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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33)화 (33/123)

33화 유혹의 기술 (2)

“제 질문이 실례였을까요?”

미오는 상대가 지나치게 당황하자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 그러자 쥐고 있던 서신을 떨어뜨린 사무엘이 말을 더듬었다.

“그런 질문을 갑자기 하시니까 제가 놀라서…….”

그는 여린 볼 안쪽 살을 깨물었다.

여자 친구라니, 그런 단어는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뛰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일을 도왔던 사무엘은 친구를 사귈 여유가 없었다. 그가 아는 여인이라고는 어머니와 라비니아, 이곳에서 만난 로렌이 전부였다.

‘전장에도 오래 나가 있었으니까.’

주인을 따라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장에서 3년을 고생했다. 그렇다고 이성에 관심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환경이 자꾸 그를 수도사의 삶으로 이끌었다.

“아닙니다. 관심을 가져 주셔서 고마운걸요.”

카스피언 제국은 보통 남녀 구분 없이 스물넷이 되기 전에 결혼하는 게 보편적이었다. 훌륭한 가문끼리는 정략혼을 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 그래서 그 나이대의 귀족 자제들은 무도회에 열심히 참석해서 운명의 짝을 찾는 데 여념이 없었다. 미오의 질문에 사무엘은 평소 한 적 없던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결혼 생각을 해 본 적이 없구나.’

또 작위나 재산도 없는 그를 좋다고 해 줄 영애가 있을 리도 없었다.

‘하지만 난 괜찮아. 공작님만 열심히 모시면 그만이니까.’

카스피언 공작의 밑에서 일할 수 있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차남에 불과했던 그가 이곳에서 가진 재능을 인정받았다. 사무엘이 혼자 상념에 빠져 있는데, 미오가 정리를 끝낸 편지를 그에게 건넸다.

“하지만 이렇게 훌륭한 분이니까 좋은 인연이 곧 생길 거예요.”

미오가 작게 덧붙인 말에 귀와 볼, 목이 잔뜩 붉어진 사무엘이 연신 헛기침했다. 참으로 다정한 분인 듯싶어서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 * *

“공작님. 분부하신 서류를 준비해 왔습니다.”

집사가 공작의 책상 위에 서류를 내려 두자, 지오프리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집사는 언제 봐도 빈틈이 없었다.

포마드를 발라서 잔머리 하나 허락하지 않은 반반 가르마, 주름 하나 없는 제복과 윤이 나는 구두는 어릴 때 봤던 그대로였다. 변한 게 있다면 집사의 얼굴에 주름이 제법 늘어났고, 머리가 하얗게 셌다는 점일까.

“알프레드. 부탁했던 일은 처리했다.”

그의 말에 알프레드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끔 두 사람은 누구도 모를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지금도 그런 경우였다. 생전 부탁이라고는 하지 않던 알프레드가 어느 날 그에게 이상한 말을 했다.

‘사냥 대회에는 동행인이 있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사냥 대회 자체가 꺼려지는데 동행인을 구했을 리가 만무했다. 어떻게든 그 자리에 불참할 핑계를 고민해 보기도 했었다. 꼴도 보기 싫은 황제에 황후, 벤을 모두 만날 생각을 하면 머리가 지끈댔다.

‘정해지지 않은 거라면 미오 님을 추천합니다.’

‘……지금 뭐라고 한 거지?’

‘공작님의 동행인으로 가장 적합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냥 대회에는 귀족만 참석할 수 있다는 것을 알프레드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라면 단순한 추천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집사의 추천이라면…….’

알프레드는 일평생 그에게 충직했고, 지오프리는 그런 집사를 무척 아꼈다.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그의 청을 들어준 것은 그런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당장 나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영지 안에 작은 화재가 일어나서 소동이 있단다.

피해 규모를 파악하기 위해서 잠시 나갔다가 온 지오프리의 얼굴은 어두웠다. 황제는 척박하기로 소문난 땅을 그에게 내려 주었다. 거기다 비가 오지 않은 지 오래되어서 그의 영지에는 크고 작은 화재가 잇따랐다.

‘나 혼자 고생하는 거야 상관없지만.’

그의 영지민이 되었다는 이유로 고생하는 이들을 보는 것은 달갑지 않았다. 집사가 가져오는 긴 서류를 보자면 항상 돈이 쪼들렸다. 해결할 방법을 잠시 떠올려 보던 지오프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무기력한 기분은 정말이지 끔찍하군.”

그의 시중을 드는 소년에게 채찍과 장갑을 건네준 지오프리가 층계를 성큼성큼 걸어 올라갔다.

“사무엘!”

사무엘에게 집을 잃은 젊은 부부를 도와줄 방안을 지시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부름에도 집무실 근처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무엘은 어디 있지?”

“사무엘 님이라면 지금 무도회실에 계십니다.”

“무도회실……?”

근무 시간에 난데없이 웬 춤이란 말인가.

의아한 눈을 한 지오프리가 무도회실을 찾았는데, 열린 문틈 사이로 음악이 흘러나왔다. 잔뜩 찌푸린 채 한 발짝 다가서는데, 울먹이는 사무엘의 음성이 들렸다.

“이런 건 처음이라서요.”

“괜찮아요.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으니까요.”

묘한 대화를 전해 들은 지오프리가 놀란 표정을 감추었다.

‘내가 사무엘에게 너무 무심했었나.’

성년이 지난 지 한참이었는데 사무엘에게 매일 일만 시켰던 게 생각났다. 그가 여인에게 별 관심이 없었기에 사무엘의 연애에도 통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무래도 모르는 척해 주는 편이 낫겠군.’

