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47)화 (47/123)

47화 미워해야 하는데 미워할 수 없는

식사가 끝났으면 헤어져 각자의 방으로 가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왜 이래?’

지오프리를 올려다보기만 하자 그가 손을 뻗어서 미오의 손목을 붙들었다.

“침실까지 바래다주지.”

엉겁결에 일어서서 그의 옆에서 걷긴 했지만, 미오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사람이 안 하던 일을 하면 죽을 때가 다 된 거라고 하던데…….’

벌써 이 세상에 종말이라도 다가온 건가.

“내일 말이야.”

층계를 오르던 지오프리가 아주 작은 음성을 냈다.

“……네.”

“내가 항상 옆에 있을 테니까.”

속삭임에 가까운 그의 말에 미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왜 다정하게 속삭이는 거야.’

꼭 고백을 듣는 것처럼 가슴이 간지러웠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미오가 침실 앞에 도착했다.

‘왜 손을 안 놔주는 거지.’

미오는 여전히 붙잡혀 있는 손목을 내려다보면서 입술을 달싹거렸다. 어둑어둑한 불빛만이 남은 복도에 반짝이는 것은 밤하늘을 닮은 지오프리의 까만 눈동자뿐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갑작스레 든 생각에 미오는 잠시 숨을 쉬지 못했다. 왜 그녀가 지오프리와 함께 있고 싶다고 생각한 걸까. 미오는 얼른 그의 손을 뿌리친 뒤 한 발 물러섰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나와 동행하는 이상 우리 가문의 체면을 해쳐서는 안 되니까.”

“……아.”

웬일로 침실까지 바래다주고, 옆에 있겠다면서 다정하게 구나 했더니 이거였구나.

‘자기 얼굴에 먹칠할까 봐.’

그럴 거면 이런 수고를 하면서까지 그녀를 데리고 가는 이유가 뭐지. 귀족 서류를 만들고, 승마를 가르쳐야 하는 번거로운 일을 하면서까지 말이다.

‘그냥 그 잘난 라비니아랑 같이 가지 그랬어? 그렇게 가고 싶어서 안달이 났던데.’

드레스 자락을 꽉 잡은 미오가 굳은 얼굴로 꾸뻑 인사했다.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완벽한 예법을 갖춘 미오의 인사에 지오프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곧 그의 앞에서 문이 쾅 하고 닫혀 버렸다.

한밤중의 복도를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미오는 기대고 있던 문에서 주르륵 미끄러졌다.

“도대체 얼마나 더 착각해야 정신을 차릴 거야?”

지오프리가 그녀를 좋아할 일은 절대로 없다. 그가 다정하게 굴 때는 뭔가 음흉한 속셈이 있을 때뿐이다.

‘그러니까 정신 차려.’

지오프리에게 붙들려 있던 손목을 매만지면서 울먹거렸다. 지금 마음을 한 단어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속상했고, 부끄러웠고, 서러웠다.

‘내가 항상 옆에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의 음성이 불쑥 귓가에 맴돌자 다시 심장이 쿵쾅댔다. 심장께를 꽉 쥔 그녀가 혼자 중얼댔다.

“술! 술을 많이 마셔서 그래.”

역시 술은 건강에 해로운 것이 분명하다. 미오는 하던 생각을 멈추고 침대로 달려가서 몸을 던졌다.

“지금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내일 백 명도 넘는 미남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진짜 오랜만에 미오는 처음 계획을 곱씹어 보았다.

어쩐지 새로운 미래로 한발 다가서는 느낌이었다.

* * *

아침 햇살이 볼을 간지럽히기 시작하자 침대에 누워 있던 미오가 몸을 부스스 일으켰다.

“아침이네.”

눈을 뜨긴 했는데 머리가 멍한 게 기분이 이상했다.

“불면증도 전염이 되는 걸까?”

로렌의 말로는 지오프리는 밤에 한두 시간 겨우 잘까 말까 한단다.

‘내 옆에서는 잘만 자던데…….’

