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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46)화 (46/123)

46화 불면의 밤

침실로 돌아온 미오는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서 무릎을 모은 채 그 사이에 고개를 푹 파묻었다. 잠시 후 고개를 든 미오는 발로 이불을 팡팡 찼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가 순식간에 한기가 느껴졌다.

‘내가 왜 이러지.’

속이 심하게 울렁대는데 각인 증상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살짝 달랐다. 각인으로 고열이 오르면 정신이 멍해지고, 잠시 기억을 잊는다.

‘하지만 지금 내 기억은 멀쩡해.’

지오프리의 침실에 들어서던 순간 맡았던 냄새와 피부에 닿았던 온도와 습도. 어느 것 하나 잊은 것이 없었다. 뿌연 김을 뒤로한 채 욕실에서 나온 지오프리의 얼굴은 더더욱 생생했다.

“……하.”

넘어질 뻔한 그녀를 잡아 준 지오프리의 눈빛이 오늘따라 너무 깊었다. 그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다가는 영혼을 뺏길 것만 같았다.

“내가 아니라 지오프리가 여우 같아.”

무심한 척하면서 그녀의 마음을 이렇게 들었다 놨다 하니까.

“이러다 밤을 새울지도 모르겠네.”

간신히 진정하려는데 방에 가득 찬 라벤더 향이 그녀의 코를 자극했다.

“아, 맞다.”

아까 지오프리가 그녀를 쫓아내려고 하면 쓰려고, 향유를 준비했었다.

‘라벤더 오일은 숙면을 도와준답니다. 제가 이걸로 마사지해 드릴게요.’

대사까지 준비해서 갔는데, 꺼내 쓸 생각도 못 했다.

‘아마 마사지까지는 무리였을 거야.’

안기기만 해도 그렇게 심장이 터질 것 같으니까 말이다.

그에게 안기면서 병이 깨졌는지 가운 주머니가 축축했다. 깨진 병을 꺼내다 손끝을 날카로운 유리에 베였다.

“……앗!”

붉은 피가 송골송골 스며 나오는데, 난데없이 서러움에 감정이 복받쳤다. 손끝을 입에 문 미오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더니 그대로 눈물이 쏟아졌다.

“가슴이 너무 답답해.”

하루하루가 불안했고, 초조했다.

“이제는 내가 누구인지, 뭘 하려는지 잘 모르겠어.”

언제 여우로 변할지도 모르는 이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정말 지오프리가 아닌 다른 인연을 만날 수 있는 걸까.

까마귀의 말처럼 각인은 일생에 단 한 명뿐인 걸까.

“그러면 나는 지오프리를 벗어날 수 없는 거야?”

이게 문제였다.

원작에서 여우를 죽게 만든 남자였는데, 그런 지오프리를 벗어나는 게 망설여졌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미워하는 걸로 부족한 남자를 왜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건지.

피가 멎지 않은 손으로 긴 머리를 잔뜩 헝클어뜨렸다. 사랑을 받아 보거나 해 보지도 못한 그녀에게 이건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도무지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 같아.”

그대로 침대 헤드에 기댄 미오가 달이 휘영청 밝은 밤하늘을 응시했다. 창백한 뺨으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 * *

카스피언 공작 성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은 미오만이 아니었다. 기다란 그림자가 연신 창가를 서성댔다.

지오프리의 한숨이 창에 희미한 형체를 만들어 냈다. 어쩐지 작고 여린 모습이 누군가를 닮은 것도 같았다.

“……하.”

이제까지 그에게 호감을 표시했던 여인은 많지만, 이만큼 거슬리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아까 그를 붙들었던 미오의 작은 손이 닿았던 가운 깃을 매만져 봤다.

“그런 것도 유혹이라고…….”

어설픈 몸짓에 눈만 뒤룩대는 그녀에게 넘어갈 남자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마음에 안 들어.”

그에게 잘 보이려고 향유를 얼마나 뿌리고 온 건지 미오가 떠난 지 한참인데 침실에 라벤더 향이 진동했다. 창을 열어도 폐부에 가득 찬 향이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렇게 전부 마음에 안 들기도 힘든데 말이야.”

자꾸 그를 라비니아와 엮어 보려고 하는 것도 꼴 보기 싫었다.

‘저 같은 게 감히―.’

그것도 그를 좋아한다고 연신 고백하는 주제에 말이다. 미오의 일방적인 애정에 답을 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래도 조금 거슬렸다. 지오프리는 그제야 그녀가 낫기만 하면 이곳에서 내보낼 작정이었음을 떠올렸다.

“모를 일이군.”

인생은 좀처럼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북풍에 가운을 여미면서 그의 머리를 어지럽히는 문제를 하나하나 짚어 봤다. 언제나 다각도로 문제를 분석해서 명쾌한 답을 내어놓는 것을 즐기는 그에게는 퍽 즐거운 시간이었다.

‘한 번도 틀린 결론을 도출해 낸 적이 없었지.’

하지만 알렉세이 우르체카의 방문은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것이다. 늘 향락에 젖어 사는 알렉세이 대공에게는 이번 일 역시 하나의 여흥일까.

“변수는 달갑지 않은데 말이야.”

지오프리는 오후에 목격했던 광경을 떠올리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서 서류 더미에 파묻혀 지낸 일주일이었다.

두통으로 잠시 창가에 서서 차를 들이켜는데, 멀리서 은색 머리카락이 반짝거렸다. 자연스레 그의 시선이 그 빛을 좇았다. 그리고 곧 못마땅한 신음이 흘렀다. 알렉세이의 붉은 머리카락도 함께 나풀댔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대화가 꽤 즐거운지 알렉세이의 큰 웃음소리가 정원을 메웠다.

‘꽃을 좋아했나……?’

