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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43)화 (43/123)

43화 우르체카 대공 각하

미오는 도저히 로렌을 당해 낼 수 없었다. 우물쭈물 약그릇을 받아 들자 코 아래에서 피어오르는 역한 냄새 때문에 오만상이 찌푸려졌다.

“식으면 더 쓰니까 얼른 쭉 드세요.”

“……네.”

로렌의 재촉에 미오가 코를 틀어막은 채 약을 들이켰다. 그러자 로렌이 작은 사탕 하나를 내밀었다.

“이걸 먹으면 덜 쓸 겁니다.”

사탕을 건네받은 미오는 그것을 쥔 채 한참 망설였다.

“왜 안 드세요?”

사탕은 금방 녹아서 손가락을 끈적하게 만들었다. 미오는 혀끝에서 맴돌던 말을 하기로 했다.

“늘 챙겨 주셔서 고마워요.”

이번 라비니아의 일을 겪은 다음 깨달은 바가 있었다. 로렌을 이렇게 다시 보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차 조심해. 밥 꼭 챙겨 먹어. 우산 가져가. 약 먹자.’

어떤 사람들은 흔하게 주고받는 이야기를 미오는 듣지 못하고 컸다. 로렌의 잔소리가 꼭 그런 느낌이라 들을 때마다 가슴이 간질댔다.

‘낯설지만 좋아.’

쑥스러운 이야기를 털어놓은 미오의 볼이 발갛게 달아오르자 로렌이 손사래를 쳤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저는 처음부터 미오 아가씨가 참 좋았는걸요.”

“제가 왜―.”

가진 것도 없고, 그다지 착하지도 않은데.

그것뿐인가.

이렇게 많은 것을 속이고 있는데 말이다.

풀죽은 미오의 모습에 로렌이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사람이 좋은 데는 이유가 없는 거랍니다. 이제 좀 쉬세요.”

약그릇을 들고 나간 로렌의 말을 곰곰이 되새겨 보던 그녀는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맞다. 내가 지오프리한테 한 이야기랑 닮았구나.’

미오가 로렌의 애정에 의문을 품듯이 지오프리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그와 내가 비슷한 구석도 있는 걸까.”

녹아내린 사탕을 입에 문 미오가 조용히 우물거렸다.

* * *

미오가 깜짝 놀라서 큰 소리를 냈다.

“라비니아 님이 여기 안 계신다고요?”

라비니아의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들은 미오가 몹시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한참 전에 이곳을 떠났단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오프리가 그녀와 온천 여행을 떠난 밤에 베일 영지로 돌아갔단다.

‘내가 살아 돌아와서 복수할 수도 있으니까 미리 내뺀 건가?’

보통이 아니다 싶었는데, 굉장히 철두철미한 구석까지 있었다.

‘역시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건 잘못된 일이야.’

화가 난 미오가 거친 숨을 쉬었다.

‘당장 손봐 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주먹을 꽉 쥐자 으드득 소리가 울렸다.

태연히 독이 든 쿠키를 건네던 라비니아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카스피언 제국에 있는 한 복수는 언제든 할 수 있으니까.’

간신히 들끓어 오르는 마음을 추스르는데 바깥이 시끌벅적했다.

“이게 무슨 소리죠?”

일어나서 창밖을 내다보자 낯선 모양이 새겨진 마차가 카스피언 공작 성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미오의 물음에 옆에서 꽃을 꽂던 하녀가 답했다.

“공작님의 친구분이 멀리서 오셨답니다. 한동안 이곳에서 머무르실 거래요.”

“……아.”

손님이 거의 찾지 않는 쓸쓸한 성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하루 걸러서 낯선 이들이 방문했다.

‘게다가 지금 손님은 무슨 손님이야.’

바쁜 지오프리의 그림자도 못 본 지 벌써 일주일째였다. 초조함을 감춘 그녀가 하녀에게 슬쩍 물었다.

“혹시 공작님의 약혼자라도?”

또 지오프리의 추종자라면 미리 단단히 마음을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

“아닙니다. 우르체카 대공 각하는 남자분이세요.”

“……우르체카.”

어디서 들어 본 기분이었는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느새 꽃병을 완성한 하녀가 미오 근처에 다가섰다.

