오가 천천히 몸을 돌리려는데, 지오프리가 작은 소리를 냈다.
“……사무엘.”
시종을 부르는 그의 음성이 곧 꺼질 것 같은 촛불처럼 위태로웠다. 이곳에 사무엘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 같았다.
‘유언이라도 남기려는 걸까.’
지오프리가 하는 마지막 말이라 생각하니, 외면하기가 쉽지 않았다. 미오가 잠시 멈춰서 그의 입술을 가만 응시하는데, 지오프리가 어렵게 입을 뗐다.
“……가서 미오를.”
지오프리는 말을 채 맺지도 못하고 고개를 툭 떨구었다.
그가 남긴 말은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지오프리의 말을 들은 미오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째서, 어째서일까.’
저런 몸을 해서는 왜 사무엘에게 내 안위를 당부하는 걸까.
‘우리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잖아.’
아무래도 생명이 위급해서 헛소리를 내뱉은 게 분명하다. 아니면 그녀가 피곤해서 환청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애써 지오프리의 말을 무시한 미오가 폭포를 벗어나려 했다. 두 발짝만 더 움직이면 그를 떠날 수 있었다.
‘……하.’
지오프리의 상태는 위독해서 당장 의원에게 보여도 살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왜 이렇게 망설여지는지 모르겠다.
‘에이. 진짜 모르겠다.’
그녀는 그대로 폭포를 뚫고 밖으로 나갔다.
* * *
비가 내리기 시작한 새벽녘.
폭포 밖에서 작은 그림자 하나가 어른거렸다. 잠시 후 물을 뚫고 나타난 것은 털이 흠뻑 젖은 작은 여우였다. 여우는 입에 흰 꽃이 핀 풀을 많이 물고 있었다.
‘아이고! 여우 죽네. 죽어.’
미오는 바닥에 풀을 내려 둔 채 우선 지오프리의 상태부터 살폈다. 잠이 든 건지 죽은 건지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안색이 좋지 않았다.
‘미치겠네.’
그녀는 가져온 스텔라리아를 이로 짓이겨서 즙을 냈다. 그리고 앞발에 묻혀서 지오프리에게 먹이려고 했다. 하지만 미오의 몸집이 작은 탓에 뒷발로 몸을 일으켜도 그것이 쉽지 않았다.
‘무슨 수로 약을 먹인담?’
잠시 고민하던 미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오프리의 다리를 밟고서야 몸을 타고 올라갈 수 있었다. 그의 가슴에 몸을 기대자 지오프리의 입술에 앞발이 간신히 닿았다.
“……으으.”
갑작스레 느껴지는 신맛에 지오프리가 잔뜩 인상을 구겼다. 미오는 앞발로 그의 뺨을 확 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내가 비를 맞으면서 구해 온 거니까 잔말 말고 먹어.’
그를 버리고 떠나려다 그러지 못한 것은 지오프리가 불렀던 그녀의 이름 하나 때문이었다. 게다가 라비니아에게 당해서 엉망이 된 그녀를 간호해 주었던 지오프리가 눈에 밟혔다. 이런저런 복잡한 이유로 그녀는 그에게 먹이면 좋을 풀을 구해서 돌아오게 되었다.
“……싫어.”
꿈이라도 꾸는 건지 지오프리가 그녀의 앞발을 손을 들어서 치우려고 애썼다.
―크르르, 크르르.(이거 엄청 좋은 거야.)
병든 오리가 스텔라리아를 뜯어 먹으면 건강도 되찾고, 알도 잘 낳는다고 했다.
결국, 그녀는 반항하는 지오프리를 제압한 후 강제로 약을 다 먹였다. 그러고는 남은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진짜 너무 힘들어.’
앞발에 남은 스텔라리아 즙을 핥던 그녀의 코에서 더운 김이 쉭쉭 났다. 멋들어진 사냥복을 걸친 후 거울에 비춰 본 게 방금 같은데, 어쩌다 이렇게 많은 일을 겪게 된 걸까.
‘사냥 이야기만 하면 인상을 팍 쓰더니…….’
어쩌면 지오프리는 이런 일을 조금은 예상했는지도 모른다. 폭포 뒤라서 습한데 바깥에 비까지 와서 사방에 온통 물비린내가 진동했다.
‘이제 어쩌나.’
아픈 지오프리를 내버려 둘 수 없어서 풀을 구해 오긴 했지만, 다음에 뭘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사람으로 변하는 게 나을까.’
지금의 지오프리라면 그녀가 입맞춤을 백 번 해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아픈 사람을 상대로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미오가 웅크리고 잠시 쉬려는데, 그가 이를 딱딱거렸다.
“……추워요. 어머니.”
‘하. 이제는 어머니까지 찾네.’
불퉁한 말과는 달리 그의 음성에 미오의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는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았는데…….
오늘은 꼭 다른 사람 같았다. 잠을 포기한 그녀가 고개를 들자, 덜덜 떨고 있는 지오프리가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추운지 이까지 딱딱대면서 맞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어슬렁어슬렁 그의 곁으로 다가간 미오는 지오프리의 몸 가까이에 자리를 잡았다.
‘이 정도가 최선이야. 더는 안 돼.’
그렇게 몸을 동그랗게 말고 눈을 감으려는데, 커다란 손이 그녀의 등에 닿는 바람에 미오의 입에서 놀란 숨소리가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