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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50)화 (50/123)

50화 여우 사냥 (3)

미오는 이러다가 실수로 큰 소리를 낼까 봐 겁이 났다.

‘여행이라니 가당치도 않아.’

독을 먹고 자루에 담긴 채 버려진 그녀는 들개 떼에게 쫓겼다. 피투성이인 미오가 언덕 위에 서 있던 지오프리를 발견했던 순간이 지금처럼 생생했다.

지오프리와 사냥터 쉼터에 며칠 머무르면서 치료를 받았다. 물론 평소의 그와 달리 퍽 친절한 편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건 절대 여행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 하고 싶은 말이 뭐지?”

그제야 미오의 불편한 표정을 알아차린 지오프리가 물었다. 이때다 싶어서 그녀가 얼른 고개를 들고 입을 뗐다.

“제대로 해명을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공작님을 남몰래 사랑하는 수많은 아가씨가 얼마나 상처받겠어요. 아까도 보니까 공작님의 눈부신 미모를 훔쳐보는 분들이 참 많더라고요.”

거짓은 아니었다.

아무렇게나 입어도 번쩍거리는 빛을 뿜어내는 지오프리가 제대로 갖춰 입자 제대로 쳐다보기도 힘들 정도였으니까.

미오 역시 금방이라도 홀릴 것 같아서 아까부터 허공이나 땅을 보면서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게 신경이 쓰이는 건가?”

“……네?”

“걱정할 필요 없다. 나는 여기에 너와 함께 온 것을 잊지 않았으니까…….”

지오프리, 이 답답한 남자!

그런 말이 아니란 말이다.

석고 팩을 바른 것처럼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 미소를 띠려고 애썼다. 미오는 최대한 상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런 사냥터라면 새로운 인연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 해서요.”

사냥 대회에는 참석하지 않는 숙녀도 오늘 많이들 왔다. 그들은 아름다운 드레스와 보석 장식으로 미모를 뽐내고 있었다. 모르긴 해도 전부 대단한 가문의 아가씨들이 분명했다.

‘다들 혼인 적령기의 아가씨들이었으니, 멋진 신사와의 만남을 고대하고 있겠지.’

로렌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떠올랐다. 혼인 적령기도 지나 버린 공작님이 언제 결혼을 할지 걱정이라고.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로렌이 얼마나 가여웠는지 모른다.

‘당신의 주인은 조만간 미쳐서 카스피언 제국을 확 쓸어 버릴 예정이랍니다. 진정한 사랑 같은 것은 평생 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지오프리와 함께 지내다 보니 처음 품었던 생각이 살짝 바뀌었다. 그는 여전히 차갑고 무심한 데다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내기는 하지만.

‘조금은 다정한 구석이 있는 것 같으니까.’

한창 고민에 빠진 미오를 살피던 지오프리가 인상을 썼다. 그는 미오가 이렇게 굴 때마다 조금 짜증이 났다.

‘나를 열렬히 사랑한다면서, 이건 무슨 의미지?’

라비니아를 비롯한 다른 귀족 영애와의 만남을 운운하는 미오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게 오고 싶다고 해서 데리고 왔다니…….’

그는 이곳에 미오를 데려오려고 제법 수고를 들여야 했다. 아무나 참여할 수 없는 사냥 대회였기에 카스피언의 몰락 귀족 신분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집사의 말을 못 이긴 척 들어주었지만, 그의 의지도 다분히 반영된 일이라는 것이다.

‘그랬는데 여기 와서 고작 한다는 소리가 그런 건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달리는 미오의 몸은 곧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미오.”

“……네.”

어쩐지 기운이 없어 보이는 미오가 비스듬하게 고개를 들었다. 지오프리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눈이 마주치는가 싶더니 지오프리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 내게 다른 사람은 없어.”

“……?”

“나는 저기 만나 봐야 하는 사람이 있으니, 뒤에 천천히 오도록 해.”

그녀의 곁에서 보조를 맞추어 걷던 지오프리가 조금 말을 빠르게 달렸다.

“공작님! 도대체 그게 무슨 말…….”

지오프리가 앞서 나가자 뒤에 있던 사무엘이 얼른 미오의 곁에 다가왔다. 하늘색 머리를 나풀거리던 사무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에게 물었다.

“공작님이 갑자기 왜 저렇게 빨리 달리시는 거죠?”

그녀 역시 지오프리가 무슨 생각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글쎄요. 누굴 만나러 간다고 했는데, 여우 사냥을 하려는 걸까요.”

그녀의 말에 사무엘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닐 겁니다. 공작님은 사냥을 즐기지 않으시거든요. 제가 공작님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사무엘은 그녀 곁에 공작의 호위병을 몇 남겨 두고서 곧 공작의 뒤를 쫓았다.

“……또 혼자네.”

선두 무리와 한참 떨어진 이곳에는 숙녀들의 대화가 한창이었다. 황제와 함께 앞장선 알렉세이는 까만 점이 되어서 아예 보이지도 않았고, 공작도 점점 멀어졌다.

‘도대체 지오프리의 말은 무슨 의미일까.’

그렇게 오고 싶어 한 사냥터지만, 기분은 엉망진창이었다. 심지어 아까 만났던 천사 같은 남자의 얼굴조차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혼자 있고 싶어.’

속이 울렁거리고 눈물이 차올랐다. 괴상망측한 감정 변화를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다.

‘호위병을 따돌려야 해.’

우는 얼굴을 누구에게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다. 미오가 슬쩍 여인들이 많은 곳으로 들어가는 척했다. 그랬더니 예상대로 호위병의 경계가 느슨해졌고, 미오는 천막 뒤로 숨은 뒤 사람이 없는 쪽으로 말을 달렸다.

