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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49)화 (49/123)

49화 여우 사냥 (2)

황후는 승마복 차림이 아닌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말에 걸터앉아 있었다. 구불구불한 금발에 푸른 눈의 황후는 흡사 여신 같은 느낌을 주었다. 미오는 시선을 사로잡는 황후가 내뱉은 말 때문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누가 누구한테 흠뻑 빠졌다는 거야.’

처음 만난 황후한테서 왜 이런 이야기를 듣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등에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면서 미오는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지오프리를 유혹해서 걷어차 주겠다는 계획은 변함없었지만, 대외적으로 이런 소문은 곤란했다.

‘나는 오늘 금발 미남을 찾으러 왔으니까…….’

더 이상한 것은 지오프리가 대꾸하지 않고 가만 듣고만 있는 것이었다.

‘그 성격은 다 어디 갔대?’

미동도 없는 지오프리를 한번 흘끗 본 미오는 황후에게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카트리나. 이제 슬슬 시작해야 할 것 같군.”

황제는 지오프리에게 따로 인사도 없이 말을 돌렸고, 우르체카 대공과 황후가 그 뒤를 따랐다.

‘이게 뭐지.’

눈치가 별로 없는 그녀였지만, 황제가 지오프리에게 단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사이가 나쁜 정도가 아니라 거의 남남 같아.’

지오프리는 황제와 전 황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니까 황제의 친아들이 분명한데, 이게 다 무슨 일일까.

하지만 책을 대충 읽었던 탓에 그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다.

‘모르긴 해도 지오프리 기분이 별로일 것 같아.’

지오프리의 옆에서 보조를 맞추던 미오가 슬쩍 그를 살폈다. 그의 얼굴은 먹구름이 낀 것처럼 거무튀튀했다.

‘이래서 사냥 이야기만 나오면 그렇게 심각한 얼굴이었구나.’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지오프리의 일이다.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 귀족 걱정이야.’

지금 그녀는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난 정말 평범하게 살고 싶어. 그렇게 부유하지는 않아도 괜찮으니까 말이야.’

언제 여우가 될지 몰라서 벌벌 떨지 않고, 누구에게 애정을 갈구하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되는 그런 인생 말이다.

“미오. 여기 잠깐만 있어. 금방 돌아올 테니.”

멀리서 손을 흔드는 한 남자를 발견한 지오프리가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그녀가 혼자 남자 수십 쌍의 눈이 일제히 미오 쪽을 향했다. 그중 몇몇은 금방이라도 그녀에게 다가와서 말을 걸 것 같았다.

‘오지 마. 할 말 없어’

이곳에서 그녀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지오프리와 대공뿐인데 두 사람 모두 바빠 보였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친해지는 재주는 없어.’

괜히 대화를 나눴다가 지오프리가 염려하던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체면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긴다는데, 내가 실수하면 불같이 화를 낼 거야.’

주변의 눈치를 살피던 미오가 조용히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았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겨우 편하게 숨을 쉴 수 있었다. 바닥에 난 잡초를 씹으면서 꼬리로 파리를 쫓는 말의 모습에 한숨이 났다.

“내가 무슨 배짱으로 여길 온 거지.”

멀리서 들리는 개의 울음소리에 등이 뻣뻣하게 굳었다.

숲에서도 음식을 늘 남겨 주는 다정한 곰과 달리 늑대나 들개는 그녀를 못살게만 굴었다.

‘평생 좋아질 것 같지 않다니까…….’

말고삐를 쥔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가는 찰나 누군가의 그림자가 그녀를 뒤덮었다.

‘……지오프리?’

그가 그녀를 찾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본 그곳에는 낯선 남자가 있었다.

‘이게 꿈인가?’

햇살에 반짝이는 금발 아래 호수를 품은 푸른 눈이 그녀를 향해 있었다. 호리호리하지만 키가 큰 남자가 산뜻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놀라게 해 드린 건 아니겠죠?”

“아니에요.”

“저기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숨을 곳을 찾고 있었답니다.”

상대는 지오프리와 같은 붉은 재킷에 흰 바지, 검은 부츠 차림이었고, 한눈에도 지체가 높은 가문의 영식일 게 분명했다.

‘귀족 중에도 이런 생각을 품은 사람이 있었구나.’

깊은 동질감에 미오는 상대에게 호감을 느꼈다.

“저는 벤이에요. 당신은 처음 보는 얼굴이군요.”

“저는 우르체카 공국에서 온 미오입니다.”

미오의 얼굴을 뚫어지게 훑던 벤이 다시 상냥하게 입을 뗐다.

“아, 우르체카라면 예전에 여행해 본 적이 있습니다. 눈 내리는 풍경이 정말 멋진 곳이죠. 당신은 그곳에서 온 천사 같아요.”

다정한 남자가 하는 말은 죄다 꿀이 떨어질 것처럼 달콤했다.

‘천사는 내가 아니고 당신 같은걸.’

벤에게 흠뻑 빠져 있는 그때 사냥 시작을 알리는 나팔이 울렸고, 개들이 거칠게 짖기 시작했다. 만나자마자 헤어질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사냥 마치고 제가 당신을 찾아가도 될까요. 미오.”

벤의 물음에 그제야 현실을 떠올린 미오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지오프리가 안다면 가문의 체면이 어쩌고저쩌고하면서 잔소리를 퍼부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우르체카 대공은 상처받은 얼굴을 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내가 이곳에 온 건 이런 걸 노린 거잖아.’

“좋아요.”

