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가장 보기 싫은 얼굴, 가장 보고 싶은 얼굴
땀이 비 오듯 쏟아져서 눈을 뜰 수 없었다. 축축한 소매로 대충 얼굴을 훔친 미오가 따가운 눈을 깜빡댔다.
“도대체 나가는 길이 있기는 한 거야?”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드레스 자락을 찢어서 군데군데 남겨 뒀지만, 아무리 걸어도 계속 흔적이 남은 갈대밭만 헤매고 있었다.
“이곳은 마법이 걸려 있구나.”
그제야 미오는 보통 갈대밭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모르는 게 없다. 깍깍.’
까마귀한테 들었는데, 그런 땅이 있다고 했다. 저주에 걸린 땅에 들어가면 짐승이고 사람이고 모두 갇혀 버린단다.
결국, 그곳에 흘러 들어간 것은 계속 길을 헤매다가 미쳐 버리거나 죽어 버린다고 했다.
‘너는 멍청하니까 조심하라고 미리 알려 주는 거다.’
‘악담 좀 작작 해라. 응? 내가 바보도 아닌데 그런 데를 왜 가?’
그때 까마귀의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실컷 비웃기만 했었다. 하지만 그 악담이 현실이 되자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하, 더는 못 걷겠어.”
갈대 사이에 풀썩 주저앉자, 기다랗고 유연한 가지가 그녀의 무게를 못 이겨서 바닥으로 기울었다. 미오는 어느새 서쪽으로 저물기 시작한 해를 바라봤다.
“이게 뭐야.”
엉망이 된 모습을 훑어보는데 쓴웃음이 났다.
조금 건강해진다 싶었는데, 안 아픈 데가 없었다. 발목은 삔 것 같고, 발가락은 전부 물집투성이였다. 손도 피투성이에 드레스는 넝마가 다 되었다. 가장 서글픈 것은 이 모양인데도 배가 여전히 고프다는 것이었다.
“목도 너무 말라.”
갈대는 꺾어 봐야 줄기에 물방울 하나 머금고 있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두 손으로 앉은 자리를 열심히 팠다. 가끔 땅을 파면 물이 고여 있고는 했으니까.
“여우라서 다행이지, 뭐야.”
인간은 모르는 것들을 많이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저주받은 땅이라서 그런지 아무리 파도 물을 찾을 수 없었다. 허기는 참을 수 있지만, 갈증은 정말 참기가 어려웠다. 입 안의 침이 바싹 마르자, 목이 칼칼했다.
해가 저무는 갈대숲 한가운데, 미오는 무릎을 바짝 끌어당겼다. 이럴 때는 차라리 여우가 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우습지. 그렇게 인간이 되고 싶었는데 말이야.”
지오프리를 만나기 전 여우의 몸으로 지내야만 할 때는 그게 그렇게 싫었다. 짐승처럼 네발로 걷고 아무 데서나 자야 하는 게 낯설고 불편했다. 인간만 되면 행복해질 것 같았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아니지. 나는 원래 인간이잖아.”
이곳에 와서 여러 차례의 회귀를 겪다 보니 머리가 고장이라도 났나 보다. 가끔은 그녀가 처음부터 여우 수인이었던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이마가 뜨끈한 게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미오는 두 손으로 팔을 감싼 채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우거진 갈대밭이 천막처럼 미오를 에워싸 주었다. 하지만 갈대 사이를 비집고 부는 매서운 바람까지 피할 수 없었다.
우우우.
세찬 바람에 갈대가 부딪히면서 굉장히 기이한 소음을 냈다. 미오는 그 소리를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힘겹게 눈을 감았다. 몸은 지쳤고, 상처투성이였다. 물을 구할 수도 없고,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힘을 비축해야 한다. 그렇게 지친 몸을 감싸 안는데,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났다.
“뭔가 있어.”
눈을 뜬 미오가 가만 땅에 귀를 대어 보았다. 무엇인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은 아니야. 이건…….”
본능적으로 위험을 직감한 그녀가 주변의 나뭇가지를 집어 들었다. 가만있을 때가 아니었다. 미오는 천천히 뒷걸음질 치면서 앞을 주시했다.
크르르, 크르르.
잠시 후 그녀의 앞에 나타난 것은 굶주린 들개 무리.
적어도 대여섯 마리쯤은 될 것 같았다. 어둠이 짙게 깔려서인지 노란 눈만 보여서 평소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다.
“하필이면 들개…….”
미오는 들개와 좋았던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
“저리 가!”
항상 떼로 몰려다니는 들개는 그녀를 영역에서 몰아냈고 공격했다. 심지어 간신히 얻은 먹이를 한 입도 못 먹고 뺏긴 적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여우가 아니니까…….’
들개보다 훨씬 더 커다란 몸을 가지고 있으니까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
크르르, 크르르.
하지만 침을 뚝뚝 흘리는 들개의 송곳니를 보자 그녀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우였으면 빠르게 달아나기라도 할 텐데,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나뭇가지를 휘두르는 것뿐이니까.
절망에 휩싸인 미오의 볼 위로 달빛이 희미하게 드리워졌다.
* * *
말을 달리는 지오프리의 얼굴에는 조금의 여유도 없었다. 그는 라비니아가 몰고 나갔던 마차의 마부를 찾아내서 목적지를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고삐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서 핏줄이 잔뜩 불거졌다.
‘아닐 거야. 죽었을 리 없다.’
아직 그녀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다. 지금 미오가 죽어 버리면 괜한 일에 시달리게 된다. 지오프리는 성가신 일은 질색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죽어서는 안 돼.”