지오프리가 자기를 무슨 수를 재웠냐고 버럭 화를 내던 게 생생했다. 미오가 손목에 코를 대고 킁킁대는데, 역시나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내게 그런 능력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때였다.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려서 후다닥 자는 척을 했다. 부산스레 로렌이 들어와서는 커튼을 걷고, 창을 활짝 열었다. 미오 가까이에 온 로렌이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탄식을 흘렸다.

“맙소사! 미오. 밤새 뭘 한 거죠? 얼굴이 왜 이래요?”

“왜요. 이상한가요?”

실눈을 뜬 미오가 두 손으로 더듬더듬 얼굴을 쓸어 보았다. 그러자 로렌이 손거울을 가져다 비추어 주었다.

“……헉!”

거기에는 얼굴이 시꺼멓고 눈 그늘이 턱까지 내려온 괴생물체가 있었다.

‘신은 없는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지.’

그녀가 유일하게 내세울 것이 귀여운 얼굴 하나였는데, 이런 꼴로 누굴 유혹할 수 있을까.

충격받은 미오의 얼굴을 살피던 로렌이 두 팔을 걷어붙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원래 무도회를 앞둔 아가씨들은 잠을 설치기 마련이고, 제가 이런 일도 다 경험이 있으니까요.”

바쁘게 움직이던 로렌이 무언가를 챙겨 왔다. 쟁반 가득 쌓인 물약과 알약을 보면서 미오가 어색하게 웃었다.

“이게 다 뭐죠.”

“다 피로 해소에 도움이 되는 약이랍니다. 먹고 나면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머리가 맑아진답니다. 아마 기운이 펄펄 날 겁니다.”

“……그런 약이 있어요?”

믿지 못해서 말끝을 흐리는데, 로렌이 약을 한 움큼 내밀었다.

“그럼요. 얼른 서둘러요.”

약을 한 움큼 삼킨 미오는 로렌의 지시하에 승마복까지 단숨에 갖춰 입었다.

“그것 봐요. 시간에 안 늦게 준비 잘했죠?”

로렌이 준 약과 빼어난 분장술 덕분인지 아까보다 훨씬 그럴듯해 보였다.

‘적어도 얼굴이 판다처럼 보이지는 않잖아.’

미오가 층계를 내려오자 먼저 준비를 마친 두 신사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등장에 대공이 한 발 나와서 감탄했다.

“미오. 그렇게 입으니 꼭 한 마리 작은 종달새 같군요.”

우르체카 공국의 승마복은 눈 부신 금색 재킷에 흰 바지, 갈색 부츠를 갖춰 입는 것이었다. 붉은 머리를 하나로 단정하게 묶어서 모자 안에 정돈한 우르체카 대공은 오늘은 다행히 정말 대공처럼 보였다.

“내 미모에 홀딱 반한 얼굴인데? 그런 표정은 단둘이 있을 때 지어 주면 좋겠는데.”

층계 앞으로 성큼 걸어 나온 알렉세이가 손을 뻗으면서 한쪽 눈을 찡긋댔다.

“……아.”

그가 건네는 부담스러운 칭찬에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미오는 그의 손을 선뜻 잡지 못한 채 알렉세이 뒤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그녀와 같은 검은 벨벳 모자를 쓴 지오프리는 완벽 그 자체였다. 몸에 꼭 맞는 붉은 재킷 사이로 타이가 단정하게 매어져 있었고, 흰 바지가 그의 균형 잡힌 근육을 여실히 드러내 주었다.

‘저건 또 어떤 눈빛일까.’

지오프리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서서 그녀의 모습을 응시했다. 무감한 표정이었으나 희미한 미소가 스친 것도 같았다.

‘뭐야. 지금 비웃는 거야?’

혼자만 지오프리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게 짜증이 났다. 미오는 시선을 거둔 뒤 대공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어제 나갔던 일은 잘 보셨나요.”

지오프리 대신 그를 선택한 것이 감격스러운지 대공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겨우 하루였는데, 내 빈자리가 그렇게 못 견디게 외로웠나요?”

“……네?”

