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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35)화 (35/123)

35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2)

미오는 지금이 그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인생 최대 연극의 서막을 올린 그녀는 감정에 집중했다. 그렁그렁한 눈빛을 갈무리한 뒤 입을 열었다.

“저는 공작님 하나만 보고 여기까지 왔는걸요. 제가 살던 곳에서 이곳까지 오는 길은 퍽 험난했답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도 두렵지 않았어요. 이곳에는 당신이 있으니까요.”

한 손은 가슴에, 다른 한 손을 바닥을 향해서 힘없이 떨구었다. 그리고 시선은 손끝을 가만 응시했다. 연극처럼 내뱉은 말이기는 했지만, 여기에 담긴 감정은 진실에 가깝다. 이곳에 오기까지 퍽 위태로웠고, 그를 반드시 만나야만 했다.

“……하.”

몹시 사나운 얼굴로 미오를 응시하던 지오프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녀의 졸렬한 수법은 아무리 해도 그에게 통하지 않았다. 다만 저런 고백은 이상하게 거슬렸다. 진심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미오의 고백을 듣노라면 오래 녹슬어 있던 심장이 요란한 소음을 내는 것 같았다.

‘내가 왜 이러는 거지.’

한여름 날씨처럼 변덕이라도 부리는 건지 짜증으로 들끓던 가슴이 일순간 뻐근해졌다.

사무엘과 미오가 가까이 붙어 서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눈살이 찌푸려졌다. 치밀어오르는 분노에 검을 쥐고 모조리 부수고 싶기도 했다.

‘마치 내 것을 뺏긴 느낌이었는데…….’

로렌과 집사를 제외하면 사무엘이 가까운 편에 속했다.

‘내가 그만큼이나 사무엘에게 깊은 정을 주었나.’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지오프리의 머리가 지끈댔다.

그제야 아침부터 화재 현장에 다녀온 피로감이 밀려들었다.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던 지오프리는 미오를 가만 응시했다. 그녀의 여린 어깨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일단 이 문제는 여기에서 매듭을 지어야겠어.’

마침 〈티그리스의 푸른 물결〉이라는 왈츠곡이 끝나 가고 있었다.

미오와 서너 발자국을 사이에 두고 선 지오프리가 짧게 입을 뗐다.

“어쨌거나 앞으로 춤을 추고 싶을 때는 나한테 이야기하도록.”

“……에?”

“괜히 순진한 사무엘을 꼬여 낼 생각은 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는 할 말을 마치자마자 그대로 등을 돌려서 무도회실을 빠져나갔다. 지오프리가 밀고 나간 문이 다시 닫히자 미오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왜 그런 오해를 하는 거며, 결론이 왜 그 모양이지?”

춤을 추고 싶을 때는 지오프리에게 이야기하라니.

“평생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다시는 춤을 추지 않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소매로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이마를 훔쳤다. 그리고 고개를 떨구자 그녀의 손에 시선이 닿았다.

“……아.”

지오프리와 맞잡았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 * *

이번 사냥 대회에 공작과 동반할 상대가 미오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약간의 낭만적인 수식이 덧붙여진 이야기는 고용인의 힘든 하루에 짧은 위안을 주었다.

“우리 주인님이 미오 님을 그윽하게 바라보고 계셨잖아. 아니지, 요즘은 미오 님만 바라보시는 것 같아.”

공작이 미오를 감시하는 살벌한 눈빛은 이렇게 포장되었다.

“말해 뭐 해. 호숫가에서 두 분이 달콤한 시간을 보내는 걸 목격한 사람도 있는걸. 마구간에서 일하는 아이가 글쎄, 입맞춤하는 것도 봤다던데?”

지오프리가 미오를 협박해 대던 오후는 달콤한 연애담으로 바뀌었다.

“미오 님을 위해서 돌아가신 아가타 님의 승마복까지 내어 주셨다지.”

“어쩜 그렇게 낭만적일 수 있을까.”

로렌이 독단적으로 벌인 일도 어느새 지오프리가 준 선물이 되어 있었다.

