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은 하루 (2)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몇 시간 뒤였다.
킁킁.
‘이게 무슨 냄새지.’
작은 집에 고소한 냄새가 가득 차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나 굶었는지 이제 기억도 나지 않았다. 허기가 져서 눈에 보이는 건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서 나는 냄새지.’
눈을 뜬 그녀가 낑낑대면서 옆으로 돌아누웠다. 난로 앞에 앉은 지오프리가 나뭇가지에 꿴 고기를 굽고 있었다. 그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주머니에서 꺼낸 소금을 고기에 팍팍 쳤다. 공중에서 뿌려 대는 소금이 꼭 눈처럼 새하얬다.
소금을 치자 바싹 익은 고기의 겉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얼마나 잘 익었는지 바닥으로 기름이 뚝뚝 떨어졌다. 그 경쾌한 소리에 절로 침이 넘어갔다.
꿀꺽.
아뿔싸. 그녀도 모르게 소리를 너무 크게 냈나 보다. 그제야 고기 굽는 데 여념이 없던 지오프리가 고개를 돌렸다. 그와 눈이 마주친 미오는 왠지 부끄러웠다. 몰래 고기 굽는 것을 훔쳐보다가 들킨 데다, 입가로 침이 주르륵 흐르고 있었으니까.
힘겹게 손을 들어서 침을 닦는데, 그가 혀를 찼다.
“짐승도 아니고…….”
“…….”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말 한마디에 미오는 숨이 멎을 뻔했다.
‘내가 여우로 변했어?’
얼른 손으로 얼굴을 더듬어 보니, 다행히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럼 지금 인간인 그녀에게 짐승이라고 한 건가.
‘숙녀에게 짐승이라니! 내가 지금 좀 다치고 지저분하기는 하지만.’
괜히 뜨끔해서 미오가 구석에서 몰래 화를 냈다.
그래도 아픈 그녀를 위해서 사냥을 해 온 지오프리를 마냥 욕할 수 없었다.
‘저런 것도 할 줄 아는구나.’
미오는 사실 그에 대해서 아는 게 많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주인님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아이였는지 모른다니까요.’
항상 지오프리 칭찬을 입에 달고 사는 로렌의 말이 언뜻 귓가를 스쳤다. 그녀가 아는 지오프리는 지독한 전쟁광에 냉소적이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데다, 타인의 감정을 우습게 안다고 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책에 나와 있던 내용이고, 그녀가 직접 겪어 본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괜찮은 구석이 있는지도 몰라.’
이제 잘 익은 고기를 한 입 먹을 생각에 지오프리에 대한 호감이 높아졌다.
요리가 거의 끝난 건지 지오프리의 손길이 분주했다.
‘다 만들었나 봐!’
기뻐서 뒷다리로 이불을 팡팡 차고 싶은 기분을 간신히 억누른 미오가 눈을 반짝였다. 화덕에 걸쳐 둔 고기 꼬치를 빼 든 지오프리가 후후 입김을 불었다. 입김을 불자 그녀 쪽으로 고소한 고기 냄새가 더욱더 강하게 풍겼다.
“……아.”
누운 채 미오가 입을 쩍 벌리는데 그가 고기를 덥석 베어 물었다.
‘치사하게 너 혼자 먹어?’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절망을 느낀 그녀가 지오프리를 강하게 노려봤다. 그녀의 뜨거운 시선을 느꼈는지 지오프리가 옆을 돌아봤다.
“아직 이런 것은 무리야.”
“어째서…….”
왜 내가 그 기름진 고기를 먹지 못할 거라고 마음대로 생각하는 거지?
기운이 없어서 하고 싶은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미오가 잔뜩 인상을 쓰자 지오프리가 옆에 둔 나뭇잎 하나를 들어 보였다.
“네 것은 이거다.”
“……?”
널따란 나뭇잎 위에는 자디잘게 찢은 가슴살이 모락모락 김을 내고 있었다. 안 주는 것보다 낫긴 했지만, 어째 약간 이유식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그 다리를 뜯고 싶은데…….’
간절한 소망을 담아서 그녀가 지오프리의 눈을 그윽하게 바라봤다. 그는 잠시 어깨를 움찔하더니 다시 다리를 뜯어 먹었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오두막 전체에 울리는 것 같았다.
‘역시 지오프리는 나의 적이다.’
잠시 호감이 갔던 것을 전부 취소했다.
‘귀라도 틀어막고 싶다.’
하지만 몸이 불편해서 그러기도 어려워, 그저 눈을 꼭 감은 채 이 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얼른 입을 벌려.”
미오는 당황스러운 상황에 눈만 끔뻑댔다. 몸이 좋지 않은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인지는 몰랐다. 그녀는 받쳐 둔 베개에 기대앉아서 지오프리가 내미는 고깃덩이를 물끄러미 노려봤다.
“……어서.”
“제가 할 수 있어요.”
“그럼 해 봐.”
미오가 손을 들어서 고기를 집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손목에 벽돌이라도 달린 건지 꿈쩍을 하지 않았다. 손가락은 부들부들 떨리기만 하고 제대로 펴지지도 않았다.
“그러면 여기에 둘 테니 고개를 숙여서 핥아먹겠어?”
그의 호의를 거절한 것이 짜증스러운지 지오프리가 고기가 담긴 이파리를 아무 데나 던지려고 했다.
‘나쁜 녀석! 음식 귀한 줄을 몰라.’
미오는 공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부탁드릴게요.”
