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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41)화 (41/123)

41화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은 하루 (3)

전장에서 상처를 입은 병사를 치료하는 일은 숱하게 해 봤다. 보통은 의원이 함께하지만, 카스피언 황제는 지오프리에게 그런 호의를 베풀지 않았다. 살아남는 사람은 디아나의 축복을 받은 것이고, 죽은 자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너와 살아 돌아온 병사는 황제의 이름으로 축복해 주겠다.’

의원도 없이 전쟁을 치른 지오프리는 자연히 검술뿐 아니라 의술도 배우게 되었다. 그는 주전자 입구를 입에 댄 후 물을 잔뜩 머금었다. 그리고 곧장 침대에 걸터앉아서 한 손으로 벽을 짚은 후 고개를 숙였다. 거기에는 달뜬 숨을 뱉는 미오가 입술을 오물대고 있었다.

‘그녀는 환자에 불과해.’

아무 표정 없이 지오프리가 미오의 입술에 입술을 가져갔다. 마주한 입술 사이로 물이 흘러 들어가자 그녀의 볼이 볼록해졌다. 몇 번 반복하자, 미오의 몸부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흡, 흡, 좋아.’

그녀의 입에서 만족스러운 혼잣말이 흘렀다. 이제 그만해도 되겠다 싶어서 몸을 떼려고 했다. 그러다 한순간 그의 몸이 굳어 버렸다.

‘……!’

미오의 말캉한 입술이 그의 입술에 살포시 닿았다. 처음 느껴 보는 감각에 벼락을 맞은 것처럼 머리가 아찔했다. 지오프리의 서늘한 체온이 마음에 드는지 미오는 자꾸만 그의 품으로 파고들려고 했다.

‘이러지 마라.’

지오프리가 작게 속삭이는데, 미오의 부드러운 입술이 그의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놀란 그가 얼른 얼굴을 떼려는데, 미오의 손이 지오프리의 목을 잡아챘다. 미오의 숨결이 바로 귓가에서 흩어졌다. 힘을 주면 바로 뿌리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은 것은 그녀가 환자이기 때문이었다.

‘놔라.’

낮게 속삭이자 미오는 일전의 밤처럼 다시 그의 품을 파고들려고 했다. 본능만 남은 미오는 무척 위험한 존재였다. 식은땀을 잔뜩 흘리던 지오프리가 그녀의 손아귀에서 간신히 벗어나는데, 미오의 입술이 그의 볼을 스쳤다.

‘……흡.’

순식간에 붉어진 뺨을 싸잡은 그가 곧장 밖으로 달려 나왔다.

간밤의 일을 떠올린 지오프리의 얼굴이 퍽 불편해 보였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애써 잡념을 떨친 그가 하던 검 손질을 마저 했다. 이미 반짝거려서 더 닦을 데도 없었지만, 지오프리의 손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 * *

작은 집 지붕 위로 숲의 밤이 일찍이 찾아왔다.

“저기 언제 돌아갈 수 있어요?”

지오프리가 만들어 준 저녁을 먹은 후 그가 치우는 것을 지켜보던 미오가 물었다. 그와 함께한 것은 고작 하루였지만, 10년보다 길게 느껴졌다.

‘게다가 오늘 또 여기에서 함께 자야 한다니.’

한 침대에서 잔 적도 있는데,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지 모르겠다. 물론 돌아간다는 개념도 말이 안 되기는 했다.

그곳은 그녀의 집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어디든 여기보다는 낫겠지.’

그녀의 물음에 난로의 재를 정리하던 지오프리가 몸을 세웠다. 그는 문을 열어서 재를 버린 후 나무통속 물로 손을 깨끗하게 씻었다.

하지만 그는 미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잠시도 쉬지 않는 지오프리 덕에 작은 집은 먼지 하나 없이 말끔했다. 돌아온 그는 천으로 난로 위 선반을 닦기 시작했다.