희망으로 부푼 미오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느낌이 좋았다.

* * *

늑대보다 높은 운명을 지닌 사람만이 늑대를 잡을 수 있다.

카스피언 제국에 내려오는 전설의 한 구절이었다.

선조들은 북방의 척박한 환경 속에 칼바람을 맞아 가면서 사냥을 했다. 목숨을 걸고 덤벼들어야 했기에 사냥꾼이 죽는 일은 허다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잔학무도한 사냥으로 결국 선조들은 숲의 주인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 바람에 늑대와 여우의 씨가 말라서, 근래는 제국령으로 사냥을 금지했다.

“정말 오랜만의 여우 사냥 아닙니까?”

“가장 큰 여우를 잡는 사람이 우승자라고 하더군요. 누가 1등을 할지도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혈통이 좋은 사냥개를 데려온 가문이 유리하겠죠.”

모처럼 여우 사냥에 모두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주변의 신나는 음성과 달리 미오의 기분은 자꾸 가라앉았다.

‘다들 뭐가 그렇게 좋은 걸까.’

사람들은 고기를 얻기 위해서 여우를 사냥하지 않았다. 그냥 단순한 재미였다. 몸집이 작은 짐승이 달아나는 것을 쫓아서 사로잡는 과정을 즐겼다.

‘가끔은 귀부인의 목이나 모자를 장식하기도 했지.’

통째로 목도리가 된 여우의 마지막을 보는 것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여우의 털을 얻기 위해서 살아 있는 상태에서 가죽을 벗기는 일도 있었다. 계속 그 생각을 하자 속이 울렁거렸다.

“안색이 계속 좋지 않군.”

“괜찮습니다.”

그녀를 내려다보던 지오프리의 말에 미오가 힘없이 답했다. 지금 소원이 하나 있다면 이 끔찍한 사냥을 빨리 끝내고 아까 만난 금발 천사를 보는 것이었다.

한편 카트리나 황후는 천막 아래 기다란 의자에 비스듬하게 기대 누워 있었다. 뒤에서 누군가 연신 부채질해 주었고, 입으로는 과일을 넣어 주었다.

“모든 게 완벽하구나.”

포도씨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뱉은 그녀가 활짝 웃었다. 오랜만에 개최한 사냥 대회에 많은 귀족이 참가해 주어서 퍽 성공적이었다. 초조한 기색을 감춘 그녀가 하녀에게 물었다.

“그래, 벤은 도착했더냐.”

“네. 늦게 오셔서 막 황제 폐하를 뵈었다고 합니다.”

“불효막심한 녀석 같으니라고.”

어미의 마음도 모르고 내내 반항만 하는 아들 때문에 심란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데…….”

하지만 술술 잘 풀리는 일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 화를 낼 이유도 없었다. 우르체카 공국에서 온 여인에게 푹 빠졌다는 지오프리를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때가 어느 땐데 사랑 놀이나 하고 있다니.’

오늘 대부분 사람은 붉은 여우를 사냥하겠지만, 아마 지오프리는 색다른 사냥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단다. 지오프리.”

그녀의 붉은 입술을 타고 살벌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 * *

여우 사냥은 퍽 순조로워 보였다.

소수의 사냥꾼 무리가 앞장서자 굶주린 사냥개가 쫓아가기 시작했고, 여러 무리로 나누어진 귀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사냥에 딱히 열의가 없는 지오프리는 한참 뒤에 처져 있었다. 주변에 사람이 줄어드는 것을 확인한 미오가 아주 은밀하게 속삭였다.

“저기, 공작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뭐지.”

지오프리가 그녀의 곁에 살짝 붙자 미오가 더욱더 음성을 낮추었다.

“아까 황후 폐하가 이상한 말씀을 하시던데요.”

다른 말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녀를 위아래로 훑으면서 공작이 흠뻑 빠질 만하다고 했던 건 잊을 수 없었다.

‘얼마나 황당한 말이 아닌지 몰라.’

자칫하면 여기 온 귀족들도 그녀와 지오프리를 연인으로 오해하고도 남을 말이었다. 카스피언 백장 성에서도 로렌을 비롯한 여러 고용인의 뜨거운 시선을 받는 터라 그런 오해는 정말 달갑지 않았다.

“……글쎄.”

너무 성의 없는 답이 그의 입술을 타고 흘렀고, 미오의 콧잔등에 주름이 잔뜩 졌다.

‘그게 지금 아무렇지도 않다는 거야? 어째서?’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지오프리였고, 아까보다 조금 더 초조해진 그녀가 다급하게 물었다.

“저한테야 퍽 좋은 일이지만, 공작님 체면이 상하게 될까 봐 걱정돼서요.”

끝까지 그의 팬인 척하느라, 그를 위하는 척하느라 미오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말에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인 지오프리가 답을 내어놓았다.

“딱히 오해는 아니기도 하지. 우리가 몇 번이나 동침했고, 단둘이서 여행했던 사이니까.”

“……네?”

지오프리가 담담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 오해를 사는 게 무리는 아니라는 거야. 나는 누구와도 한 침대에 누운 적도 없었고, 여행을 다닌 적도 없거든.”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머리가 더욱더 혼란스러웠다. 금방 정신을 차린 미오가 그의 곁으로 더욱더 가까이 말을 몰았다.

“하지만 공작님! 그건 전부 사소한 사고에서 비롯된 일이었고, 게다가 그건 여행도 아니었잖아요?”

터져 나오는 비명을 꾹꾹 눌러 가면서 미오가 항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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