* * *

그렇게 한적한 오솔길에 접어든 지 얼마나 지났을까.

복잡했던 기분이 조금 차분해졌다.

“왜 이런 기분이 들지?”

몸의 털이 바짝 곤두서더니 온몸이 지나치게 예민해졌다.

‘맙소사! 아니지? 아닐 거야.’

고삐를 붙잡은 손이 덜덜 떨리더니 몸에 뜨거운 기운이 요동쳤다. 기민한 말 역시 미오의 상태를 눈치챈 건지 앞발을 들고 불안한 소리를 냈다.

“안 돼. 지금은 진짜 안 돼.”

버텨 보려고 미오가 안간힘을 썼지만, 이내 눈앞에 어둠이 깃들었다.

미오가 다시 눈을 뜨자 시간이 제법 흘러 있었다. 나무 꼭대기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제법 짙은 빛을 띠었다.

‘최악이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지금의 상태를 알 수 있었다. 힘없이 두 팔을 번쩍 들었다. 그러자 찹쌀떡 같은 두 발이 눈에 들어왔다. 몇 배는 발달한 오감으로 숲에서 나는 냄새를 모조리 맡을 수 있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 기도 차지 않았다.

‘여우 사냥터에서 여우로 변하는 것만큼 최악의 일이 있을까.’

제일 한심한 부분은 이 일을 그녀가 자처했다는 점이었다.

‘지오프리를 벗어나는 데 집중하느라, 내 상태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어.’

하지만 지금은 울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자칫하면 죽을지도 모르니까.’

털이 수북한 발을 핥던 미오가 일단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사냥꾼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나무 뒤, 썩은 잎사귀 무더기 안으로 파고들었다. 일단 안전한 자리를 확보한 뒤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눈에 띄는 은색 털을 대충 가린 미오가 켜켜이 겹쳐진 나무 기둥을 응시했다.

‘왜 변한 거지.’

일단 그것부터 의문이었다. 얼마 전에 지오프리가 넘어지는 그녀를 붙잡아 주기도 했고, 미오가 그의 머리를 닦아 주기도 했는데. 게다가 막 마차 안에서도 퍽 민망한 일이 있었다.

‘입맞춤만큼 확실한 게 없다는 걸까.’

변수가 너무 많아져서 확실한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아니, 그 전에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방법부터 찾아야 해.’

우스운 이야기지만, 지금 떠오르는 얼굴은 단 하나였다.

‘일단 지오프리를 찾아야 해.’

사냥꾼이 득실대는 숲에서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이곳에는 그녀를 도와줄 친구가 하나도 없었다.

‘재수 없기는 해도 까마귀라도 있었으면 좋겠어.’

미오는 최대한 몸을 낮춰서 그림자 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땅의 울림과 냄새에 최대한 집중했다. 숲 깊은 곳을 헤매던 미오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지. 아주 약하지만, 그의 냄새가 나.’

여우 사냥의 종료를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린 것은 한 시간 전이었다. 그가 무슨 이유로 늦게까지 숲을 다니는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온 신경을 집중해서 걷는데, 드디어 인기척이 느껴졌다.

‘지오프리의 냄새는 아니야. 이건…….’

뭔가 타는 냄새와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놀란 미오가 얼른 몸을 숨기려는데 곧 사방이 밝아졌다. 한 무리의 사냥개가 미오를 에워쌌다. 묽은 침을 질질 흘려 대던 개 떼는 상상했던 그 모습보다 훨씬 더 끔찍했다. 그 뒤로 말을 탄 남자 몇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아니, 이게 뭘까.”

횃불이 그녀가 있는 바닥을 비추었고, 미오의 은색 털이 반짝임을 일으켰다. 흥분한 사냥개를 진정시킨 남자가 뒤돌아서 크게 외쳤다. 남자의 큰 목소리에 사냥개 떼가 다시 미오를 갈가리 찢을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은여우라니 이런 횡재가 다 있을까요. 황태자 전하. 본 사냥 전에 제법 재미를 좀 보겠습니다요.”

공포에 질린 미오는 다리가 굳어서 달아날 수 없었다. 그때 천천히 그녀를 향해서 다가온 것은 금발의 한 남자였다. 광기 어린 눈을 한 남자가 음험하게 웃고 있었다. 여우로 변했지만 미오는 그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붉은 피가 잔뜩 튄 금발이 횃불 아래에서 불길한 빛을 발했다. 호수 같다고 생각했던 푸른 눈에 핏발이 서서 괴이한 느낌을 주었다.

‘아까 벤이라고 했던 남자가 황태자였구나.’

황태자라면 황후의 아들, 지오프리의 적이었다.

황태자가 한 발 앞으로 나오면서 검에 묻은 피를 핥았다.

“은여우라니 다 죽었다고 들었는데……. 아주 좋아. 저건 길러 보고 싶으니까 잡아서 나한테 가져와. 야생의 여우가 내 손길 아래 온순한 양이 되는 게 퍽 재미있을 것 같거든.”

―크르르, 크르르.(어림도 없는 소리!)

여우를 새장에 가둔다니, 그런 역겨운 발상을 할 수 있다는 게 믿을 수 없었다.

“반항하는 짐승을 굴복시키는 건 퍽 재미있거든.”

야비하기 그지없는 그의 음성에 미오는 물러서지 않았다. 점점 다가오자 말 뒤에 주렁주렁 달린 것이 눈에 들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꿩과 사슴, 토끼, 여우가 목을 축 늘어뜨린 채였다. 말의 옆구리와 다리를 타고 붉은 피가 뚝뚝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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