‘결벽증까지 있는 거야? 그리고 도대체 왜 대답을 안 해 줘.’

미오는 그의 답을 기다리다가 목이 늘어날 지경이었다. 한참 뒤 손수건에 손을 닦던 지오프리가 몸을 돌렸다. 고개를 삐딱하게 한 그가 미오를 이리저리 훑었다. 비 맞은 아기 새처럼 볼품없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글쎄.”

“저기, 어제보다 훨씬 좋아진 것 같아요.”

그건 사실이었다.

갈증과 굶주림이 해결되었고, 종일 누워 있었더니 몸이 한결 가벼웠다. 상처가 나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불편한 밤을 보내는 것보다 조금 아픈 게 나을 것 같았다.

‘우리가 여기에서 단둘이 오붓하게 있을 사이는 아니지 않아?’

삐딱한 시선으로 지오프리를 노려보는데, 그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럼 내려와서 걸어 봐.”

걷어붙인 셔츠 소매를 내리던 그가 등을 돌렸다. 무표정한 듯했지만, 그녀를 비웃는 느낌이 역력했다.

‘어디 끝까지 그렇게 거만할 수 있는지 보자.’

큰소리친 것이 무색하게 지오프리는 낡고 허름한 집에서도 우아하기만 했다. 반면에 죽을 고생을 한 그녀는 꾀죄죄했다. 그녀와 너무 다른 지오프리 때문에 괜히 인상이 구겨졌다.

‘인간미가 없어. 인간미가.’

괜한 오기가 생긴 미오가 입술 안쪽 여린 살을 세게 씹었다.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줄 거야.’

발끝을 움직여 보려고 하자 온몸에 통증이 엄습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불길에 타들어 가던 고통이나 기다란 창에 몸이 꿰뚫렸던 것에 비하면 말이다. 침대 아래로 발을 내리려는데 절로 신음이 터졌다.

“흐으윽.”

하지만 의지 하나로 모든 일이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쿵.

바닥으로 굴러떨어진 미오가 그대로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무모한 행동을 한 그녀를 비웃을 지오프리의 얼굴을 보는 것이 싫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다시 침대로 올라가서 이불로 얼굴을 가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

저벅저벅 그가 다가오는 발소리에 미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지오프리는 아무런 말 없이 그녀 앞에 가만 섰다.

‘이게 무슨 망신이야.’

이제 쏟아질 신랄한 비난을 기다리던 그녀가 바닥만 응시했다. 그때 무릎을 꿇은 지오프리가 상체를 숙여 미오와 눈을 맞추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 이곳에는 너와 나 둘밖에 없으니까.”

“……?”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놀란 미오가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자 지오프리가 팔을 뻗어서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아까부터 훔쳐봤던 단단한 팔이 그녀의 몸에 닿자 미오의 몸이 단숨에 뜨거워졌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서 그의 팔을 살짝 밀어 봤지만, 지오프리는 미동조차 없었다.

“내 말은 이런 식으로 내 관심을 끌 필요가 없다는 거야.”

“……아.”

맙소사, 얼굴이 시뻘게진 미오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니까 지금 그는 미오가 관심을 끌려고 일부러 침대에서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열렬한 팬이에요!’

그녀가 내뱉었던 말은 부메랑처럼 내내 미오에게 되돌아왔다.

‘지오프리가 저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그가 침대에 다시 눕혀 주자 미오는 끙끙대면서 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말을 탈 정도가 되면 돌아갈 거다. 그러니 얌전하게 누워 있어.”

“……음.”

어쩐지 이전과 다른 지오프리의 태도에 그녀는 애매한 답을 했다.

‘갑자기 왜 저렇게 다정한 척 구는 거지.’

“그렇게 가고 싶어 하던 사냥 대회도 곧 있으니까.”

지오프리의 말에 그녀가 눈을 번쩍 떴다.

