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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34)화 (34/123)

34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1)

감탄을 거듭하던 그녀가 고개를 살랑 흔들었다. 순간 그의 구두 앞코가 미오 앞에서 멈췄다.

“춤추는 것을 좋아하나?”

“……네?”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이었기에 당혹스러웠다. 춤추는 것을 좋아했던가.

빙의 전에 춤을 춘 기억은 없었다.

댄스 가수를 좋아했지만, 항상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았으니까.

‘그러니 춤을 춘 것은 이곳에 와서일 거야.’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함께 춤을 춘 상대의 얼굴은 떠올릴 수 없었다.

‘선택적 기억 상실인가. 중요한 게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아.’

그냥 기분이 좋았던 것 같다. 그의 어깨 너머에 손을 올리고, 한 손을 맞잡고 빙글빙글 도는 것이 좋았다. 음악 소리에 섞인 그의 나지막한 음성을 듣는 것이 행복했다.

“날 이렇게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그게 아니라…….”

지오프리의 눈빛이 오늘따라 매서웠다. 그를 좋아하는 척한 것을 들키면 당장 이곳에서 쫓겨날 것이다. 아직 아무런 대비도 못 했는데, 그럴 수야 없다. 게다가 곧 수많은 후보자가 있는 사냥 대회에 갈 건데.

“그게 아니면 뭐길래 대답을 못 하는 건가.”

서릿발 같은 지오프리의 질문이 이어졌다.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야?’

도무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냉랭한 눈매, 조소를 띤 것 같은 붉은 입술이 그녀를 다그치는 것 같았다.

‘꼭 내가 나쁜 짓이라도 했다는 것처럼 굴잖아.’

이렇게 화가 난 지오프리를 달래는 방법은 모른다.

‘혹시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거야?’

미오가 꽉 쥔 주먹을 허리 옆에 대고 심호흡을 크게 했다.

“사실은 공작님과 춤을 추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물쭈물하던 미오가 큰 소리로 외쳤다. 수치심으로 볼이 화르르 달아올랐고, 차마 그의 눈을 쳐다볼 수 없었다.

건강을 갓 회복한 터라 사무엘과 춘 춤은 몸에 무리를 주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고, 발목부터 허벅지까지 덜덜 떨렸다.

‘당장 방으로 돌아가야 해.’

폭신하고 따뜻한 침대 생각이 간절했다. 그렇게 지오프리의 흙 묻은 구두코만 내려다보기를 한참이었다.

‘이것도 아니었어? 왜 안 가는 거야?’

바닥만 뚫어지게 바라봤더니 목이 부러질 것 같았다. 그때 그가 움직이더니 커다란 나팔이 달린 축음기를 다시 켰다. 마정석의 힘으로 작동하는 기계에서 곧 부드러운 음악이 흘렀다.

‘음악은 또 왜 켠 거지?’

그가 하는 일을 가만 바라보던 미오의 얼굴에 물음표가 끝도 없이 떠올랐다.

“이리 와.”

제자리에 곧게 선 지오프리가 그녀를 향해서 손을 내밀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화가 난 건지, 기분이 좋은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왜 오라는 거지? 설마 춤을 청하는 것은 아닐 텐데…….’

쭈뼛쭈뼛 걸어간 미오가 입술을 살짝 짓이겼다.

가까이 다가섰지만, 그가 내민 손을 잡기는 쉽지 않았다. 아까 사무엘의 손을 잡았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지오프리의 커다란 손을 바라보자 온몸의 솜털 하나하나가 잔뜩 곤두섰다.

‘내가 왜 이렇게 그를 의식하는 거지?’

곧 어렵지 않게 이유를 찾아냈다.

‘아니. 당연한 일인지도 몰라.’

그는 원작에서나 이곳에서나 두려움의 존재였으니까.

“꼭 내가 움직이게 만드는군.”

망설이는 미오를 향해서 그가 주저 없이 다가왔다. 미오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리자, 지오프리는 그녀의 손목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따뜻하다 못해서 뜨거운 그녀의 손에 서늘한 지오프리의 피부가 닿았다.

“내가 지금 춤을 청하는 거야.”

“……왜?”

“이유가 따로 있나?”

‘지오프리는 정말 날 괴롭히는 데 도가 텄어.’

할 수 없이 팔을 뻗어서 그의 어깨에 두르는데, 지오프리의 집요한 시선이 그녀를 따라왔다.

“보기보다 수완이 좋더군.”

미오의 허리를 감싸 안으면서 그가 비릿하게 웃었다.

도대체 무슨 수로 로렌이며 집사, 사무엘까지 구워삶았는지 모른다. 지오프리의 사람 모두 미오의 역성을 들었다. 로렌과 사무엘이야 원래 천성이 그렇다 쳐도 집사의 일은 정말 의외였다. 알프레드를 믿기에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그것이 미오를 신뢰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건 춤이 아니라 고문이 분명했다.

맞잡은 손에서 축축한 땀이 배어나기 시작했고, 허리가 굳어 버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사냥도 잘 못하는 짐승에다 이곳에서는 처음에 잘 걷지도 못했다.

그런데 수완은 무슨 수완일까.

미오의 눈에 의문이 한가득 담기는 것을 확인한 그가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사람을 홀리는 재주 말이야.”

“……네?”

산뜻한 미소까지 곁들인 지오프리는 정말 무서웠다. 그녀는 그제야 지오프리의 무표정에 숨겨진 분노를 온전히 읽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공작 부인이 바람피우는 현장을 급습한 공작의 느낌이야.’

