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갈대가 우거진 습지는 간식을 먹는 장소로는 조금 어울리지 않았다. 사방이 습한 데다 깔아 둔 매트 아래로도 진흙이 느껴졌으니까.
“얼른 여기에 앉아요.”
라비니아가 아주 다정하게 말을 건넸고, 미오는 그녀의 앞에 가서 자리 잡았다.
곧 3단 디저트 트레이가 놓였고, 그 위에 스콘과 마카롱, 쿠키, 브라우니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라비니아는 끼고 있던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고용인에게 지시했다.
“조용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모두 가 봐.”
차를 따라 준 후 고용인이 전부 물러가자 두 사람만이 남았다.
적막감 속에서 새들이 푸드덕 날아오르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제야 라비니아가 친절한 아가씨의 가면을 벗었다.
“얼른 먹어 봐.”
“……음.”
라비니아가 이런 식으로 구는 것은 놀랍지 않았다.
‘나를 싫어하면서 왜 여기까지 데려온 걸까?’
그녀의 머뭇거림을 눈치챈 라비니아가 작은 마카롱 하나를 쥐더니 베어 물었다.
“왜 안 먹어? 독이라도 있을까 봐? 이건 전부 수도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사통 과자점 제품들이야. 사통 과자점 파티시에는 황실에서도 일한 경력이 있어. 아마 평생 먹어 본 적이 없는 그런 맛일 거야.”
마카롱 하나를 먹으면서도 미오의 속을 있는 대로 긁을 작정인 모양이었다.
“아! 유명한 곳에서 사 왔구나.”
조금 놀란 척을 했지만, 미오는 별로 관심 없었다. 단것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고, 이 불편한 초대에 승낙한 것으로 지난번 일에 대한 보답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안 먹으면 계속 권할 기세야.’
귀찮아지는 것은 질색인지라 미오가 작은 쿠키 하나를 집어 들었다.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맛을 내는 쿠키를 오물오물 씹는데, 라비니아가 차를 홀짝였다.
“나는 말이야. 뜻대로 하지 못한 게 없었어.”
자신감에 찬 라비니아의 목에는 붉은 보석이 햇볕을 받아서 번쩍거렸다. 가만 고개를 끄덕이던 미오가 다시 쥐고 있던 쿠키를 내려다봤다. 작은 부스러기가 낡은 드레스 위로 떨어졌다. 아마도 그녀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라비니아는 부유한 데다 귀족이니까 못 할 일이 없었을 테지.’
쿠키 부스러기가 떨어지자 매트로 올라온 개미가 열심히 그것을 나르기 시작했다. 개미의 몸짓을 관찰하는데 라비니아가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주제 파악을 못 하는 것들을 경멸해. 주인이 조금만 귀여워하면 개는 자기가 뭐라도 된 줄 알더라고.”
그녀의 말에 미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내가 공작의 귀여움을 받아서 주제 파악을 못 하는 개라는 뜻인가.’
그녀의 사정을 조금도 모르면서, 저렇게 함부로 지껄이다니.
‘참 한심하다. 한심해.’
백작 아버지만 믿고 까불다가 인생이 한 방에 나락으로 떨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원작에서 라비니아가 나왔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귀족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일은 역사에서도 흔했으니까.
‘하지만 역시 귀찮아.’
뭔가 따지려던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 그녀 삶에 라비니아는 어떠한 걸림돌도 되지 않았다.
문제는 지오프리, 지오프리뿐이었다.
그녀는 카스피언 공작저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도 그를 떠올렸다. 꽤 멀어서인지 고개를 들어도 공작 성의 깃발이 보이지 않았다.
‘지오프리는 뭘 하고 있을까.’
그는 이따금 그녀를 경멸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아주 가끔 친절을 베풀기도 했기에 무척 헷갈렸다.
‘함께 춤을 추자고도 했었어.’
원작이나 희미한 과거의 기억과 비슷한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원래 지오프리는 늑대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내가 그를 위해서 죽는다고 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어.’
혼란스러운 기분에 고개를 푹 숙이는데, 라비니아가 짜증을 냈다.
“너 지금 내 말을 듣고 있는 거야?”
“듣고 있어.”
연신 반말로 대꾸하는 미오가 견딜 수 없는지 라비니아의 부채질이 빨라졌다.
“나는 너 따위를 더는 참아 주지 않기로 했어.”
“……하.”
‘꼭 그래야겠어?’
조금만 기다려 주면 그녀도 살길을 찾아서 지오프리와 라비니아 사이에서 빠져 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라비니아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미오는 쿠키를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
쿠키를 씹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고, 입 안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는데…….’
그랬으면 분명 그녀가 미리 알아차렸을 텐데.
미오가 인상을 찌푸리자 라비니아가 느릿하게 입을 뗐다.
“먹어 본 적 없는 맛이 맞지? 구한다고 꽤 힘들었어. 그건 말이야. 색도 냄새도 없는 귀한 독이야. 너처럼 천한 계집에게 쓰는 게 아까울 만큼.”
“……크흑.”
라비니아가 근본부터 틀려먹은 인간이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일로 독살까지 시도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미오는 억울해서 눈물도 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느낌이 좋았는데…….’
죽는 결말 말고 뭔가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손으로 목을 긁어 대던 미오는 서서히 몸이 굳어 가는 것을 알아차렸다. 눈물 맺힌 눈으로 라비니아를 바라보는데, 그녀는 남은 차를 홀짝일 뿐이었다.
“살려―.”
“살려 줄 거면 애초에 독을 먹였겠어? 이래서 멍청한 계집들은 안 된다는 거야.”