몸을 낮춰서 말을 달리는데 사방이 안개로 가득 찬 땅에 접어들었다. 말의 속도를 줄이는 지오프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곳에서는 잠시도 버티기 힘들 텐데.”
잔뜩 흥분한 말을 달랜 그가 말에서 뛰어내리면서 혼자 중얼댔다. 하지만 그는 미오가 아직 살아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나와라.”
어느새 사방에서 나타난 짐승에게 작은 손수건을 하나 내밀자, 눈이 붉은 짐승들이 천의 냄새를 킁킁 맡았다. 그것들은 입가로 끈적한 침을 질질 흘리더니 달을 향해 아우성쳤다.
“가서 찾아와.”
소리 없이 그것들이 앞으로 달려가자 지오프리는 가만 서서 밤 풍경을 즐겼다. 어둠 속에 잠긴 이 땅은 인간에게는 두려움 자체였지만, 그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역시 살아 있구나.”
저 멀리서 들개 떼가 짖어 대는 소리에 지오프리가 싱긋 웃었다.
“보통이 아닐 거라고 예상하기는 했지만…….”
가만 서서 땅이 울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잠시 후 안개를 헤치고 낯익은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들개 떼의 추격을 피해서 죽어라 달려온 미오는 작은 언덕을 기어올랐다. 첩첩이 싸인 가시덤불을 헤치느라 온몸이 긁혔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간신히 올라와서 나뭇가지를 붙잡고 서는데, 앞에 희미하게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따지기도 전에 이런 위험한 곳에서 누군가를 만났다는 것이 그저 반갑기만 했다.
“저기, 여기 사람이 있어요! 저 보이세요? 좀 도와주세요!”
없는 힘을 짜내서 소리를 질렀는데, 상대는 꼼짝하지 않았다.
‘뭐지. 잘못 본 건가.’
머리 위에 드리운 먹구름이 물러나고 달빛이 아래를 비추자 상대의 모습이 조금 더 뚜렷하게 보였다.
“……?”
확실하지 않지만, 저기 멀리 서 있는 사람이 지오프리 같았다.
“진짜 지오프리일까.”
의심하는 찰나 바람을 타고 그의 체향이 실려 왔다. 이건 확실히 지오프리의 냄새가 맞았다.
그가 이곳을 어떻게 찾아온 걸까.
‘설마 나를 구하려고 온 것은 아닐 텐데.’
이 야심한 밤에 이곳을 찾은 것이 우연의 일치일까. 당황한 그녀가 가만 서서 머뭇대는데, 그가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데…….”
‘도움이 필요해 보인다고?’
나뭇가지에 접질린 발목을 의지한 채 미오는 입술을 세차게 짓이겼다. 냉혈한인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내가 지금 당장 들개한테 물어뜯기게 생겼단 말이야.’
지금 저 언덕 아래 들개가 서로의 머리를 짓밟아 가면서 올라오고 있었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갔고, 미오의 가슴은 타들어 갔다.
“도와줄까.”
처음에는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지금 나를 구해 주겠다는 거예요?”
혼란스러워진 미오는 말을 더듬었다. 도움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황스러웠다. 지오프리가 그녀를 구해 주는 것은 왠지 낯설었다.
‘처음은 아니지만…….’
오리를 잡으려고 무모하게 덤볐던 그녀가 호수에 빠졌을 때도 지오프리가 구해 주긴 했으니까.
“물론 그냥 도와주는 건 아니야.”
“……하.”
“나는 자선 사업가가 아니니까.”
이제야 완벽하게 지오프리다웠다. 하지만 선뜻 답을 하기가 힘들었다. 뭔가 답례를 해야 한다면 그녀는 무엇을 내어 줄 수 있을까.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데.’
미오가 잠깐 망설이는 사이에 언덕을 거의 다 올라왔는지 들개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크르르, 크르르.
바로 뒤로는 그녀의 몸을 물어서 찢어발길 준비가 된 들개 떼가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는 이 순간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그녀를 향해서 웃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불행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나저나 오늘 달이 참 밝군.”
곧 미오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지오프리는 마치 산책 나온 사람처럼 산뜻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나뭇가지에 간신히 몸을 의지한 미오가 분노로 몸을 덜덜 떨었다.
‘남은 죽게 생겼는데, 무슨 달빛 타령이람!’
그런데 진짜 황당한 게 이런 순간에도 지오프리의 얼굴에 가슴이 뛰었다.
‘각인이란 건 빌어먹을 저주가 분명해.’
지오프리의 셔츠 위로 한쪽만 걸친 갈색 망토가 깃발처럼 바람에 흔들렸다. 저주받았다는 땅에 그보다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순간 미오는 그가 이 땅의 주인처럼 느껴졌다. 음산하리만큼 창백한 얼굴에 석류처럼 붉은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이리 와.”
지오프리가 한 발 가까이 다가오자 그의 얼굴이 더 잘 보였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깊은 눈은 미동도 없었다. 마치 그녀의 속을 모조리 꿰뚫어 보는 것처럼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왜 망설이지? 그 마음은 진심이 아니었던가?”
뭐라고 답을 해야 하는데, 곧 쓰러질 것 같은 미오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들개에게 물려 죽는 것은 싫지만, 과연 그의 손을 잡는 것은 안전할지 확신이 없었다.
‘이미 여러 번 그의 칼에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과정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고, 단편적인 기억뿐이지만 끝은 늘 비극이었다. 칼을 휘두르는 지오프리와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이 있었다.
“퍽 성가시게 하는군.”
여전히 희미한 미소를 띤 지오프리가 미오의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얼른 내 손을 잡아. 그러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 테니까.”
지오프리가 그녀를 향해서 손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