알렉세이가 준 꽃을 받아 든 미오가 살포시 웃는 것 같았다.

‘사무엘. 여인은 꽃 선물을 좋아하나.’

창가에 섰던 그가 묻자 옆에서 펜을 놀리던 사무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지오프리에게 답했다.

‘대개 보석과 꽃을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가.’

하긴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알렉세이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분야였다.

‘내가 지금 신경 쓰는 게 알렉세이가 그녀를 쳐다보는 것인가. 아니면 미오가 내가 아닌 알렉세이를 쫓아다니는 건가.’

고민에 빠졌던 그는 하던 일을 멈추었다.

‘설마 이제 나보다 대공이 더 좋아진 건가.’

아까 미오를 안았을 때 갑작스러운 질문을 던진 것이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녀에게서 답을 들을 때까지 초조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그의 물음에 보인 미오의 얼굴은 퍽 만족스러웠다.

‘못 말리겠다니까…….’

야심한 밤에 그의 침실로 쳐들어온 미오를 떠올리자 괜히 멋쩍은 웃음마저 흘러나왔다.

명확한 답이 나오자 슬슬 피로가 몰려드는 것 같았다. 그제야 침실 가득했던 라벤더 향이 옅어졌고 지오프리는 창을 닫을 수 있었다.

* * *

“미오. 겨우 살을 좀 찌운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바지가 조금 헐렁하네요.”

로렌이 수선한 승마복을 가져와서 미오에게 입혀 본 다음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이만하면 괜찮은걸요.”

거울 앞에 선 미오가 승마복을 제대로 갖춰 입은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언제나 이런 옷을 입은 사람에게 쫓기기만 했었는데…….’

베이지색 딱 맞는 바지 위에 흰색 긴 팔 셔츠를 걸쳤다. 그리고 목에 흰색 스톡 타이를 매고 금색 핀으로 고정했다. 노란 조끼를 걸친 후 검은 재킷까지 입자, 로렌이 턱 끈이 달린 검은 벨벳 모자와 장갑을 건네주었다. 모두 갖춘 후 끈을 조절하자 로렌이 감탄을 내뱉었다.

“이 모습을 좀 봐요. 얼마나 근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그, 그런가요.”

낯선 복장이 어색해서 재킷 아랫단을 만지작대는데 거울에 로렌의 활짝 웃는 모습이 비쳤다. 도대체 그녀의 어디를 보고 이렇게 잘해 주는지 모를 일이다.

‘이곳을 떠나면 아마 맛있는 식사보다 로렌의 미소가 더 그리워질지도 몰라.’

이곳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겠다는 다짐을 떠올려 보면 정말 우스운 일이었다.

“우리 공작님 옆에서 나란히 말을 타면 얼마나 예쁠까요. 안 그래요? 아마 여우 사냥에 온 어떤 아가씨보다 아름다울 겁니다.”

깍듯이 존대하던 로렌은 미오의 부탁으로 둘이 있을 때는 퍽 친근하게 말하고는 했다. 지오프리라는 이름에 거울 속 미오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언젠가부터 그를 떠올리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미친 듯이 보고 싶다가, 절대로 보고 싶지 않기도 해.’

정말 그의 말대로 광견병이라도 걸린 건지, 마음이 하루에도 열두 번 변덕을 부렸다.

“자, 이제 잘 정돈해 둘게요. 이 늙은이 가슴이 두근대네요.”

옷을 벗어서 가림막에 걸치던 미오는 벽을 향해서 긴 한숨을 쉬었다.

‘네. 저도 무척 두근대요.’

하지만 로렌과는 전혀 다른 이유일 것이다.

사냥 대회만 생각하면 두려움에 오싹해졌으니까.

저녁 식사 시간은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

우르체카 대공이 급한 일이 있다면서 잠시 성을 비워서일까. 기다란 식탁에 마주 보고 앉은 미오와 지오프리는 말없이 식사에 열중했다. 그는 고민이 있는지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이마를 찡그렸다.

‘사람 불편하게 하는 데는 뭐가 있다니까.’

미오는 건너편에 앉은 지오프리의 표정을 살피느라 식사에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다. 접시에 있는 콩을 포크로 이렇게 저렇게 굴리다가 옆에 놓인 포도주로 목을 축였다. 오늘따라 술이 참 쓰게 느껴졌다.

식사가 거의 끝나 갈 때쯤이었다.

“승마는 거의 다 배운 건가.”

말을 탈 줄 몰라서 미오는 하루에 몇 시간씩 승마를 배웠다. 하지만 연습 시간이 부족해서 이제 겨우 말을 타고 몇 걸음 갈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다.

“잘은 못해요.”

“말과 친해지면 별문제 없을 거야.”

내일 사냥 대회 때문에 불안해하는 그녀를 위한 말일까.

‘지오프리가 배려 같은 것을 해 줄 리가 없잖아.’

혼자 고개를 갸웃대던 그녀가 다시 술잔을 잡으려고 하자 지오프리가 입을 뗐다.

“술은 그만 마시지.”

자주 보는 것도 아닌데, 잔소리만 하는 지오프리가 퍽 못마땅했다. 성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술을 마셔 볼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러다 이곳에 오게 되어서 술 구경도 못 했다.

‘여기 와서도 내내 아파서 이제 겨우 맛이나 보려는 건데…….’

미오는 그에 대한 반항으로 남은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쩌자고 그런 데를 간다고 해서…….’

인제 와서 후회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도 잘 아는데, 이 생각을 도무지 지울 수 없었다. 입술에 남은 술 방울을 손가락으로 훔치는데 지오프리가 먼저 일어났다.

“다 먹었으면 그만 일어나는 게 좋겠군.”

다가선 지오프리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고, 놀란 미오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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