미오가 옆으로 쓰러지는 것을 지켜보던 라비니아가 벌떡 일어났다. 이제 미오는 눈도 침침하고, 호흡도 제대로 하기 어려웠다. 숨을 헐떡대는데 누군가 그녀 위로 자루를 덮어씌웠다. 저항하고 싶었지만, 몸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제대로 처리해.”
눈을 감으면서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라비니아의 냉랭한 음성이었다.
* * *
미오가 의식을 되찾은 것은 한밤중이었다.
‘또 죽은 거야?’
허탈해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번에는 모든 것이 달랐고, 제법 괜찮은 계획까지 있었다.
‘사냥 대회를 코앞에 두고 이런 꼴이라니.’
그곳에 가면 금발에 푸른 눈을 한 근사한 남자를 만났을지도 모른다. 매번 도끼눈을 해 대는 지오프리 말고 그녀에게 한눈에 반해서 집착하는 잘생긴 그런 남자 말이다.
“……으. 으.”
눈이 잘 떠지지 않아서, 얼굴에 잔뜩 힘을 줘 봤다. 목이 꽉 막힌 기분이었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뭐야. 여우가 아니잖아.’
이곳에서 새로 눈을 뜰 때는 어김없이 여우의 몸이었는데.
‘설마 죽지 않은 거야?’
독약을 먹었는데 왜 안 죽은 거지.
분명 손발이 마비되었고, 목이 꽉 막혔었다. 꼼짝없이 죽었다고만 생각했는데, 운이 좋았던 걸까.
“……하.”
눈을 위쪽으로 뜨자 거친 포대 자루 사이로 달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누군가 그녀를 가둔 포대 자루를 이곳에 내던졌고, 반나절이 지난 것이다. 아니면 하루가 지났을지도 모른다.
‘기막혀서 할 말이 없네.’
항상 그녀의 이야기에는 지오프리만 있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다른 사람까지 그녀를 죽이려고 들다니.
‘일단 빠져나가야겠어.’
손발이 묶인 것은 아니라서 자루 입구로 손을 내밀어서 대충 끈을 비틀자 쉽게 나올 수 있었다. 자루에서 기어 나온 미오가 허리를 세우자 심한 구토가 밀려들었다.
“웩.”
속에 든 것을 풀밭에 잔뜩 게워 내자 그제야 허리를 펼 수 있었다. 흐릿한 눈으로 주변을 살피는데, 낯선 들판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의 키를 넘어서는 갈대가 우거져서 어디인지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분명 카스피언 공작 영지와는 거리가 있는 곳이야.”
익숙한 냄새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근처에 습지가 있는지 눅눅한 냄새가 바람에 섞여 있었다.
“피곤하니까 잠부터 자야겠어.”
밤에 낯선 곳에서 무턱대고 움직이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 보통의 아가씨였다면 무서워서 심장 마비를 일으켰겠지만, 그녀는 용맹스러운 여우 수인이었다.
“이런 들판쯤이야, 내 놀이터 수준이지.”
슬쩍 돌아봤는데 곰이나 늑대는 나올 것 같지 않았다. 그런 흉포한 짐승이 있다면 분명 바람에 냄새가 묻어날 테니까. 비틀대는 걸음으로 큰 나무 근처까지 걸어간 미오는 그대로 나무 등에 기대앉았다. 갇혀 있던 자루도 질질 끌고 와서 어깨에 걸쳤다.
“빈약한 털이라도 없으니까 아쉽네.”
인간의 몸으로 밤바람을 고스란히 맞는 것은 힘겨운 일이었다. 게다가 카스피언 제국은 일 년 내내 춥기만 했다. 미오는 발밑에 있는 낙엽을 박박 긁어모았다.
‘추울 때는 낙엽만 한 게 없으니까.’
그것을 드레스 안에 집어넣고 위에도 듬뿍 뿌렸다. 멀리서 보면 그녀가 낙엽 더미 속에 숨은 것 같았다. 없는 기운을 모조리 썼더니 코에서 단내가 났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해야지.”
고개를 땅에 묻은 미오가 홀로 중얼댔다. 살아 있는 게 다행이긴 했지만, 서러움에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몸을 옹송그린 미오의 귓가에 멀리서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침에 눈을 뜨는데, 밤새도록 두들겨 맞은 것처럼 온몸이 결렸다. 찬 기운에 연신 기침이 터졌다.
콜록콜록.
드레스는 눅눅했고 곱은 손가락을 제대로 펼치기도 힘들었다. 역시 낙엽 하나로 밤을 무사히 나기란 역부족이었나 보다. 큰소리는 쳤지만, 혹시 맹수가 밤에 나타날까 봐 제대로 잠도 이루지 못했다. 눈이 뻑뻑했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독 때문인지 속이 따갑고 울렁거렸다.
“아, 진짜 먹고살기 힘들다.”
원래도 고단한 인생이었는데, 이곳에 오고서부터는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미오가 기지개를 켜자 몸 위에 쌓인 낙엽 무더기가 우수수 흩어졌다.
“이제 어떡하지?”
어디인지도 모르는 허허벌판에 앉아서 미오가 손으로 눈을 벅벅 문질렀다. 희미하게 보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힘없이 중얼댔다.
“이렇게 된 것도 혹시 내 운명일까?”
다른 존재가 그녀를 죽이려고 드는 일은 처음이었다.
“이런 일은 상상도 못 해 봤어.”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책에 빙의를 하기는 했어도 모든 게 원작과 똑같이 흘러가지도 않았으니까.
“그래. 나는 엑스트라도 못 되는 주제니까, 내가 없어도 아마 별 차이도 없을 거야.”
조금은 쓸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