일이라면 조금 있다가 지시해도 될 것이다. 지오프리가 막 등을 돌리려는데 사무엘이 숨을 크게 들이켜더니 헐떡댔다.

“헉헉.”

“허리는 괜찮아요?”

두 사람의 묘한 대화에 지오프리가 가던 걸음을 멈췄다.

‘이건 그 여자의 목소리잖아.’

사무엘의 연애를 방해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 상대가 영 마땅찮았다.

‘나를 그렇게 유혹하려 들더니 이제 사무엘에게까지 마수를 뻗는 건가.’

지오프리는 그의 등을 부둥켜안고 사랑을 속삭이던 미오를 떠올리면서 잔뜩 인상을 썼다. 순진한 사무엘이라면 그녀의 노골적인 애정 공세에 버텨 내지 못할 게 분명했다.

화가 난 지오프리가 무도회실의 문을 걷어찼다. 확 열어젖혀진 문 너머로 부둥켜안은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뭐 하는 거지?”

지오프리의 서늘한 음성이 열기로 가득 찬 무도회실의 공기를 단숨에 얼렸다.

그의 등장에 미오와 사무엘은 놀란 얼굴을 했다.

뭔가 잘못한 일이 없는데 크게 잘못한 기분이 들었다.

“……공작님.”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을 한 지오프리는 꼭 검을 휘두를 것처럼 살벌했다.

‘진짜 눈빛으로 살인이 가능할 것 같아.’

지오프리의 기세에 놀란 미오가 얼른 사무엘의 손부터 놓았다. 그러자 샤무엘은 축음기부터 껐다. 아름다운 음악마저 사라진 무도회실에 살벌한 적막감이 감돌았다.

“공작님.”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온 지오프리가 두 사람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매섭게 훑었다. 옷을 제대로 갖추어 입고 있었지만, 미오는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 정도였다.

‘이건 흡사 바람피우다 걸린 공작 부인이 된 기분인데?’

분명 지오프리가 화가 난 것 같은데,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미오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사무엘이 먼저 입을 뗐다.

“죄송합니다. 분부하신 일을 마친 후에―.”

“일을 마쳤는데, 웬 춤이지.”

사무엘은 일을 마쳤다고 술이나 도박 따위의 여흥을 즐기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춤이라니 정말이지 예상 밖이었다. 공작의 추궁에 사무엘의 음성이 기어들어 갔다.

“제가 미오 님의 도움을 조금 받았는데요.”

“……어떤 도움 말이지?”

“그게, 그게 말입니다.”

지오프리의 날 선 질문에 사무엘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보다 못한 미오가 사무엘의 앞에 나섰다.

“전부 제 책임이에요. 제가 춤추자고 졸랐어요.”

공작이 왜 화가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은 모두 그녀 탓이다.

사무엘과 대화를 나누던 미오는 그를 유혹하는 계획은 포기했다. 그는 귀족이며 예의가 바르고, 잘생긴 괜찮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심장이 전혀 떨리지 않아.’

수줍게 웃는 모습이 귀엽기만 했지, 전혀 남자로 의식되지 않았다. 아무리 연애 경험이 없어도 동생 같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아예 사무엘의 연애를 돕기로 했다.

‘네? 무도회에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다고요?’

카스피언 제국은 음악과 미술, 춤을 사랑했다. 그래서 일 년 내내 무도회가 끊이질 않는다고 했다. 흥청망청 탕진하는 귀족의 이야기가 책을 읽는 내내 나왔었다.

여우 수인에 가진 게 없는 그녀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지만, 사무엘은 다르지 않나.

‘왠지 보살펴 주고 싶은 사람이야.’

여기 사람들에게 정을 주지 않겠다는 처음의 계획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춤을 권한 것이었다.

‘대화도 잘 통하고 괜찮은 사람을 만나 보는 게 어때요.’

‘하지만 저는…….’

소맷단만 매만지던 사무엘의 얼굴이 달아올라서 터질 것 같았다.

‘무도회에 가서 친구를 사귀는 것 같던데, 춤을 춰 본 적은 있나요?’

‘춤이라면 어린 시절에 조금…….’

‘일도 다 끝났는데, 우리 왈츠 연습을 해 봐요!’

그래서 무도회실에 오게 된 것이다. 다른 춤이라면 몰라도 왈츠라면 그녀도 배운 적이 있었다. 언제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음악이 흐르면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당신이 춤추자고 졸랐다는 건가?”

미오의 항변에 지오프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잔뜩 겁을 집어먹은 사무엘을 향해서 나갈 것을 명했다.

“집사에게 가서 할 일을 듣도록 해. 지금 한가하게 춤 연습을 할 때는 아니니까 말이야.”

“분부 받잡겠습니다.”

사무엘은 허둥지둥 나가면서 홀로 남은 미오를 향해서 멋쩍은 미소를 건넸다. 잠시 후 무도회실은 지오프리의 구두가 내는 소리가 울렸다.

‘왜 같이 안 가고 나한테 오는 거지.’

가까이 다가오는 지오프리를 살피던 미오가 침을 꿀꺽 삼켰다.

‘흐트러진 미남이라니…….’

평소 반듯하기만 한 그의 차림이 지금 왠지 허술했다. 소매에는 검은 재가, 구두에는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다. 약간 느슨해진 차림이 그의 미모에 야릇한 매력을 더해 주었다.

‘역시 마성의 지오프리야.’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그의 미모에 미오가 홀로 중얼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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