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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48)화 (48/123)

48화 여우 사냥 (1)

침묵이 길어지자 아랫배가 꼬일 것 같았다.

이럴 거면 우르체카 대공의 마차에 타게 그냥 두든가.

엉덩이는 덜덜 떨려서 불이 날 것 같았고, 멀미가 나서 어지러운데 이 마차에는 먹을 것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였다.

고기를 넣은 파이와 말린 소고기가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후회해 봐도 이미 늦었는데…….’

그녀가 홀로 입을 삐죽대는데, 지오프리가 입을 뗐다.

“우르체카 대공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이건 또 무슨 이야기야?’

미오는 콧방귀를 뀌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지오프리가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미오의 삐죽대는 표정을 내려다보던 그가 말을 이었다.

“그는 공국에 이미 약혼자가 있기도 하고.”

“……?”

미오는 도무지 그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공에게 약혼자가 있는 게 그녀와 무슨 상관이지?

“그와 너무 가까이 지내지 않는 게 좋다는 말이다.”

“……아.”

짧은 탄식을 내뱉은 미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약혼자가 있는 우르체카 대공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니까 가까이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걸까. 아니면 내가 대공에다 약혼자까지 있는 남자에게 추파를 던지는 것을 경고하는 걸까.’

하지만 어느 쪽이든 미오는 조금 억울했다. 그녀의 신분을 만들어 준 것은 지오프리였다.

‘내가 우르체카 대공을 선택한 것도 아니잖아.’

굳이 대공이라는 높은 사람의 사촌이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닌데.

게다가 대공을 유혹할 계획은 조금도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미오가 고개를 들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우르체카 대공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분이 서류상이지만 제 친척이고, 공작님의 손님이니까…….”

상대는 공국의 대공이니까, 그녀는 그를 대할 때 예를 갖출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가 왜 이런 변명을 해야 하는 거지?’

꼭 부정이라도 저질러서 연인에게 해명이라도 하는 느낌이라서 기분이 묘했다.

덜커덩.

마차가 심하게 요동쳤고, 그녀의 몸이 사방으로 흔들렸다.

“……이런.”

균형을 잃은 미오의 몸이 마차의 천장까지 떠오르는가 싶더니 곧 내려앉았다.

“…….”

갑작스레 몸이 붕 뜨는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간신히 두 팔을 뻗어서 잡을 것을 찾는데 뭔가 탄탄한 것이 만져졌다. 놀란 그녀의 눈이 걸터앉은 곳이 지오프리의 허벅지라는 것을 확인했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니까.’

덜덜 떨면서 미오가 그를 향해서 어설프게 웃었다.

“마차가 심하게 흔들리네요?”

그렇게 벌떡 일어서려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미오는 허리에 감긴 굵은 손목을 볼 수 있었다.

“공작님, 붙잡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 괜찮으니까 제 자리로 갈게요.”

“덜컹댈 때마다 천장에 머리를 받을 셈인가? 그냥 내 옆에 앉아 있어.”

“그렇게까지는―.”

미오가 손사래를 치는데 다시 마차가 심하게 요동쳐서 바닥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그렇게 지오프리의 옆에 딱 붙어 앉게 된 그녀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너무 가까워서 허벅지가 닿을 것 같아.’

몸을 최대한 창 쪽으로 붙여 봤지만, 그래도 여유가 없었다. 미오의 얼굴을 슬쩍 본 그가 입을 열었다.

“얼굴이 왜 그렇지?”

“제가 오늘 공작님이랑 사냥 대회 갈 생각에 너무 들떠서 잠을 설쳤나 봐요.”

진실만을 이야기했다.

다만 그게 설렘이 아니라 두려움이라는 것은 밝힐 수 없었지만.

“눈을 조금 붙이는 게 좋을 거야.”

지오프리가 손을 뻗어서 그녀의 앞머리를 살짝 건드렸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움츠러든 미오가 고개를 조용히 저었다.

‘이렇게 가까이 네가 있는데 잠이 올 리가 없잖아.’

하지만 언젠가처럼 그의 말은 주문이 되어서 미오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쓸데없이 고집은…….”

안 자겠다고 한 게 몇 분 전인데 벌써 한잠이 든 것 같았다. 그때 미오가 팔을 버둥대면서 중얼댔다.

“토끼야. 빨리 와!”

꿈속에서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지 입술까지 꽉 깨물었다. 고개를 살짝 숙인 지오프리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쉬. 여기는 안전해.”

공중에서 부유하는 손목을 붙들어서 가만 그녀의 무릎 위에 올려 두었다. 그의 음성을 듣기라도 한 건지 미오는 더는 잠꼬대를 하지 않았다.

대신 부드러운 것이 그의 어깨 위로 슬그머니 무너져내렸다. 미오의 부드러운 은발이 그의 팔을 한가득 뒤덮었다. 손가락 하나면 그녀의 몸을 밀어 버릴 수 있었다.

“……음.”

‘기특하니까 한 번 정도는 봐주지.’

아까 미오는 그가 원하는 답을 내어놓았다.

‘이제까지 알렉세이에게 친절하게 대한 것은 별 이유가 아니었다는 거잖아.’

미오의 거부에 실망한 알렉세이의 얼굴을 떠올리자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천하의 바람둥이라서 거절에 익숙하지 않을 텐데…….’

하지만 그와 멀리하라는 충고는 진심이었다. 알렉세이는 약혼자가 있는 남자인 데다, 정말 위험한 구석이 있었다.

