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라비니아 베일의 욕망
듬성듬성 털이 빠진 미오가 숲속을 거니는 모습을 떠올려 봤다. 사냥에 능하지 못해서 고생은 좀 하겠지만, 나름대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지도 모른다.
‘지오프리가 없는 삶을 사는 거야.’
지친 그녀가 호숫가 근처에서 목을 축인 후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바라보다 스르르 눈을 감을지도 모른다.
“그런 마지막도 나쁘지 않아.”
하지만 담담한 말과는 달리 미오는 이내 울적해졌다.
“대신 다시는 인간이 될 수 없을지도 몰라.”
손을 뻗어서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원래 인간의 모습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가 없으면 나는 이 모습에 평생 갇히게 되겠지.’
조금 있으면 그녀는 여우가 될 것이다.
그를 대체할 만한 누군가를 찾은 것도 아니니까, 미오는 영영 털 짐승의 몸으로 살아야 한다.
“차라리 진짜 짐승이라도 되면 몰라도…….”
하지만 인간의 사고를 하는 그녀가 정말 평생 짐승으로 살 수 있을까. 그렇게 사는 건 지오프리의 손에 죽는 것보다는 나은 걸까. 이렇게 약한 미오가 숲에서 버틸 수 있을까. 이런 사실들이 그녀를 더욱더 우울하게 했다.
“모르겠다. 정말.”
자리에서 낙엽과 먼지를 떨고 일어나는데, 다리가 휘청거렸다. 어제 먹었던 독 때문인지, 밤새 추위에 떨어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나무에 기대선 채 붉은 기운으로 물들기 시작한 들판을 가만 바라봤다.
“여기가 대체 어디쯤일까.”
눈 앞에 펼쳐진 빽빽한 갈대 때문에 위치를 전혀 알 수 없었다.
“들판을 벗어나서 큰길만 찾으면 이정표가 있겠지.”
길을 찾는 것은 큰 문제는 아니었는데, 라비니아를 떠올리자 주먹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진짜 어이없는 애네?”
지오프리를 차지하려고 이런 짓까지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끽해야 얼마나 부유한지 자랑하고 거들먹대는 게 전부일 줄 알았다.
“방심했다가 큰일 날 뻔했어.”
사실 이곳에 그녀를 죽이려 드는 다른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정말 죽일 작정을 단단히 한 거야.”
미오의 호박색 눈이 음험하게 번들댔다. 아마 라비니아는 그녀가 죽었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단단히 미친 인간이 분명해.”
굳이 독을 쓰지 않아도 자루에 담아서 이런 곳에 던져두면 대부분 숨을 못 쉬거나 공포에 질려 죽을 것이다.
“그냥 부잣집 아가씨인 줄 알았는데 아니란 거지?”
작은 음성에 분노가 깊게 스며들어 있었다.
돌아가기만 하면 그녀를 우습게 본 대가를 제대로 치르게 해 줄 작정이었다. 지금 미오의 머리를 뜨겁게 하는 것은 복수심이었다.
‘반드시 살려 달라고 애원하게 해 주겠어.’
어금니를 꽉 깨문 미오가 씩씩하게 들판을 헤치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처음의 각오는 잊은 지 오래였다.
헉헉.
지친 미오의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잠시 멈춰 선 그녀가 두 손을 허리에 댄 채 기침을 연신 해 댔다. 땀이 비 오듯 쏟아져서 드레스가 자꾸 다리 사이에 감겼다. 그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우렁차게 흘렀다.
“맙소사. 뱃가죽이 등에 붙은 것 같아.”
이대로 가다가는 복수하기 전에 굶어 죽을 것이다.
이런 미오의 사정을 모르는지, 주변에는 먹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빽빽하게 우거진 갈대를 보면서 마른 입술을 달싹댔다.
“하다못해 이게 옥수수나 사과나무였으면 얼마나 좋아.”
근래 배가 고프다는 기분을 잊고 지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미오가 너무 말랐다면서 로렌은 수시로 먹을 것을 가져다 날랐다. 그녀가 고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로렌은 질릴 정도로 고기 요리를 만들어 줬다.
“무슨 영양제라면서 이상한 것도 잔뜩 먹였는데…….”
식사 후에 파사 제국에서 난 귀한 약제라면서 끔찍한 냄새가 나는 알약도 삼켜야 했다.
‘이게 미오의 몸을 건강하게 해 줄 거예요.’
퍽 귀찮은 일이었는데, 지금은 로렌의 주는 약마저도 그리웠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네.”
카스피언가에서 머문 게 얼마나 된다고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로렌은 좋은 사람이지만, 그녀와 아무런 사이도 아니다.
“움직이자.”
갈대를 두 손으로 헤집고 나가다 보니 손바닥과 손등에 피가 철철 흘렀다.
“아얏.”
튕겨 나온 갈대가 미오의 볼을 스치면서 얕은 상처를 냈다. 피 묻은 손등으로 볼을 닦는데, 돌연 눈물이 났다.
원래 미오는 잘 울지 않는 아이였다.
보통 아이들은 울면 관심을 더 받는다고 하지만, 미오가 살던 고아원에서는 울면 혼났다. 다시는 울고 싶지 않을 만큼 체벌이 이어졌고,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슬픈 일에도 잘 울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이번에는 걸핏하면 눈물 바람이었다.
“진짜 모든 게 엉망진창이야.”
지저분해진 볼 위로 눈물방울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 * *
“아가씨. 오늘따라 더욱더 아름다우세요.”
“그런 낯간지러운 말 별로지만 말이야.”
