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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44)화 (44/123)

44화 질투입니까 (1)

알렉세이 우르체카 대공은 키에트 제국에 인접한 우르체카 공국을 다스리고 있었다. 우르체카 공국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비옥한 토지와 금융 경제가 발달한 곳이었다. 또 빼어난 자연과 뛰어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알렉세이 우르체카의 영향력은 엄청났다.

그와 지오프리 카스피언과의 인연은 아주 오래되었다. 처음 만났을 때 지오프리는 황태자였고, 두 사람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러다 세월은 흘렀고 그사이 어쩌다 보니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누구에게도 곁을 잘 주지 않는 지오프리였기에 알렉세이는 공작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이런 이상한 부탁을 했다는 말이지.’

누군가의 신분을 하나 만들어 달라는 부탁에 처음에는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진짜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궁금했다.

‘세상 무심한 지오프리 카스피언이 부탁한 여인이 말이야.’

호기심을 품고 도착한 카스피언 제국에서 드디어 그 여인을 만날 수 있었다. 여인의 눈부신 은발이 주렁주렁 달린 리본에 거의 가려져 있었다. 신비로운 호박색 눈과 그의 가슴에도 이르지 못하는 아담한 몸집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꽉 다문 입술이라든지 아까부터 그를 흘겨보는 표정이 그리 약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

게다가 밝힐 수 없었지만, 그녀는 그에게 소중한 인연이었다.

“미오. 나는 사촌 동생을 만나기 위해서 아주 먼 길을 왔답니다.”

웃음을 참는 것 같은 대공의 음성에 미오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갔다.

‘사냥 대회에 가려면 귀족 신분이 필요했고, 그것을 대공에게 부탁했구나.’

하지만 의문은 여전히 존재했다.

‘왜 일을 이렇게 복잡하게 처리한 거지?’

카스피언 제국에도 이미 몰락한 귀족은 많을 텐데 말이다. 그냥 사라진 가문의 성이나 하나 따서 대충 만들면 좋았을 것이다.

‘게다가 이런 사람은 정말 상대하기가 힘들어.’

그는 로렌과 라비니아를 섞은 후 지오프리를 더한 느낌이라서 마주 서서 이야기 나누는 것만으로 피로감이 밀려들었다.

“각하. 저는 잘 몰랐습니다. 어쨌든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짜증스럽기는 했지만, 미오는 최대한 예를 갖춰서 답했다. 알렉세이는 손을 뻗어서 옆에 있던 흰 장미를 한 송이 꺾었다.

“미오. 오늘 누가 이런 말을 해 주었나요? 오늘 무척 아름답습니다.”

“……네?”

난데없이 무릎을 꿇은 알렉세이가 흰 장미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건 또 뭐야.’

이런 일은 처음이라서 미오의 눈이 두 배는 커졌다. 치마의 레이스를 만지작대면서 머뭇대자 그의 다른 손이 미오의 손목을 잡았다.

“내 손을 부끄럽게 하지 말아요. 미오.”

얼떨결에 꽃을 받게 된 미오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생긴 사촌 오빠를 받아들이기도 힘들었는데, 이 사람 아무래도 많이 이상했다.

“꽃, 감사합니다. 각하.”

“나를 알렉세이라고 불러 주세요. 네?”

어느새 일어난 대공이 한쪽 팔을 미오의 어깨너머로 뻗었다. 그의 품에 거의 갇히다시피 한 미오는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천천히―.”

“언제까지 기다리면 될까요. 미오.”

“그게―.”

그윽한 눈으로 미오를 응시하는데 도저히 참지 못한 그녀가 얼른 대공의 팔 아래로 빠져나왔다.

‘이렇게 나를 마음대로 휘두르려고 하는 것은 지오프리 하나로 충분해.’

그녀는 이렇게 낯선 남자가 마음대로 굴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미오가 잔뜩 인상을 쓰자 그제야 대공이 머리를 긁적였다.

“빨리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제가 또 실수한 거죠?”

“아니, 아니에요.”

대공과 말을 더 나누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빨리 머리를 굴렸다.

“저는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입니다. 제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내키지 않았지만, 대공의 에스코트를 받으면서 정원을 가로지르는데 놀란 정원사와 부러워하는 하녀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거북하다. 거북해.’

돌아가는 미오의 얼굴에 먹구름이 잔뜩 끼었다.

* * *

모두가 잠든 밤.

카스피언 공작의 집무실에는 술잔을 기울이는 두 남자가 있었다. 말없이 술을 들이켜던 알렉세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적막한 밤을 깨웠다. 술잔 속에서 찰랑대는 붉은 액체를 들여다보던 알렉세이 우르체카가 입을 열었다.

“내 사촌 동생 말이야. 무척 아름답더군.”

“알렉세이. 부탁한 일은 서류가 끝이다.”

두 사람만 있을 때는 서로 편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오늘따라 지오프리의 음성이 더욱더 냉랭했다.

“그런 얼굴을 하면 내가 겁을 먹지 않나. 지오프리.”

입꼬리를 추어올린 알렉세이는 목을 조이고 있던 풍성한 리본을 풀어헤쳤다.

“서류상으로 오빠인 내가 미오와 빨리 친해지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잖나. 왜, 그게 신경이라도 쓰이나?”

“그녀는…….”

입을 떼려던 지오프리는 다시 붉은색 술을 한 모금 삼켰다. 알렉세이가 가져온 술은 퍽 도수가 높아서 한 모금만으로도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지오프리가 말을 하려다 말자 알렉세이가 씩 웃었다.

“자네가 그녀라는 말도 할 줄 알았던가? 나는 자네가 숙녀에게 전혀 관심을 안 보여서 사무엘과 남다른 관계를 유지하는 줄 알았지 뭔가.”

