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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39)화 (39/123)

39화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은 하루 (1)

미오는 그의 시꺼먼 눈을 올려다본 채 천천히 그의 손을 잡을 수 있었다. 여전히 한 손으로 나뭇가지를 짚은 채였다.

그때였다.

언덕을 막 올라온 들개 떼가 두 사람을 향해서 맹렬히 덤벼들었다. 놀란 미오의 어깨가 움찔대자 그가 소리 내서 웃기 시작했다.

“개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무서워하는 거였나?”

‘완전히 미쳤구나.’

미오는 곧 개한테 공격당할지도 모르는데 태평스레 웃는 그를 보면서 진심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정말 이상한 일이야. 안 그래?”

허리춤에 찬 검집에서 기다란 검을 뽑아 든 지오프리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이런 상황에서 웃는 네가 백만 배는 더 이상하거든.’

미오는 그가 검을 휘두를 수 있게 몸을 떼려 했다. 달빛을 받아서 번쩍이는 칼날에 혹 그녀가 다칠까 두려웠다. 하지만 지오프리는 꿈틀대는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붙들었다.

“가만있어.”

지오프리는 그녀를 안은 채 곧 검을 휘둘렀다.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들개의 위협적인 울부짖음이 하나로 뒤섞였다. 두려움에 미오는 그대로 눈을 꼭 감았다.

‘자신이 있어서 이러는 거겠지?’

미오는 처음으로 지오프리를 둘러싼 소문이 사실이기를 바랐다. 시체 더미 위에 걸터앉은 지오프리가 광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는 무서운 소문. 그가 밥을 먹듯 쉽게 적을 물리쳤다는 그런 것들 말이다.

‘……제발.’

그는 별로 움직이지도 않고 검만 몇 번 휘둘렀는데, 들개가 깨갱 소리를 요란하게 냈다.

그리고 잠시 후 사방이 고요해졌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던 미오가 슬쩍 실눈을 떠서 주변을 살폈다.

‘뭐야. 끝난 거야.’

죽일 듯이 덤벼들던 들개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제야 완전히 눈을 뜬 미오가 뒤를 확인했다. 그것들이 달아난 건지, 지오프리가 들개를 전부 죽인 건지 어두워서 구분이 잘 안 되었다.

“이제 안전한가요?”

“……글쎄.”

그녀에게 답하는 지오프리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안전한 거면 안전한 거지, 글쎄는 어떤 의미일까.’

그의 볼에 튄 핏방울이 아니었다면, 들개 떼의 습격이 믿기지 않을 만큼 사방이 조용했다. 순간 미오는 진짜로 무서운 것은 들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 얼빠진 표정은 뭐지?”

지오프리는 그를 붙들고 선 미오를 찬찬히 살펴봤다. 상대는 이보다 더 엉망일 수 없을 만큼 꼴이 처참했다.

“약혼자를 만나러 간 게 아니었나?”

“네? 무슨 약혼자요?”

지오프리의 물음에 그녀는 분통이 터지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미오의 불룩해진 볼을 지켜보던 그가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베일 영애가 알려 주던데…….”

나는 약혼은커녕 연애도 한번 못 해 보고, 짝사랑만 하다가 죽었거든?

어처구니가 없어서 허탈한 웃음이 났다.

‘그리고 그 베일 영애가 날 죽이려 들었거든?’

그뿐인가. 자루에 꽁꽁 묶어서 이곳에 내다 버리기까지 했다. 당장 사실을 밝히고 싶었지만,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오프리가 내 말을 믿어 줄까?’

그리고 이 말을 믿어 준다고 해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눈으로 혼란스러운 감정을 드러내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베일 영애가 잘못 알았나 보군. 그렇지?”

“아마도요.”

“그러면 왜 이런 곳을 헤매고 있었지? 설마 달아나려던 건가?”

“……?”

이 질문은 아까 약혼자 이야기보다 더 이상했다.