“어쩜, 너무 낭만적이야. 사실 나는 우리 주인님이 평생 독신으로 사시다가 양자를 들이실 줄 알았어.”

사실 이것이야말로 지오프리의 속마음을 꿰뚫어 본 이야기였지만, 누구도 알지 못했다.

제국에서 지오프리 카스피언만큼 무수한 소문을 몰고 다닌 사내도 드물었다.

황태자로 태어났으나, 모든 것을 잃은 사내. 그대로 세상에서 지워질 것 같았지만, 전장에서 적을 섬멸하고 시체 무덤 위에 우뚝 선 전무후무한 인물이었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업무를 처리하는 공작의 모습은 감탄을 자아내는 데 무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 얼굴은 또 어떻고…….’

금발에 푸른 눈의 벤 황태자가 빛이라면 지오프리는 어둠과 닮아 있었다. 칠흑처럼 검은 머리와 흑요석처럼 짙은 공작의 눈빛에는 마성이 깃들어 있다고들 했다.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남자.’

그게 바로 지오프리 카스피언이었다. 그렇게 비현실적인 남자에게 드디어 반한 여자가 생겼다니, 고용인들은 오늘도 모였다 하면 미오와 공작의 이야기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그 소문은 라비니아의 귀에도 고스란히 흘러 들어갔다.

“전부 미친 거 아니야?”

벌꿀로 피부 관리를 받고 돌아온 라비니아가 들고 있던 보석 장식이 된 손가방을 내팽개치면서 소리쳤다.

“내가 알아듣게 이야기한 거 같은데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건가?”

드레스를 몇 벌 나누어 주면서 라비니아 베일과 미오의 신분 차이를 분명히 일깨워 줬다. 미오는 그녀가 베푸는 호의에 감사하면서 지내야 하는 비천한 처지라고 말이다.

“다들 헛소문 퍼뜨리는데 신이 났더라고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동조하는 꼴이 얼마나 화가 나던지.”

라비니아의 숄과 양산을 받아 든 베스가 옆에서 계속 투덜댔다. 처음에는 미오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사람들도 요즘은 마음이 바뀐 것 같았다.

‘그 계집이 한 게 뭐가 있다고 다들 홀려서는.’

이러다 공작 성에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닌지 덜컥 겁이 났다. 거기다 라비니아가 모르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였는데, 공작이 미오에게 귀족 증명서를 만들어 줬다는 것이다.

‘어쩌지. 이걸 말하면…….’

그녀에게 이 사실을 알려 준 사람이 베스를 찾아와서 따질지도 모른다. 베스는 그녀가 하는 일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두려웠다.

‘자칫하면 공작님의 눈 밖에 날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최대한 두루뭉술하게 밝히기로 했다.

“게다가 아가타 님의 승마복을 미오 아가씨에게 줬다고 하더라고요.”

“……뭐?”

죽은 황후의 옷을 준다는 것은 보통 의미가 아니다.

“그게, 공작님이 사냥 대회에도 미오 아가씨와 가신다고 하던데요.”

그제야 태평하게 있던 라비니아의 얼굴이 홱 돌아갔다. 누구에게도 미소를 건네지 않던 남자였다. 누구나 함부로 탐낼 수 있는 남자도 아니었다.

‘지오프리는 카스피언 제국에 핀 가시 돋친 검은 장미 같은 존재야.’

그런데 계속 평민 나부랭이가 공작의 상대로 거론되는 것은 더는 들어 줄 수가 없었다.

“이 성에 나 말고 아가씨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 있었어?”

이글대는 눈을 한 라비니아가 아무렇지 않게 베스의 뺨을 후려쳤다. 갑작스러운 폭력에 한쪽 뺨을 감싼 베스가 눈을 크게 떴다.

“나가서 내가 데리고 왔던 남자를 불러와.”

“……아가씨.”

“한 대 더 맞아야겠니?”

베스는 평소와 다르게 차분한 라비니아의 얼굴을 연신 살폈다.

“그게 아니라 무슨 일을 하시려고 하는지…….”