가까이에서 개 떼가 짖는 소리가 소란스레 울렸고, 마차의 속도가 줄어들고 있었다.

“거의 다 왔나 보군.”

여전히 세상모르고 잠에 취한 미오는 입맛까지 쩝쩝 다시고 있었다. 부드러운 분홍빛 입술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음.”

잊었다고 생각했던 어느 밤이 생생하게 떠오르자, 꽉 매어 둔 스톡 타이가 숨통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나를 이렇게 만들어놓고 잠이 오는 건가?’

“일어나!”

괜한 심술이 난 그가 어깨를 세차게 흔들자 깜짝 놀란 미오가 제자리에서 뛰어올랐다.

“헉헉! 전부 무사한가요?”

“……꿈에서 깨는 게 좋겠군.”

“아, 꿈이었군요.”

미오가 멍한 눈으로 두 팔로 기지개를 시원하게 켰다.

‘창에 기대 잔 것치고는 어깨나 목이 별로 결리지 않는 게 신기한데?’

“……저, 저게 뭐죠.”

우연히 창밖으로 눈을 돌린 그녀의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사냥개가 떼거리로 몰려 있었다. 그제야 미오는 그녀가 어디에 와 있는지 실감이 났다.

“여우 사냥에 온 것을 환영한다.”

장갑을 챙겨 끼던 지오프리의 인사에 미오는 잠에서 완전히 깰 수 있었다.

* * *

마차는 완전히 멈춰 섰지만, 미오의 어깨는 여전히 떨렸다.

‘만약 숲에서 여우로 변하기라면 하면 어쩌지?’

사냥개 떼에게 쫓겨서 달아나다 쓰러진 그녀가 개에게 물리는 장면이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내가 여우 사냥에 참석하다니 웃기는 일이야.’

새로운 인연을 찾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 중요한 것을 놓쳤다.

‘너무 한심해서 할 말이 없네.’

날카로운 화살에 맞는 것은 무척 끔찍했다. 눈앞에서 화살을 맞고 픽픽 쓰러지던 작은 친구들의 얼굴이 선명했다. 털이 복슬복슬한 토끼의 몸이 싸늘하게 식어 가는 것을 지켜만 봐야 했다.

‘사과 한 알도 나눠 먹는 좋은 녀석이었는데…….’

“이제 내려야 하는데, 얼른 준비하지.”

“아, 죄송해요.”

지오프리가 먼저 마차에서 내려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음성에 상념에서 벗어난 미오가 장갑을 챙겼다.

‘여기까지 와서 물러날 생각을 하면 안 되지.’

배에 잔뜩 힘을 준 그녀가 지오프리의 손을 잡고 천천히 마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결심은 몇 초도 되지 않아서 금방 흩어졌다.

‘이게 다 뭐야.’

비슷한 복장을 한 귀족 무리가 전부 말에 탄 채 가벼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주변으로 백 마리도 족히 넘을 것 같은 사냥개가 사냥을 앞두고 잔뜩 흥분해 있었다. 커다란 귀를 펄럭대면서 묽은 침을 뚝뚝 흘리는데 그 모습에 팔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이제 말을 탈 거다.”

두 사람 앞에 말고삐를 쥔 시종이 다가왔다.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 미오는 일부러 가슴을 한껏 내밀었다.

윤기 나는 검은 말은 지오프리의 것이었고, 미오의 것은 몸집이 작은 암갈색 말이었다. 말에 올라탄 두 사람이 인파가 몰린 곳에 나타나자 주변이 조용해졌다.

“……카스피언 공작님.”

귀족들이 저마다 인사를 건네면서 길을 터 주었다. 그들은 지오프리의 곁에 있는 미오를 향해서 호기심 어린 시선을 감추지 않았다. 이제까지 누구도 대동하지 않았던 지오프리가 처음으로 데리고 온 여인이었다.

“누구인지 알고 있나?”

“들리는 말로는 우르체카 대공 각하의 먼 친척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오늘 사냥에 대공 각하가 참가한 거군.”

알렉세이 우르체카는 카스피언 제국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워낙 유명 인사라서 제국 전체에 소문이 파다했다. 들리도록 수군대는 사람을 뒤로한 채 미오는 등을 꼿꼿하게 펴려고 노력했다.

‘대놓고 뒷담화를 하다니, 정말이지 품위 없는 일 아니야?’

지오프리가 천천히 말을 세우자 미오 역시 그의 옆에 섰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 카스피언 공작과 제 사촌이 도착했군요.”

먼저 도착해서 황제 내외와 편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던 대공이 손을 흔들었다. 미오는 그의 여유 넘치는 모습에 감탄을 숨길 수 없었다.

‘대공이니 뭐니 전부 거짓말 같았는데, 이렇게 보니까 진짜 맞네.’

그나저나 언제 인사를 건네야 하는지 눈치를 살피는데, 지오프리가 탄 말이 먼저 앞으로 나갔다.

“환영 선물로 이런 것을 준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미가 되어서 이런 게 뭐가 대수겠습니까. 그나저나 요즘 공작의 얼굴이 활짝 핀 것이 퍽 보기 좋습니다. 옆에 있는 아가씨가 바로 대공의 친척이군요.”

황후의 시선이 미오에게 향하자 그녀가 쭈뼛대면서 고개를 조아렸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어머, 정말 아름다운 은발이군요. 공작이 흠뻑 빠질 만큼 고운 얼굴이네요.”

“…….”

황후의 충격적인 발언에 미오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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