‘누가 어디에서 달아난다는 거야?’

의문이 잔뜩 담긴 미오의 얼굴을 확인한 그가 싱긋 웃었다. 오늘따라 지오프리는 평소보다 너무 자주 웃었다.

‘왜 저래.’

폭주하는 심장을 부여잡는데, 그가 느릿하게 입을 뗐다.

“카스피언가는 절대 손님을 내치는 법이 없거든.”

“그게 무슨…….”

“어쨌거나 지금 너는 나의 소중한 손님이니까. 내 책임하에 있는 셈이지.”

“……네?”

지오프리의 설명은 그녀의 의혹을 더욱더 부풀렸다.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이야. 손님에게 달아난다는 표현을 쓰던가?’

그건 죄를 지은 사기꾼이나 범죄자, 혹은 그의 마음을 훔치고 달아나려는 작고 귀여운 파랑새에게나 쓸 법한 말이었다. 그와 이렇게 의미 없는 말싸움을 하다 보니 미오의 귀로 바람 소리가 윙윙대기 시작했다. 정신이 아득해져서 몸이 땅으로 꺼질 것 같았다.

‘속이 안 좋아.’

지오프리의 서늘한 체온에 의지한 그녀가 비틀댔다. 거의 이틀을 굶었고,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해서 한계에 달한 것이다.

‘조금 더 버텨야 하는데…….’

그의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미오는 남은 힘을 쥐어짜서 서 보려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도움을 요청했으니, 할 수 없군.”

지오프리는 그대로 미오를 안아 들었다. 기절하기 전 그녀가 놀라서 벗어나 보려 했지만, 단단한 손아귀가 미오를 붙들었다.

“다치기 전에 꽉 잡아. 그리고 조금 자 두는 게 좋겠군.”

‘자고 싶지 않아.’

더욱이 그의 품에 안겨서라면 말이다. 하지만 그의 말은 꼭 주문처럼 느껴졌고, 그대로 미오의 눈이 감겼다. 작은 몸이 축 늘어지자, 그녀를 내려다보던 지오프리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대로 그녀를 안은 지오프리가 천천히 움직이자 그들 주변으로 안개가 더욱더 짙어졌다.

* * *

밤새 악몽에 시달린 미오는 눈꺼풀이 무거웠다.

꿈의 내용은 두 번 생각하기도 싫을 만큼 끔찍했다. 들개 떼가 그녀를 마구 공격하는데, 저 멀리에서 지오프리와 라비니아가 구경만 했다. 두 사람은 그녀의 불행에 활짝 미소를 띠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녀는 그를 향해서 손을 내밀었다.

‘도와줘. 지오프리.’

간절한 바람을 담은 그녀의 말에도 지오프리는 미오를 봐 주지 않았다. 억울한 마음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서, 그녀의 메마른 입술이 비틀렸다.

‘너를 몇 번이고 사랑했잖아. 너를 위해서 얼마나 많이 죽었는데, 지금 한 번을 못 도와줘?’

사랑해 달라는 것도 아니었다.

서러움에 쏟아지는 눈물을 간신히 삼킨 미오가 천천히 죽어 가고 있었다. 눈이 하얗게 내린 벌판에 피투성이가 된 몸이 그대로 버려졌다.

‘아, 소름 끼쳐.’

꿈의 내용을 되새기자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얼른 눈을 떠야지 이 끔찍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있어!’

하지만 그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결국, 눈뜨는 것을 포기한 미오가 냄새부터 맡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면 현실에 천천히 스며들 수 있었다.

‘이끼랑 오래된 나무 냄새랑 풀냄새가 나.’

그리고 더욱더 깊게 숨을 들이쉬자 어디선가 불을 피웠는지 은은하게 장작불 냄새도 났다.

‘그리고 이건…….’

