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여우 사냥 (4)
핏물이 고여서 금방 작은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저자들은 숲속 짐승이란 짐승은 죄다 잡은 게 분명했다.
‘황태자는 정말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구나.’
아무런 이유 없이 생명을 앗는 것은 인간이 유일했다.
‘……무서워.’
그리고 지금 미오의 눈앞에 악귀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황태자는 어둠 속에서도 찬란한 빛을 내는 미오의 은색 털을 보면서 혀로 입술을 핥았다.
“퍽 탐나는 녀석이니까 혹여 털이 상하지 않게 조심히 다루도록 해라.”
“전하.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제가 기절만 시키겠습니다.”
허리에 작은 토끼 열댓 마리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사내가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비릿한 미소를 띤 채로 칼등으로 미오의 머리를 후려치는 시늉을 했다.
“가만있으면 해치지 않으마. 응?”
―크르르.(헛소리 집어치워!)
미오는 발톱을 드러낸 채 몸의 털을 세웠다. 원기가 회복되었는지 몸이 제법 커졌다.
“오오! 신묘한 짐승이 틀림없습니다.”
그녀가 보여 준 특별한 능력에 다들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탐이 나는 짐승이구나. 반드시 생포하라!”
미오를 노리는 사냥꾼이 코앞까지 다가왔지만, 달아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지.’
그녀는 사냥꾼에게 덤벼들 각오를 단단히 했다.
피슝~!
그때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들었다.
“어깨, 어깨를 맞았습니다.”
화살을 맞은 사냥꾼이 어깨를 부여잡으면서 다급하게 외쳤다. 주변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황태자 전하! 저기 공작이 나타났습니다.”
‘……지오프리라고?’
그녀를 도와준 화살의 주인공이 그라는 사실에 기분이 묘해졌다. 그리고 그의 등장으로 황태자가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본 사냥이란 게 설마.’
이제까지 불길한 예감은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어수선한 틈을 타서 얼른 사냥꾼의 얼굴로 도약했다. 무기와도 같은 발톱으로 남자의 얼굴을 무자비하게 할퀸 다음 그의 머리를 밟고 황태자의 말로 돌격했다. 덩치가 큰 말을 어찌할 수는 없었지만, 말을 동요하게 할 수는 있었다.
히이잉~!
미오의 공격에 놀란 말이 앞발을 쳐들자 황태자는 곧 말에서 떨어졌다. 미오는 잽싸게 지오프리가 있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저걸 잡아라! 죽여도 좋다!”
바닥에 쓰러진 황태자가 거칠게 소리쳤다. 곧 그녀의 뒤로 사냥꾼 무리가 쫓아왔다.
‘더 빨리! 조금 더 빨리!’
미오는 피 냄새가 진동하는 숲에서 지오프리의 체향을 맡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폭포에 막혀서 더 갈 수가 없었다. 턱 끝까지 찬 숨을 고르는데, 걸음이 비틀거렸다.
‘헛것을 보는 건가.’
지쳐서 눈앞이 어른거렸는데 폭포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인영을 볼 수 있었다.
‘분명 지오프리야.’
지금 이곳에 머무르면 큰 화를 입을 것이다.
잔악무도한 자들의 검과 화살이 노리는 것은 여우가 아니니까.
―크르릉.(정신 차려! 지오프리!)
미오는 작은 소리를 내서 그의 주의를 끌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조심스레 다가서자 달빛 아래 지오프리의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났다. 화살을 맞고, 검에 다쳤는지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저 몸을 해서 나를 도와준 거야?’
지금 지오프리는 말을 타고 있다기보다는 간신히 걸터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미오가 한 발 더 나가자 나뭇가지 밝는 소리에 그가 몸을 일으켰다. 반사적으로 화살을 겨누었던 그가 작게 속삭였다.
“너로구나.”
그녀를 확인한 지오프리가 화살을 아래로 떨구었고, 힘겹게 웃었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이곳은 위험하니 숲 밖으로 달아나거라.”
자기도 곧 죽을 것 같은데,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지 모른다.
미오는 그의 약한 모습에 분노가 솟구쳤다.
‘너를 괴롭힐 수 있는 것은 나뿐이야! 다른 사람은 그럴 자격이 없어.’
작은 여우가 떠나지 않고 그의 앞을 서성대는데 지오프리가 피를 울컥 토했다. 그는 피를 닦아 낼 생각도 하지 않고 중얼댔다.
“얼른 가!”
그녀가 더 가까이 지오프리에게 다가서는데,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미오를 쫓던 무리가 이곳에 도착했다.
“우리가 쫓던 사냥감이 공작과 함께 있습니다.”
지저분한 행색의 사냥꾼이 입을 떼자, 지오프리가 허리를 세우고 입을 열었다.
“이런 짓을 하고도 너희가 무사할 것 같으냐.”
“공작 나리, 이제는 저희가 무서울 지경입니다요. 목숨이 여러 개라도 되십니까요?”
사냥꾼이 누런 이를 드러내면서 몸서리를 쳤다.
카트리나 황비가 준비한 여흥은 두 아들을 위해서였다.
지오프리의 환영식이라는 이름 아래 벤에게 칼자루를 쥐여 주었다. 변방에서 행했던 숱한 암살 시도가 실패했다면, 이번에는 눈앞에서 제거하면 그만이었다.
이 숲은 황실의 소유로 사병의 출입을 엄격히 제한했다. 그러니 오늘이야말로 지오프리를 죽일 절호의 기회였다. 황후는 용병을 고용해서 사냥터의 고용인처럼 꾸미게 했다. 그리고 숲을 반으로 나눠서 귀족들은 여우나 토끼를 잡도록 하고, 나머지 반은 벤을 위한 특별한 사냥을 계획했다.