“이제 응접실에 나갈 준비를 하시면 될 것 같아요.”

“제가 왜요?”

“아, 하녀장님이 대공 각하가 오시면 아가씨 단장을 시작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손님맞이는 전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거절하면 지오프리가 또 손님의 의무니 어쩌니 하면서 잔소리를 해 대겠지?’

할 수 없이 미오는 화장대 앞에 앉아서 스무 개가 넘는 리본을 달아야 했다.

“이건 너무 많지 않나요?”

“……우르체카에서 유행하는 머리라고 해서요.”

리본을 장식한 건지, 얼굴이 리본에 파묻힌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치렁치렁한 리본을 단 머리를 거울에 비춰 보는데 울상인 얼굴이 참 우스꽝스러웠다.

질질 끌려 나가다시피 한 응접실에는 지오프리가 먼저 와 있었다.

‘그렇게 바쁘다면서 손님 접대할 시간은 났나 보네.’

그날 짐짝처럼 침대에 던져두고 사라진 이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목을 길게 쭉 뺀 미오가 지오프리의 옆모습을 살폈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먼 탓에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건너편에 앉은 손님을 슬쩍 보게 되었다.

‘붉은 머리네.’

소파 너머로 나풀대는 구불구불한 긴 머리가 미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몸집이 엄청나게 큰 사람이야.’

앉아만 있는데도 넓은 어깨와 탄탄한 몸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가 손님의 뒷모습을 살피는데 갑자기 그가 벌떡 일어섰다.

“오! 미오!”

“……?”

순식간에 다가온 낯선 사람이 그녀를 막무가내로 와락 안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누군가 이렇게 우악스레 그녀를 안는 것은 처음이었다.

“잠시만…… 잠시만요.”

너무 세게 껴안아서 무섭기까지 했다. 창백하게 질린 미오가 손으로 상대의 가슴을 두드리자, 그제야 대공이 몸을 뒤로 뗐다.

“미오, 너무 반가워서 이런 결례를 범했습니다.”

상대는 거칠게 안을 때는 언제고 갑자기 정중하게 굴었다. 미오는 숨을 헐떡대면서 상황을 살폈다.

‘도대체 누구길래, 나를 아는 것처럼 굴지?’

지오프리에게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지금은 보는 눈이 많아서 그럴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대공 각하.”

“오랜만에 본다고 대공입니까? 그냥 오빠라고 불러 주시죠. 어릴 때처럼 말입니다.”

능글맞게 구는 남자가 미오의 호박색 눈을 빤히 들여다봤다. 혼란스러운 얼굴을 겨우 감추는데 우르체카 대공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자, 이리 와요. 미오.”

그렇게 바로 그의 옆자리에 앉으려는 찰나 지오프리가 처음 입을 열었다.

“……미오. 이리 오는 게 좋겠군요.”

커다란 손이 그의 옆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얼마나 다정한 표정인지 지오프리가 아닌 것만 같았다. 중간에 어정쩡하게 선 미오가 양쪽을 바라봤다. 응접실에 있는 두 남자는 눈부신 외모를 지녔지만, 아무래도 평범하지 않았다.

처음 봤는데 십년지기처럼 구는 우르체카 대공과 속을 전혀 알 수 없는 지오프리.

‘어느 쪽도 고를 수 없어.’

잠시 망설이는데 지오프리와 눈이 잠시 마주쳤다.

옅은 미소를 띤 그의 눈에서 서늘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어쨌든 낯선 이상한 남자보다는 아는 미친놈이 낫지 않을까.’

그녀가 엉거주춤 지오프리의 옆자리를 선택하자, 우르체카 대공이 퍽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는 내 뒤만 졸졸 따라다녔는데…….”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대공 때문에 미오는 당황스러운 얼굴을 감출 수 없었다. 그제야 찻잔을 내려 둔 지오프리가 그녀 옆으로 몸을 살짝 기울였다.

“너는 미오 우르체카야. 서류상 대공 각하의 사촌 동생이지.”

“……네?”

그의 귓속말에 얼마나 놀랐는지 소파에서 펄쩍 튀어 오를 뻔했다. 사냥 대회에 가려면 귀족만 가능하다는 건 알았지만, 그 종이가 이런 의미일 줄 몰랐다. 저런 황소 같은 사내와 사촌지간이라니.