청량한 체향이 코끝을 살며시 간지럽혔다. 놀란 그녀가 벌떡 일어나려 하자 검집의 끝이 미오의 턱을 밀었다. 아까는 그렇게도 무겁던 눈꺼풀이 번쩍 떠졌다.

“좀 더 누워 있어.”

정말 지오프리였다.

‘왜 내가 지오프리와 함께 있는 거지?’

꿈과 현실이 한데로 범벅이 되어서 지금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검집이 닿은 턱을 가만 쓸던 미오가 천장과 벽, 주변을 살폈다.

‘아주 작은 오두막이야.’

지오프리가 작은 난로 앞에 주저앉아서 땔감을 뒤적거렸다. 그가 만들어 내는 사소한 소음에 귀를 기울이던 미오가 눈을 크게 끔뻑댔다.

‘꿈이 아니야.’

“이곳은 사냥꾼 쉼터야. 간밤에 네 상태가 안 좋아서 이동할 수 없었다.”

“……아.”

그녀가 손을 들어 보자 손가락과 손목에 붕대가 감긴 것이 보였다. 이곳에는 의원도, 로렌도 없는데 이걸 누가 한 걸까.

‘설마 지오프리는 아니겠지.’

미오가 손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부지깽이로 난롯불을 헤집던 그가 중얼댔다.

“사냥하다 보면 부상은 흔하니까, 간단한 도구가 이곳에 마련되어 있다.”

그녀가 궁금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지오프리는 다른 말을 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움직임이 묘하게 자연스러웠다. 이 쉼터에 처음 온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카스피언 제국의 고귀한 핏줄은 이런 초라한 곳과 어울리지 않아.’

이질적인 느낌의 작고 포근한 쉼터의 천장을 응시하면서 미오가 홀로 중얼댔다.

“아침이군.”

일어선 지오프리가 쉼터의 작은 창을 열자, 숲의 청량한 바람이 작은 집에 가득 들어찼다. 그제야 어둑어둑하던 내부에 빛이 감돌아서 내부를 구석구석 확인할 수 있었다.

‘사냥꾼 쉼터란 게 이런 곳이구나.’

아주 좁은 침대 하나와 작은 난로, 서랍장 하나가 세간살이 전부였다. 침대에는 그녀가 누워 있었고, 지오프리는 밤새 난로 옆 벽에 기대앉아서 밤을 지새운 것 같았다.

“어째서 침대에 제가…….”

상대는 제국의 공작인데, 이런 일은 듣도 보도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손목으로 침대를 짚자 그녀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흐으윽.”

“말을 지독히도 안 듣는 편이군.”

햇살을 등진 지오프리가 그녀를 향해서 돌아서면서 중얼댔다. 순간 온몸에 번지는 고통도 잊은 미오가 입을 헤벌렸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잠시지만 그런 허튼 생각을 품었다. 햇살을 머금은 검은 머리가 사르르 흔들렸고, 구겨진 셔츠 사이로 탄탄한 가슴이 엿보였다. 그녀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쓱 핥았다. 그러다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응? 목이 안 마르네.’

분명 어제저녁에 기절하기 전까지 타는 듯한 갈증에 몸부림쳤었는데…….

머리맡에 보니 물을 떠 온 것으로 보이는 주전자가 있었다.

‘컵도 없는데, 내가 저기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신 건가?’

미오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매만지자 지오프리가 고개를 홱 돌렸다. 어쩐지 귓불이 붉어진 것 같았지만, 아직 미오의 시야는 그리 또렷하지 않았다.

“나가서 먹을 만한 것을 구해 오겠다.”

“……네.”

부서질 것 같은 낡은 문이 닫힌 후 미오는 입을 틀어막았다.

아까 지오프리의 말이 꼭 남편이 사냥하러 나가기 전에 건네는 인사 같았다.

“내가 완전히 미친 게 맞나 봐.”

지오프리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고, 그가 건네는 한마디에도 이렇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잠시 지오프리 생각을 하던 미오가 이내 다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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