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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42)화 (42/123)

42화 사랑 고백에 볼은 붉어지고

여우는 상대가 공작인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몰랐다. 그날 이후로 여우는 숲에서 그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랐다. 우연히 지오프리를 찾은 여우는 이번에는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딱히 바라는 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멀리서 보기만 해도 좋아.’

책을 읽는 동안 느낀 여우의 사랑은 참으로 하찮았지만 그만큼 소중했다. 미오가 잠시 기억을 더듬는데 지오프리가 서늘하게 물었다.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좋아한다고 말하는 거지.”

좋아하는 감정을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에게 이런 말을 해 준 사람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황태자 시절 그를 원하는 여인이 줄을 이었고, 쫓겨난 뒤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정식으로 청혼서를 보내는 대신 그를 은밀하게 찾아들기 시작했다. 온갖 유혹을 펼치는 여인을 보면서 지오프리는 슬슬 지쳐 갔다.

‘저들이 원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그들 대부분 지오프리의 지위나 재산, 아름다운 외모만 찬양했다. 붉은 입술로 사랑을 속삭이는 이들은 지오프리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

지오프리가 씁쓸한 표정을 짓는데, 미오가 입술을 뗐다.

“그냥 당신이 좋을 수도 있잖아요. 잘 웃지 않지만, 가끔 보이는 미소가 아름답고. 무뚝뚝하고 매정한 것 같아도 다친 짐승 하나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는 다정한 당신을 마음에 담을 수 있죠.”

“…….”

미오의 예상 밖의 대답에 그의 등이 움찔거렸다.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냥 부풀려진 무용담을 마음대로 해석하거나, 잘생긴 외모나 그의 배경에 혹한 줄로만 알았다.

괜히 쑥스러워진 지오프리는 손을 들어서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방금 설명한 게 나라는 건가.’

미오가 해 준 말을 속으로 되새겨 보는데, 역시 생경했다.

‘사자(死者)의 피로 목욕을 하는 야차. 자비 없는 검을 휘두르는 자.’

그게 일반적인 그에 대한 평가였다.

“왜 헛소리를 하는 거지. 열이라도 오르는 건가.”

“당신은 정말…….”

입술을 꽉 깨문 미오가 잔뜩 인상을 썼다.

기껏 용기를 내서 진심을 전했건만 지오프리는 여전했다.

두 사람의 대립 아닌 대립으로 좁은 방의 공기가 무척 텁텁했다.

‘진심 따위 전해서 뭘 하겠다고…….’

더듬더듬 말했던 것이 온전히 여우의 마음인지, 그녀의 생각이 더해진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얼른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해.’

가뜩이나 불편한 사이기에 더 불편해질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나는 계속 당신을 좋아할 거예요!”

후다닥 할 말을 마친 미오가 등을 홱 돌린 후 눈을 감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셔츠 소매를 다시 걷었다. 좁은 공간에 가득 찬 기이한 열기에 얼굴이 홧홧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런 순간에도 그를 향한 고백을 멈추지 않는 미오가 못마땅했다.

‘장작을 너무 많이 넣었나 보군.’

볼을 쓸어내리던 그는 지금 느끼는 기이한 감정을 장작불 때문일 거라고 단정 지었다. 이불이 부스럭대는 소리에 지오프리의 어깨가 움찔했다.

‘진짜 거슬려.’

다친 몸으로 끙끙 앓는 것도 보기 싫었지만, 저런 맹랑한 말을 하는 것도 들어 주기 힘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기절한 그녀를 성에 버려두고 오는 게 나았을 것이다. 아니면 이곳으로 구하러 오지 않는 편이 나았을까.

‘계속 좋아한다고?’

웃기는 말이었다. 그녀가 백날 고백을 해 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는 지오프리 카스피언이었고, 그녀는 낯선 여인일 뿐이니까.

‘감히 누구도 내 일을 방해할 수 없다.’