‘맞아. 내가 그걸 잊고 있었어.’

발칙한 라비니아의 사건에 연이어서 이런 일을 당하는 바람에 사냥 대회라는 중요한 일을 잊고 있었다. 그곳에 가면 지오프리가 아니라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닌 남자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작은 여우.’

그녀를 이렇게 불러 주는 인연이 숨어 있을 것이다. 그런 기대가 없었다면 이제까지의 일을 버티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타닥타닥.

어느새 난롯가로 돌아간 지오프리가 패 온 장작을 하나둘 집어넣었다. 나무가 타들어 가는 소리에 미오는 마음이 느긋해졌다. 좁은 집에 미지근한 열기가 감돌았고, 슬슬 피로가 몰려들 때였다.

“날 좋아하지 않는 편이 나을 거다.”

적막이 가득한 밤을 뚫고 그가 입을 뗐다.

의외의 말에 미오가 슬며시 몸을 돌렸다.

난로 앞에 앉은 지오프리의 등이 어쩐지 고독해 보였다. 길게 뻗은 다리 위에 올린 커다란 손에는 상처가 길게 나 있었다. 조금 망설이던 미오가 목을 다듬은 후 입을 열었다.

“왜죠. 그 마음을 받아 주지 않을 거라서요?”

지오프리는 사랑을 모르는 인간이라고 했다. 피가 얼음처럼 차가워서 누구도 그 마음에 품을 수 없다고. 그의 머릿속에는 황제가 되어서 제국을 좌지우지하는 것밖에 없다고 했으니까.

“……글쎄.”

장작을 하나 집어 던지는 그의 얼굴에 설핏 쓸쓸함이 묻어났다.

“그럼 어째서요.”

더 묻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오는 그와 이런 대화를 나눠 본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알고 싶었다. 무엇 때문에 지오프리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지.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

지오프리의 대답은 그녀의 예상을 한참 빗나갔다.

그의 말을 곱씹던 미오가 멍한 표정을 했다. 좋은 사람이 아니니까 그를 마음에 담지 말라는 말은 어쩐지 다정하게 느껴졌다. 다정한 것은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카스피언 공작이라는 것도 허울뿐이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난로의 불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마음속에 있는 말이 절로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저렇게 몸을 다쳐 가면서까지 그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미오가 거슬렸다.

‘안쓰럽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역시나 저런 일은 그만두는 게 낫다.

가망 없는 일에 힘을 쓰는 건 사람의 피를 말린다. 지오프리는 그게 어떤 건지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던 행복한 날을 소망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는 살아 있고, 남은 날을 버텨 내야 했다.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말이에요.”

미오가 머뭇대더니 말을 이었다. 한 번쯤은 여우의 마음을 그에게 전하고 싶었다.

지오프리는 누군지도 모를 가여운 여우의 진심 말이다.

“공작님이 공작님이라서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책 속 여우는 우연한 기회에 숲에서 지오프리를 만났단다.

마침 다리에 상처를 입어서 저항할 수도 없었던 여우는 달아나는 것을 포기했다.

‘이제 곧 죽겠구나.’

카스피언 제국에는 여우가 귀한 사냥감이었고, 사냥꾼은 여우를 살려 두는 일이 없었다. 더구나 그녀는 여우 수인이었으니 그것을 들키는 날에는 죽음보다 더 끔찍한 일을 겪을 게 뻔했다.

지오프리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낮게 중얼거렸다.

‘은빛 여우라니…….’

몸집이 커다란 여우의 털은 빛을 받아서 은빛 물결을 일으켰다. 그녀와 지오프리의 눈이 마주쳤고, 활시위를 당기고 있던 그는 이내 손을 떨구었다.

‘이 숲은 위험하니, 떠나라.’

지오프리는 그녀를 살려 주었고, 그런 호의는 외로운 여우의 마음에 온기를 심어 주었다. 슬픈 사랑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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