“처음부터 그냥 먹었으면 좋았잖아?”
“죄송합니다.”
결국, 고기를 얻어먹기 위해서 비굴한 사과까지 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낙엽을 한 손에 든 그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침대가 한쪽으로 기울었고, 미오의 몸도 낙엽처럼 팔랑댔다. 너무 가까운 터라 그녀가 잔뜩 볼을 붉히자 그가 코웃음 쳤다.
“이런 거로 수줍어하는 건 좀 웃기지 않나? 그때 자는 내 몸 위에…….”
그가 처음 만났을 때 미오가 지오프리의 배 위에 앉아 있던 것을 언급하려 했다. 수치스러운 일을 입에 담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그래서 아기 새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소리까지 냈다.
“……아.”
지오프리가 손으로 집어 주는 고기는 빌어먹게도 맛있었다. 소금만 뿌렸는데도, 카스피언 공작 성의 주방장이 만드는 요리 못지않게 깊은 맛이 났다.
“씹어서 삼키도록 해.”
처음 먹기 꺼렸던 것이 무색할 만큼 미오는 적극적이었다. 지오프리는 이러다 그의 손가락마저 씹을 것 같은 그녀를 보면서 이마를 잔뜩 찌푸렸다. 고기는 금방 바닥이 났다.
“지금 많이 먹으면 탈이 날 거야.”
지오프리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기름이 묻은 손가락을 우아하게 닦았다. 미오는 그의 손가락과 텅 빈 이파리를 번갈아 보면서 아쉬운 얼굴을 했다.
“자, 다시 눕지.”
“하지만 여태껏 잤는데요.”
그녀의 항의를 무시하고 지오프리는 베개를 정돈한 후 다시 미오를 눕혔다. 그러더니 이불을 턱까지 덮어 준 후 그가 짧게 덧붙였다.
“나는 나가 있을 테니 푹 쉬도록.”
지오프리는 그대로 먹은 것을 정리해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래도 잠은 안 오는데…….”
하지만 그녀의 몸의 사정은 달랐다. 한뎃잠을 잔 데다 들개 떼에게 쫓겼더니 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 텅 빈 배가 차자, 물먹은 솜처럼 가라앉는 듯한 노곤함이 곧 졸음을 불러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좁은 오두막 내부가 미오의 숨소리로 채워졌다.
* * *
한편 밖으로 나온 지오프리는 물로 손을 깨끗하게 씻은 후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서 장화에 묻은 흙을 닦아 내고 있었다. 이곳은 심각한 결벽증이 있는 그에게 적합하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이 초라한 집은 그에게 허락된 유일한 쉼터였다.
‘황제의 개, 미친놈…….’
불쾌한 별명이나 카스피언이라는 가문의 성도 모두 잊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러다 이 숲에 누군가를 데려온 것이 처음이란 것을 떠올렸다.
“괜한 일을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
첫 만남부터 수상쩍기 그지없던 여인이었다.
‘공작님의 팬입니다!’
돼먹지도 않은 말로 거슬리게 하더니 점점 더 신경 쓰였다. 내치면 그만인데 왜 그러지 못하는지 이유를 찾지 못했다. 사무엘이 병원을 알아본다고 했을 때도, 시골에 보내려니 내키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그가 내내 미오 생각만 하는 것을 깨달았다.
“환자를 내버려 둘 수야 없지.”
어쭙잖은 변명을 한 뒤 온 힘을 기울여 장화를 닦아 냈다. 곧 장화는 반들반들하게 광이 났고, 이어 검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는 이것만큼 좋은 것이 없었으니까.
“……하.”
검 닦는 것에 열중하던 지오프리의 머릿속으로 어젯밤의 일이 스쳐 갔다. 그는 긴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벼이 쓸어내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상태가 너무 좋지 않은 미오를 데리고 카스피언 공작 성으로 가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가까운 이곳으로 그녀를 데리고 왔다. 쉼터의 문을 열고, 하나뿐인 침대에 그녀를 눕혔다. 이 숲은 특히 한기가 지독해서 불을 피우지 않으면, 그대로 동사할 가능성이 컸다.
‘으으, 목말라.’
난로에 작은 불씨가 어른거릴 때쯤 침대에 누운 미오가 몸부림쳤다. 목이 마른지 거친 음성을 내면서 손을 버둥댔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상처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얼른 샘에 가서 얼음을 깨고 물을 가져온 지오프리는 난처한 상황에 부딪혔다. 아무리 깨워도 미오가 눈을 뜨지 않았다.
‘열이 심하군.’
탈수 증세에 심한 상처까지 더해져서 상태가 몹시 나빴다. 결국, 지오프리는 주전자 속 물을 그의 손바닥에 담아서 그녀의 입술을 축여 주었다. 물이 닿자 미오의 메마른 입술이 게걸스레 그의 손바닥을 빨아 댔다. 춥춥대는 그녀의 입술이 주는 감각에 소스라치게 놀란 그가 그대로 뒤로 물러섰다.
‘물, 물…….’
조금 맛본 물에 대한 갈망으로 미오가 몸을 들썩대는 것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건네주는 물에는 한계가 있었고, 그렇다고 주전자 입구를 그녀의 입에 대 줄 수는 없었다. 지독한 열로 그녀 주변에 희미한 김까지 서리는 것 같았다.
“할 수 없군.”
지오프리는 피딱지가 앉은 미오의 입술을 바라보면서 손으로 그의 입술을 가벼이 매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