화장대 앞에 앉은 라비니아의 얼굴이 모처럼 활짝 폈다. 그녀의 머리를 손질해 주던 베스가 슬쩍 아가씨의 눈치를 살폈다.
‘어제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라비니아가 어제 은밀히 외출했었다. 그녀가 부리는 하인만 데리고 다녀와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마차가 문을 나서는 것은 분명히 확인했다.
‘눈엣가시 같은 그 계집도 함께 나갔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어찌 된 일인지 아침에 미오가 침실에 없었다. 묻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베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괜한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이는 법이니까.
카스피언가의 별다른 것 없는 하루가 흘러갔다.
하녀는 액자의 먼지를 닦았고, 무릎을 꿇고 광이 나도록 바닥을 문질렀다. 하인은 갓 잡은 닭을 손질해서 주방에 가져다주었고, 정원사는 잡초 손질에 여념이 없었다.
“왜 안 내려오는 거지?”
긴 다리를 꼬고 의자에 앉은 지오프리의 물음에 사무엘이 머리를 긁적였다. 점심을 함께하기 위해서 미오를 기다리던 주인을 향해서 조심스레 입을 뗐다.
“제가 막 다녀왔는데요. 아침부터 안 보이셨다고 합니다.”
“……?”
“아마 산책하러 나가신 게 아닐까 합니다.”
사무엘의 말에 지오프리가 허리를 바로 세웠다. 한번 미오가 사라졌다가 금방 돌아온 일이 있긴 했지만, 예감이 좋지 않았다.
“방에 여우가 있던가?”
지오프리의 느닷없는 물음에 사무엘이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여우 말씀이신지요.”
“이상하군.”
들고 있던 서류를 식탁 위에 내려 둔 그가 사무엘에게 뭔가 지시했다. 사무엘이 알아본 바로는 어제 미오가 라비니아와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단다. 지오프리는 곧장 라비니아를 불러왔다.
“마침 새로운 향수를 뿌렸는데 공작님을 뵐 수 있어서 참 다행이지 뭐예요.”
드레스 단에 하얗고 큰 꽃이 장식된 라비니아가 활짝 웃으면서 응접실에 들어섰다. 그 모습을 가만 지켜보던 지오프리는 긴 손가락을 펴서 관자놀이에 댔다.
“사무엘, 잠시 나가 있도록.”
“네. 알겠습니다.”
사무엘이 나간 응접실에는 라비니아가 뿌린 향수 냄새가 가득 들어찼다.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지오프리가 벌떡 일어서자 라비니아는 긴장을 숨길 수 없었다. 공작의 존재 자체가 그녀의 가슴을 뛰게 했다.
그는 라비니아를 돌아보지 않은 채 응접실의 창을 벌컥 열었다.
“미오는 어디에 있지.”
짧은 물음에 라비니아는 입술을 세차게 깨물었다. 모처럼 단둘이서 있는데 그런 계집의 행방을 물어볼 게 뭐람.
“글쎄요. 그렇게 천한 계집이 어디로 갔는지 누가 알겠어요. 보니까 정원사며 여기저기 추파를 던지고 다니던데요.”
“같이 마차를 타고 나갔다고 들었는데…….”
“네. 분명 그랬어요. 함께 나가고 싶다고 졸라서 어쩔 수 없었어요. 그런데 돌아갈 시간이 되자 자기는 할 일이 있다면서 마차에 타지 않았어요.”
“무슨 일…….”
“가볍게 차를 마신 다음에 헤어졌답니다. 아마 약혼자를 만나러 간다고 했던 것 같아요.”
거짓말은 막힘없이 술술 나왔다. 미오를 처치하기로 한 순간부터 몇 번이고 연습했던 말이다.
‘공작님. 그 계집은 돌아올 수 없을 겁니다.’
미오를 담은 자루를 저주받은 땅에 버리고 왔다고 했다. 그곳은 카스피언 제국 사람이라면 쳐다보지도 않는 땅이었다. 들어갔다 살아서 나온 사람이 없는 곳이었다.
‘이미 죽었는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아가씨.’
그녀를 오래 따랐던 건장한 사내조차도 그곳을 두려워했다.
‘후환이 없도록 일을 처리하는 편이 깔끔하잖아.’
아까부터 미오의 일만 묻는 공작이 야속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어째서 한 번도 그녀를 바라봐 주지 않을까.
‘나는 이렇게 당신만 쳐다보는데.’
지오프리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이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 그가 황태자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갖고 싶은 것은 카스피언 제국이 아니었으니까.
‘내 보석함, 가장 높은 자리에 당신의 자리를 남겨 뒀거든.’
지오프리를 갖고 싶다는 욕망에 라비니아의 가슴이 울렁거렸다. 창밖을 내다보는 남자의 뒷모습은 완벽했다. 딱 벌어진 어깨 아래로 탄탄한 몸이 유려한 선을 이루고 있었다. 바람에 흩어진 앞머리가 어지러이 나부끼는데, 라비니아는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누구도 가질 수 없는 남자.’
그런 소문이 지오프리의 치명적인 매력에 빛을 더해 주었다. 그녀는 곧 저 남자를 손에 넣게 될 것이다.
‘도저히 못 참겠어.’
사뿐 일어난 라비니아는 그대로 달려가서 지오프리의 허리를 꽉 안았다.
“공작님. 이 몸과 마음은 이미 당신의 것이랍니다.”
수백 번 곱씹었던 고백을 입 밖으로 내뱉은 순간 라비니아의 얼굴은 승리감에 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