“……알렉세이.”

알렉세이의 허튼소리에 지오프리는 탁자에 어지럽게 놓여 있던 단검을 들어서 날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단검은 알렉세이의 귀를 지나서 문에 그려 둔 목표에 정확하게 명중했다. 두 손을 위로 흔들면서 알렉세이가 껄껄 웃었다.

“우리 공국에서는 말이야. 대공에게 이런 무례를 범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네.”

“여기는 카스피언 제국이지, 네 놀이터가 아니야. 알렉세이.”

도를 넘어선 알렉세이의 장난에 지오프리가 제대로 화가 난 것 같았다.

“하지만 말이야. 내가 첫눈에 그녀에게 반했다고 하면 그때는 어떡할 건가.”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알렉세이 우르체카는 유명한 바람둥이로 오는 여자, 가는 여자 전부 가리지 않았으니까. 그의 사랑은 항상 진실했지만, 그 시간이 너무나 짧았다.

“밤이 늦었군. 이만하지.”

술잔을 내려 둔 지오프리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어쩐지 지독하게 피곤한 하루였다.

* * *

지오프리는 뭐가 그렇게 바쁜지 계속 자리를 비웠다. 그 바람에 알렉세이 우르체카의 말 상대는 그녀 차지가 되었다.

알렉세이 우르체카는 호기심이 엄청났다. 그는 미오에게 궁금한 게 얼마나 많은지, 눈만 마주치면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어떤 색을 좋아하나요. 어떤 음악과 계절을……?’

답을 전부 해 주다 보면 목이 아플 정도였는데, 더 큰 문제는 그의 지나친 열정에 있었다.

‘미오. 지금 이 연극에 실패하지 않으려면 평소에 입을 맞춰 두는 게 아주 중요하답니다.’

조곤조곤 권하는 대공의 말은 일리가 있기는 했다.

‘신분 위조는 걸리면 중죄기는 하지.’

그녀의 신분에 대해서 그렇게 꼬치꼬치 물어볼 사람은 없을 것 같기는 했지만.

‘만일에 대비하는 건 나쁘지 않지.’

“공작은 아마 쉬는 법을 모를 겁니다.”

대공이 식사만 함께하고 집무실로 사라진 공작의 흉을 보자 미오는 남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지오프리는 심각한 일 중독이었다. 잠도 많이 못 잔다면서 쉬지도 않고 뭔가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러다 쓰러지면 어쩌려고…….’

혼자서 지오프리 생각을 하는데 대공이 성큼 걸어 나와 그녀의 앞을 막았다.

“나와 있을 때는 내게 집중해 주겠어요?”

그는 정원에 핀 클로버를 꺾어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우르체카의 풍습인지, 대공은 항상 미오에게 꽃을 주었다. 클로버를 받아서 빙글빙글 돌리는데, 그가 입을 뗐다.

“키에트 제국이나 우르체카 공국에 와 본 적이 있나요. 미오.”

“아니요.”

그녀는 키에트 제국은커녕 카스피언 제국도 둘러본 곳은 거의 없었다.

늘 숲에서만 지냈으니까.

‘이렇게 지오프리가 사는 곳에 머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걸.’

상념에 빠진 그녀의 앞에서 천천히 걷던 알렉세이가 휘파람을 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미오가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원 산책은 정말 지루해.’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그는 라비니아처럼 그녀의 뒤통수를 칠 것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대공은 언제나 자기감정에 솔직했고, 할 말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했다.

“우르체카 공국에는 일 년 내내 눈이 오는 곳이 있답니다. 그곳에는 아름답게 조각된 얼음 조각이 전시되어 있죠. 얼음으로 만든 의자나 침대, 집도 있답니다.”

그의 설명에 이글루를 생각해 낸 미오는 어렵지 않게 그 풍경을 상상해 봤다. 가 보지 않았지만, 무척 신비롭고 아름다운 곳일 것이 틀림없었다.

“나중에 초대할 테니 오시겠습니까?”

잠시 걸음을 멈춘 알렉세이가 웬일로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나.’

첫 만남부터 그에 대한 인상이 썩 좋지 않았다.

알렉세이 우르체카는 굉장한 미남자였다. 곰도 때려잡을 것 같은 늠름한 체구에 긴 붉은 머리가 잘 어울렸다. 비취색이 감도는 깊은 눈매와 선이 굵은 얼굴이 햇살 아래 반짝거렸다.

‘내가 요즘 지오프리 얼굴을 매일 봐서 그런가.’

기준이 너무 높아진 탓에 대공이 미남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알렉세이가 활짝 웃었다. 그는 지오프리와 달리 웃음이 많았는데, 눈이 마주친 미오가 딴청을 부리자 성큼 옆으로 다가섰다.

“이제야 내 얼굴을 봐 주는군요. 미오.”

“네? 아닌데요. 매일 봤잖아요.”

“나를 제대로 본 건 처음이지 않습니까?”

몸집이 크고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주로 해서 무척 둔한 사람일 줄 알았는데, 굉장히 날카로운 구석이 있었다. 허를 찔린 미오가 주저하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습니다. 이제부터 더 많이 봐 주시면 됩니다.”

‘뭐라는 거야.’

걸음이 빠른 대공의 뒤에서 투덜대는데,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제가 또 실례할 뻔했네요. 내 손을 잡아요.”

대공은 미오의 손을 부러지기 쉬운 꽃 한 송이처럼 잡은 뒤에 아주 느릿하게 걷기 시작했다.

‘……다정한 구석이 있구나.’

미오는 햇살에 부서지는 선이 굵은 대공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바람이 달고 새가 지저귀는 평범한 오후가 저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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