곧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리자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벽에 세워 둔 검을 챙겨서 침대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아직 회복되지 않은 미오의 수척한 얼굴 위로 시꺼먼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 * *

며칠 뒤 카스피언 공작 성으로 돌아왔다. 몸은 회복되었지만,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쳐 버린 미오의 얼굴은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말에서 막 내린 그녀의 귀에 이상한 말이 들렸다.

“공작님, 온천 여행은 즐거우셨나요?”

“……?”

“그래도 마차를 보내 드리는 게 나을 뻔했습니다. 미오 아가씨는 연약한 분이니까요.”

다친 그녀를 숨긴다고 지오프리가 미오에게 망토를 뒤집어씌운 바람에 로렌의 말에 붉어진 얼굴을 겨우 감출 수 있었다. 지오프리는 미오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면서 짧게 물었다.

“별일은 없었지?”

“그럼요. 일이 있었으면 하인을 보냈을 겁니다. 수아르 지방은 꽃이 사방에 피어 있는 아름다운 곳이라던데 너무 좋으셨겠어요.”

“로렌, 좀 비켜 주면 좋겠는데…….”

말에서 내린 지오프리는 로렌의 환영 인사에 한 발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로렌이 앞치마를 들어서 눈가를 닦더니 울먹 댔다.

“아닙니다. 마차를 안 보내길 잘했네요. 사람은 자꾸 대화를 나누고, 살을 맞대야 정이 싹트는 법이랍니다. 돌아가신 마님이 이 모습을 봤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에구머니나, 저 혼자 주책이네요. 제가 얼른 가서 침실을 정돈하겠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후다닥 쏟아 낸 로렌이 먼저 건물로 들어서는데 미오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살을 맞대긴 무슨 살을 맞대.’

지오프리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서는데, 주변에서 그녀와 그를 바라보는 뜨거운 시선이 느껴질 정도였다. 숨이 답답했지만, 차마 망토 밖으로 얼굴을 내밀 수 없었다.

“주인님. 오셨습니까.”

“오셨습니다. 공작님.”

고용인의 인사를 대충 받은 공작이 그녀를 데리고 복도를 가로질렀다.

“저기, 이제 걸어갈게요.”

거북이 등껍질 속에 숨은 것 같은 미오가 웅얼대자 지오프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또 왜 저러는 거야.’

말을 타고 오는데도 거의 대화를 하지 않은 두 사람이었다. 조금 가까워졌다 싶으면 훨씬 더 멀어져 버리는 게 지오프리일 것이다. 그의 두꺼운 망토를 걸치기는 했지만, 오는 길에 그녀의 등이 지오프리의 가슴에 자꾸 닿는 바람에 잔뜩 긴장했다.

‘이제 제발 날 내버려 둬.’

이윽고 그녀의 침실에 도착한 지오프리는 미오를 침대에 가만 데려다주었다. 그녀는 일부러 잠든 척 코 고는 소리를 냈고, 지오프리는 인사 없이 그대로 방을 나갔다.

“……후하!”

문이 닫히자 미오가 망토를 벗어 던졌다. 숨도 편하게 못 쉬어서 근육이 잔뜩 긴장했다. 그녀는 그대로 뒤로 몸을 쫙 뻗은 채 누웠다.

‘역시 침대가 최고야!’

이렇게 포근하고 좋은 침대는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몸이 아래로 가라앉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던 미오가 벌떡 상체를 세웠다.

‘문제는 그게 아니야.’

며칠 가만 누워서 지오프리가 해 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밤에는 난롯가에 앉은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잠들었었다. 지오프리는 그녀가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과는 매우 달랐다.

‘원래보다 표정이 더 부드러웠어.’

정말 좁은 집이었지만, 그는 이 넓고 웅장한 성에서 지낼 때보다 더 편안해 보였다.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한때는 황태자였다는 존귀한 신분이 아니던가. 작은 짐승이나 생선 손질하는 것도 아주 능숙했고, 요리도 곧잘 했다.