‘어디 하나 닮은 데가 없잖아. 게다가 이런 이야기는 사전에 해 줘야 하지 않나?’

긴장으로 미오는 목이 타서 견딜 수 없었다. 앞에 있는 잔을 들어서 벌컥벌컥 들이켜는데 대공과 눈이 마주쳤다. 호기심 어린 눈매가 미오를 자세히 훑어봤다.

‘뭐야. 동물원의 짐승이라도 보는 것처럼.’

다 마신 후 잔을 내려 두는데 실수로 너무 큰 소리가 났다. 그 모습에 대공이 큰 소리로 웃었다.

“역시 우리 우르체카 여인들은 호탕하다니까. 여기 카스피언 제국 숙녀는 차를 한 시간씩 마신다죠?”

미오가 어정쩡하게 미소를 짓자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공작. 내가 동생을 맡겨 두고 인사가 너무 늦은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공국에 사소한 문제가 있어서 그것을 처리하느라 말입니다.”

우르체카 대공은 목소리가 워낙 커서 입을 열 때마다 성이 쩌렁쩌렁 울리는 것 같았다.

“미오는 여기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지오프리의 답을 듣더니 대공이 다시 묘한 미소를 지었다.

“미오. 카스피언 공작의 정원을 소개해 주지 않겠습니까? 오랜만에 이곳에 들러서 많은 것이 변했을 것 같은데.”

거절을 아예 허락하지 않을 작정인지, 일어서면서 아예 손부터 뻗었다. 미오가 잠시 망설이다 지오프리의 옆모습을 슬쩍 봤다. 하지만 여전히 무감한 표정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인데!’

대공을 계속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서 일단 그의 손을 잡았다.

‘산책 한번 한다고 해서 큰일이 나지는 않을 거니까…….’

라비니아와 함께했던 산책이 떠올라서 기분은 찜찜했지만 말이다. 그때 싱글벙글 웃던 대공이 큰 소리로 지오프리에게 허락을 구했다.

“공작. 잠시 다녀오겠네.”

“내게 허락을 구할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지오프리의 냉랭한 답을 뒤로한 채 미오는 다시 우르체카 대공에게 질질 끌려갔다. 애써서 단장한 리본이 축 처져 나풀댔다.

“여기에는 미로 정원 같은 것이 있을까요? 키에트 제국의 정원에는 미로가 유행이랍니다. 우르체카 공국도 마찬가지고요.”

“대공 각하. 이곳에 미로는 없답니다.”

불퉁하게 답한 미오가 그에게 붙잡힌 그녀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손도 솥뚜껑만 하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저 손으로 곰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날씨가 어쩜 이리 좋을까요?”

바람을 맞으면서 대공이 노래하듯 입을 뗐지만, 미오는 답하지 못했다. 낯을 가리는 성격 탓에 방금 처음 본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정말 껄끄러웠다.

“제법 귀여운 정원이군요.”

고개를 끄덕대던 미오가 이번에는 대공의 의견에 동의했다.

지오프리의 정원은 그리 화려하지 않지만, 아기자기한 맛이 있었다. 흰 꽃이 만발한 라글레시아스 나무를 지나쳐 한적한 곳에 이르자, 그가 손을 놓아주었다. 걸음이 빠른 그와 보조를 맞추느라 급히 걸었더니 숨이 찼다. 한참 숨을 고르는 미오를 보더니, 그가 울상을 지었다.

“이런, 제가 또 결례를 범했군요. 여인과 산책을 해 본 일이 없어서 말입니다.”

한 손을 가슴에 댄 채 정중하게 예를 갖추는 대공을 보면서 그녀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하네.’

저렇게 능글맞은 남자가 여인과 걸어 본 일이 없다는 것은 믿을 수 없었다. 간신히 호흡을 되찾은 미오가 고개를 들자, 한참 큰 그가 그녀를 내려다봤다.

“정말이지, 흥미로운 일입니다.”

“뭐가 말이죠.”

여전히 못 미더운 상대를 향해서 삐딱한 음성이 흘렀다.

“전부 다 말입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대공이 해바라기꽃이라도 된 것처럼 그녀를 향해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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