이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미오는 지금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이제 어쩌면 좋지.’
이대로 폭포 뒤로 숨으면 그녀는 무사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게 옳은 거야.’
질끈 눈을 감은 미오가 천천히 지오프리가 탄 말을 지나쳤다.
조금만 더 가면 끝이었다.
‘미련스러운 녀석! 날 붙잡지도 않네?’
지오프리는 그녀가 그를 버리는데도 가만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때 아까 화살을 맞았던 사냥꾼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손도끼를 날렸다.
‘진짜 못 참겠네!’
다쳐서 의식도 없는 사람한테 저렇게 떼거리로 와서 덤비는 것은 정말 비겁했다. 돌아선 미오가 풀쩍 뛰어올라서 손도끼를 바닥으로 패대기쳤다.
“아니! 이 여우가 미쳤나?”
지오프리가 탄 말 앞을 막아선 그녀가 송곳니를 드러냈다.
―크르르, 크르르.(전부 죽기 싫으면 꺼져!)
손도끼를 다시 주운 사냥꾼이 낄낄댔다.
“인제 보니 여우의 주인이 공작님이셨나 봅니다?”
“그 여우는 내게 가져와.”
뒤늦게 나타난 벤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지시를 내렸다.
“내가 친히 산 채로 가죽을 벗겨 줄 테니까.”
오싹한 말에 미오의 털이 부르르 떨렸다. 벌써 저 남자에게 목덜미를 붙들린 것 같았다. 미오가 말 앞을 막아선 것을 본 지오프리가 낮게 속삭였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구나.”
그가 몸을 숙여서 미오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그리고 곧장 그의 품 안에 내려 두었다. 지오프리는 이런 상황에도 전혀 동요하는 법이 없었다.
“벤, 도대체 뭐가 문제지? 곧 황제가 될 몸이 아닌가?”
“내가 원하는 건 말이야. 완벽한 황제야.”
벤은 카스피언 제국 건국 이래 가장 강력한 황권을 지닌 황제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저 새끼가 살아 있는 한 그런 일은 가능하지 않아.’
변방의 적을 섬멸한 지오프리는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많은 존경을 받고 있었다. 당장 그가 황위를 찬탈하고자 나서면 불가능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벤은 황태자의 자리에 올랐지만, 매일 악몽에 시달렸다.
‘불륜으로 태어난 네게는 더러운 피가 흘러.’
누군가 그의 귀에 이런 말을 속삭이는 것 같았다. 이런 악몽은 바로 지오프리를 없애야 지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벤이 기다란 검을 빼 들었다.
“이거 기억나는지 모르겠군. 네가 내 선물로 준 마물의 꼬리로 만든 검이다. 못 베는 게 없다고 하더군.”
달빛을 받은 검에 기이한 푸른 빛이 감돌았다. 벤의 도발에 지오프리가 검을 치켜들었다. 그가 손수 닦아 둔 검이 검붉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도대체 이 일을 어쩌면 좋아.’
지금 그녀는 지오프리를 도와줄 수 없었다. 미오가 초조하게 앞을 바라보는데 벤이 손을 들었다.
“궁수들 준비해라.”
“……?”
검을 빼 들기에 지오프리와 검술로 일대일 승부를 할 줄 알았다. 미오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벤이 큰 소리로 웃었다.
“설마 내가 공작과 겨루기라도 할 줄 알았나? 나는 땀 흘리는 일은 질색이거든. 걱정하지 마. 조금 있다가 말이야. 그 목은 내가 손수 거두어 주지.”
궁수들이 겨눈 화살 끝은 죄다 지오프리를 향해 있었다. 이제 벤이 팔만 흔들면 지오프리와 미오는 맥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두려움에 미오는 지오프리의 품을 파고들었다.
‘이번에는 같이 죽는 엔딩이구나.’
생각지도 못했던 결말에 울 수도 없었다.
벤의 괴기스러운 웃음소리가 숲에 메아리치려는 찰나 뒤에서 다른 한 무리의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냐!”
지오프리는 얼른 망토를 덮어써서 얼굴을 감추고는 천천히 말을 뒤로 움직였다. 그가 어둠 속에 몸을 숨기자 벤의 뒤에서 눈 부신 승마복을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황태자 전하, 여기에서 무슨 재미있는 일을 하고 계시는지요?”
“우르체카 대공이 이곳에는 무슨 일입니까.”
당황한 벤이 부르르 떨면서 간신히 답했다.
“저는 제 친구를 찾는 중이었습니다. 혹시 카스피언 공작을 못 보셨는지요?”
알렉세이 뒤에는 우르체카 병사들이 완전 무장을 한 채 벤 일행을 에워싸고 있었다.
“이곳 숲은 병사가 들어올 수 없습니다.”
벤은 힘들게 잡은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얼른 우르체카 대공을 쫓아 버릴 궁리만 했다. 하지만 대공은 조금도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황제 폐하께 허락을 받았다면 괜찮을까요? 전하.”
“……이런.”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저렇게 나오는 우르체카 대공을 상대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그들의 무기는 사냥용이었고, 수적으로도 열세였으니까.
“우리는 이만 철수한다.”
벤의 명령에 사냥개 떼가 주인의 뒤를 쫓아서 움직였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지오프리는 어둠 속에서 그를 응시하는 알렉세이와 짧은 시선을 주고받았다.
“돌아가시렵니까? 그렇다면 제가 엄호하겠습니다. 밤의 숲이란 어떤 위험이 도사릴지 모르니까요.”
대공의 제안은 언뜻 듣기에는 다정했으나, 협박처럼 들리기도 했다.
“호의에 감사하오. 대공.”
“출발한다!”
낮게 으르렁대는 사냥개의 울부짖음이 피비린내 진동하는 숲에 요란하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