‘병간호도 잘해 주었어.’

이마가 가끔 일그러지기는 했지만, 지오프리는 다친 미오를 성심껏 돌봐 주었다. 그녀가 왜 이렇게 병간호를 잘해 주냐고 물었던 밤이 떠올랐다.

‘전장에서는 다친 사람이 흔하니까…….’

더는 설명해 주지 않았지만, 아마 병사나 자기 부상도 치료한 경험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붕대를 능숙하게 잘 감을 수 없을 테니까.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처음 그녀가 품었던 적개심이 조금씩 옅어졌다.

‘어쨌든 지금 그가 나를 죽일 마음을 품은 것 같지는 않으니까.’

긴 한숨을 내쉰 그녀는 지오프리가 묶어 준 붕대를 살펴봤다. 손가락으로 매듭을 괜히 힘주어서 흔들었다. 거의 그에게 안기다시피 한 채 말을 타고 와서 침실에 그의 체향이 가득했다.

“당장 씻어야겠어!”

미오가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가 거울 앞에 섰다.

“이게 무슨 꼴이람?”

거울 속에는 태어나서 줄곧 숲에서 살았을 것 같은 여인이 서 있었다. 산발 머리에 수척한 얼굴, 드러난 팔다리에 난 상처와 지저분한 몰골이 눈 뜨고 봐 줄 수 없을 정도였다.

“지금 이 꼴을 하고 지오프리랑―.”

그에게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은 마음은 더 없었다. 미오는 당장 침대 위의 끈을 당겨서 목욕 준비를 부탁했다.

* * *

카스피언 공작 성으로 돌아온 지 사흘째.

미오는 침대에 누워서 밤낮 할 것 없이 라비니아에게 복수하는 방법만 연구했다. 독을 먹이고 한 짓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발로 이불을 걷어찰 정도였다. 지오프리에게 당하는 것도 아니라 듣도 보도 못한 상대에게 이게 무슨 망신인지 모르겠다.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어.’

이제야 체력을 회복했다고 여길 때쯤 그녀는 성이 지나치게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오프리는 일주일쯤 일 때문에 점심을 함께하지 못할 거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살아 돌아온 것을 알면 라비니아가 이렇게 잠잠할 리가 없는데?’

미오가 호박색 눈에 연신 힘을 주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아가씨. 로렌입니다.”

점심 식사를 마치면 로렌이 늘 와서 이상한 약을 먹였다.

“온천에서 넘어지신 상처는 거의 다 나아 가네요. 그렇죠?”

“……네.”

갈대밭을 헤매다 다친 상처는 어느새 온천에서 넘어진 것으로 둔갑해 있었다.

“이거 진짜 구하기 힘든 건데 특별히 드리는 거예요.”

“특별한 거라면 저한테 안 주셔도 되는데요.”

수프 그릇에 담긴 출렁거리는 액체를 본 순간 미오가 덜덜 떨었다. 시커먼 물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는데, 냄새를 맡아 본 것 중에 가장 끔찍했다. 미오가 인상을 쓰자 로렌이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약을 보고 그러면 못써요. 이게 아픈 사람이 먹으면 몸을 보해 주는 기능을 한다고 했어요. 몸 안의 나쁜 기운은 밖으로 빼내 주고, 몸을 따뜻하게 해 준다네요. 저번에 드렸던 거랑 비슷한 약인데, 이번에는 이렇게 차처럼 만들어 봤습니다. 드시기 더 수월하실 겁니다.”

장황한 설명에 미오는 대꾸할 말을 잊었다.

“알맞게 식었으니까 얼른 드세요.”

“두시고 가면 제가 조금 있다가―.”

“빈 그릇을 바로 가지고 나가려고요.”

로렌은 퍽 인자했지만, 일에서만큼은 철저했다.

‘역시 하녀장답다고 할까나.’

사람 좋은 로렌의 얼굴 뒤로 커다랗고 검은 날개가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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