베스는 어디까지나 눈앞의 허영 덩어리 아가씨를 이용하고자 했다. 그러니 그녀가 모르는 일이 벌어진다는 게 영 달갑지 않았다.

“글쎄. 너 따위가 알 필요가 없지 않을까?”

서늘하게 대꾸하는 라비니아의 전신에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두려운 기운이 흘러넘쳤다. 눈치 빠른 베스는 지금은 납작 엎드려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잘못했습니다.”

베스가 바닥에 이마를 대면서 죄를 뉘우치자 라비니아가 깔깔댔다.

“뭘 그렇게까지 해. 구질구질하잖아. 얼른 나가 보렴.”

“네! 아가씨.”

몸을 일으킨 베스가 부리나케 밖으로 달려 나갔다. 방에 남아 있던 라비니아는 거울 앞으로 다가가서 이마와 볼에 증류수를 가볍게 뿌렸다.

“성가신 개미는 짓밟아 버리는 게 최고지.”

혼잣말을 중얼대는 라비니아의 얼굴에 미소가 활짝 피어올랐다.

* * *

“어때요. 미오.”

“글쎄요. 참 좋네요.”

미오는 라비니아의 초대를 받아서 그녀와 함께 낯선 습지를 거닐고 있었다.

‘내가 왜 얘랑 산책 따위를 하는 거지?’

거절을 못 하게 하는 수법이 아주 교묘했다.

미오가 거절하려고 들자 한쪽 뺨이 부은 하녀가 울먹거렸다. 누가 그랬는지 묻지 않아도 너무 뻔한 이야기였다.

‘내가 누구를 동정하는 거람.’

옆에서 내내 꽃이 어떻다느니 하고 떠드는데 진짜 풀이라면 지긋지긋했다. 황금 같은 낮잠을 포기하고 나온 게 아쉬웠다.

‘그만 미워할까.’

라비니아가 하는 짓이 꼴 보기 싫은 것도 있지만, 과거 그녀에게 가난하다고 놀렸던 애들에 대한 복수심도 작용했다. 그래서 드레스를 욕심내서 굳이 가져왔다.

‘과거는 과거에 불과한데 말이야.’

게다가 그녀의 팔짱을 낀 채 이런저런 말을 거는 라비니아가 왠지 딱해 보였다. 가짜 짝사랑만 해도 이렇게 지치는데 진짜 짝사랑은 얼마나 더 힘들까.

‘하필 지오프리를 좋아하게 된 게 비극일 테지. 하지만 빨리 그 마음을 접는 게 좋아. 그는 진짜 무서운 남자니까.’

전할 수 없는 말을 혼자서 중얼대는데, 라비니아가 큰 소리를 냈다.

“미오도 오리를 좋아하나요? 어릴 때 나는 저 깃털로 만든 드레스가 갖고 싶었답니다.”

그녀의 말에 미오가 자동 반사적으로 헤벌쭉했다.

“오리라면 참 좋아하죠.”

오리의 통통한 뱃살을 보면 침이 주르르 흘렀다.

‘잘 익혀서 한입에 물어뜯으면 행복할 거야.’

“여기쯤이 좋을 것 같네.”

라비니아가 손뼉을 치자 뒤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짐을 들고 온 하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굳이 여기까지 나와서 티타임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을까.’

미오는 넓은 천을 깔고 그 위에 작은 테이블을 설치하는 사람을 보면서 턱을 문질렀다. 이곳은 공작 성에서 마차를 타고 나와야 올 수 있는 곳이었다. 라비니아의 말로는 언덕 위의 풍차를 보는 재미가 있다고 했지만, 미오는 전혀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경치가 무슨 소용이야. 나는 빨리 방으로 돌아가고 싶어.’

눕기만 해도 잠이 솔솔 오는 침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때 머리 위쪽으로 한 무리의 까마귀 떼가 깍깍 소리를 냈다.

‘까마귀는 영 재수가 없는데…….’

팔등에 돋은 소름을 슬쩍 훑어 내리던 미오가 어깨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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