하지만 그는 미오를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말이 되지 않았다.

자기 사람들하고 내가 친하게 지내서 단순히 화가 난 걸까?

“아까 사무엘 님은 말이에요.”

아무래도 이번 일을 제대로 해명하지 않으면 괜히 불똥이 사무엘에게까지 튈 것 같았다. 미오의 말에 지오프리가 건조하게 대꾸했다.

“두 사람 벌써 이름을 부르는 사이인가?”

“……네?”

사무엘 베일의 공식적인 직책은 시종이었지만, 이곳 사람들은 보통 ‘사무엘 님’이나 ‘베일 보좌관’이라는 정식 직위로 불렀다. 그러니 미오가 특별히 실수를 한 것은 아니었다.

‘나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지.’

하지만 미운 것은 미운 것이고, 지오프리의 춤 솜씨는 예상 밖이었다. 책상에 앉아서 서류나 뒤적대고, 검술 연습만 하는 줄 알았는데…….

‘아까 사무엘과는 차원이 달라.’

그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자니 발이 자연스레 노니는 기분이었다. 생경한 음악이 끝나고 새로운 음악이 기계에서 흘러나왔다. 음악이 그녀를 감싸자 알 수 없는 기억이 튀어나왔다.

‘이건 패전 후 우울했던 사람들의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서 만든 곡이라고 해.’

‘너무 아름다워서 그런 배경이 숨어 있는 줄 몰랐는데…….’

기억 저편에서 누군가 그녀를 향해서 미소 지었다.

‘내게는 바로 네가 이런 곡이야.’

‘그게 무슨…….’

‘너는 나를 살게 하니까.’

흡사 고백이나 마찬가지였으나, 그런 말을 들었을 때의 기분이나 표정은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도 못 하는 사이 내가 누군가와 연애라도 했던 건가.’

불쑥 떠오른 기억의 파편은 그녀를 당황하게 했다. 미오는 순간 발이 꼬여서 그대로 몸의 균형을 잃었다.

“어, 어…….”

넘어지기 직전 몸을 허우적대던 미오는 무감한 표정의 지오프리와 눈이 마주쳤다. 차가운 그는 그녀를 잡아 주려는 노력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최소한의 인정도 없는 거야?’

아까 떠올린 부드러운 고백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지오프리 같은 냉혈한은 절대 아닐 것이다.

“정말 못 말리겠군.”

숨을 헐떡대던 미오의 머리 위로 그의 비아냥대는 음성이 닿았다.

‘진짜 싫다.’

붙잡아 주지 않는 지오프리 대신 그녀가 그의 몸통을 덥석 움켜잡았다. 보나 마나 우스꽝스러워 보이겠지만, 넘어지는 것보다 나았다. 하지만 긴박한 순간을 넘기고 나자, 기분이 묘해졌다.

‘내가 그를 안은 것 같잖아.’

볼에 닿은 재킷의 겉감이 부드러웠고, 이마 위로 그의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당장 그에게서 떨어져!’

내면의 목소리가 미오에게 외쳤다.

춤을 추면서부터, 아니 그가 무도회실에 들어오면서부터 그녀의 가슴은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는데, 그의 몸에 직접 닿자 미오의 심장이 팔딱팔딱 뛰었다. 그에게서는 겨울 숲 느낌이 묻어났다. 반질반질 윤이 나게 얼어붙은 호수로부터 불어오는 그런 바람 냄새.

‘너무 좋아.’

그녀는 홀리는 체향에 코를 잔뜩 파묻고 이대로 잠들고 싶었다. 지오프리의 저 붉은 입술을 만져 보고 싶었다. 고개를 들어서 손을 뻗으려고 하던 찰나 그녀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정말 미쳤어.’

잠깐만 다른 생각을 하면 미오의 내면에 똬리를 튼 본능이 위험한 욕망에 입김을 불어 넣었다.

‘미워해야 하는 사람을 두고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미오의 흔들리는 눈을 본 그가 인상을 잔뜩 썼다.

“지금 내 말이 아예 들리지 않는 건가? 아니면 무시하는 척 연기하는 건가?”

“그게 아니라 너무 놀라서―.”

방금 넘어질 뻔했으니 정신이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지오프리는 그를 꽉 안은 미오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그냥 넘어질 걸 그랬어.’

덜덜 떨리는 몸을 세우고 이제 겨우 지오프리의 몸에서 손을 뗐다.

“항상 그런 식으로 남자를 유혹하는지 궁금하군.”

지오프리가 퍼부어 대는 날카로운 말에 볼이 화끈했다.

‘지금 내가 사무엘을 유혹했다는 거야?’

살짝 그런 마음을 먹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전혀 아니었다.

또 평생 솔로였던 그녀에게 유혹이란 단어는 거리가 멀었다.

억울했지만, 속에 있는 말을 전부 할 수는 없었다.

‘지오프리가 내 마음을 의심하기라도 하면 더 낭패야.’

미오는 일그러지는 표정을 간신히 갈무리한 채 상냥하게 입을 뗐다.

“정말 오해세요. 보좌관님이 무도회를 가 보신 적이 없다고 하셔서 상대를 해 드렸을 뿐입니다. 다른 개인적인 감정이 있을 리가 없지 않나요.”

고개를 숙이고 있던 미오가 물기 어린 호박색 눈을 들어서 상대를 그윽하게 바라봤다. 곧 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그녀의 눈이 촉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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