“그렇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종달새 미오.”

대공의 지나친 확대 해석에 미오는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가뜩이나 밤에 잠을 못 자서 머리가 깨질 것 같은데…….’

대공의 말은 그녀의 두통을 악화시켰다. 한숨을 내쉬면서 밖으로 나오자 두 대의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사냥터까지는 거리가 제법 된다고 했다.

“미오. 오늘은 마차를 꽃으로 장식해 봤습니다. 어때요?”

우르체카 대공은 꽃 선물도 부족해서 마차 외관을 꽃으로 도배해 두었다. 달리는 꽃마차에 탄 대공을 상상하자 어쩐지 이상했다. 그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리자, 대공이 눈을 크게 떴다.

“미오가 그렇게 웃어 주니까 내가 새벽부터 꽃을 구하느라 들판을 누볐던 시간이 조금도 아깝지 않군요.”

“대공께서 손수 꾸미신 마차라고요?”

미오가 놀라는데 누군가 그녀의 뒤에 바짝 다가섰다.

“간밤에 술에 잔뜩 취해서 돌아온 거로 아는데, 언제 꽃을 꺾었다는 겁니까. 대공 각하.”

지오프리의 은근한 지적에 대공은 혀를 쯧, 찼다.

“마차를 누가 꾸민 게 뭐가 중요한가? 이 마음이 소중한 거라네. 공작은 가만 보면 낭만이 조금도 없는 사람이야. 정말 딱해.”

대공은 가슴께를 두드리면서 미오에게 그의 진심을 호소했다. 그는 눈가를 살짝 훔치더니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이제 미오를 위한 마차에 올라타 볼까요? 오늘 특별히 고기를 넣은 파이와 말린 소고기를 간식으로 준비했답니다. 짧지만 즐거운 여행이 될 겁니다.”

고기 파이를 들은 미오의 귀가 위로 쫑긋 섰다.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새로운 풍경을 감상하는 것은 제법 멋진 일처럼 느껴졌다.

“보리스! 준비해!”

알렉세이의 손짓에 마부가 얼른 붉은 천을 펼쳤다. 마차까지 길게 깔린 붉은 천을 보면서 미오가 부담스러운 얼굴을 했다.

‘웬 레드 카펫이람.’

눈앞에 두 대의 마차를 두고 미오는 잠시 망설였다. 사실 선택은 어려울 게 없었다. 그녀에게 오라고 한 사람은 한 명뿐이었으니까.

‘지오프리는 날 두고 먼저 마차에 타 버렸어.’

그런데도 왜 선뜻 붉은 천을 밟을 수 없는 걸까.

‘그래도 역시 날 원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가는 건 우습지.’

결심을 내린 그녀가 붉은 천에 발을 디디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이리 와.”

마차의 창 너머로 지오프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오가 지오프리의 음성에 흔들리는 눈을 하자, 알렉세이의 조금 다급해진 음성이 들렸다.

“미오. 이러다 늦겠습니다. 얼른 와요.”

하지만 미오는 그를 향해서 고개를 꾸뻑 숙이고 있었다.

“대공 각하, 사냥터에 가서 뵙겠습니다.”

왜 이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정신을 차려 보니 지오프리의 건너편에 앉아 있었다.

마차가 달리기 시작한 지 몇 분이나 지났을까.

미오는 그녀가 마차에 처음 타 봤다는 것을 깨달았다. 울퉁불퉁한 길 위에 바퀴가 닿자, 몸이 위아래로 들썩댔다.

‘상상과 달리 전혀 낭만적이지 않구나.’

게다가 건너편에 앉은 지오프리는 오늘따라 냉랭했다.

오라고 할 때는 언제고 저렇게 새침하게 굴다니, 누가 보면 그녀가 멋대로 탔다고 생각할 것이다.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그리고 그런 속을 모를 남자를 내내 의식하는 게 바로 그녀였다. 마차 바퀴에 튕겨 나가는 자갈 소리와 덜컹대는 유리창 소리에 그녀의 한숨 소리가 뒤섞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