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유혹의 기술 (1)
미오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결심한 것이 있었다.
지오프리를 비롯하여 카스피언가의 누구와도 친해지지 않으리라고.
그녀는 지오프리를 유혹해서 무너뜨리는 게 목표지, 친구를 사귀러 온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예상과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로렌은 꼭 이모 같아.’
가져 본 적은 없지만, 있었다면 꼭 그랬을 것이다.
‘날 언제 봤다고 저렇게 예뻐하는 거야.’
처음에는 로렌의 관심에 삐딱한 시선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녀의 넉넉한 인심에 사로잡혔다. 말랐다고 내내 잔소리를 하면서도 미오에게 온갖 몸에 좋은 약을 챙겨 주었다. 로렌은 지오프리와 그녀를 무리하게 엮으려고 하는 것 빼고는 다 좋았다.
두 번째로 친해진 사람은 집사였다.
‘그와는 가까워질 일이 전혀 없을 줄 알았지.’
집사는 나이가 지긋한 노년 신사로 종일 회중시계를 들여다보는 게 일이었다. 그만큼 바쁘게 움직여서 어딘가에 앉아서 쉬는 것을 볼 수 없었다.
“집사님! 이것 보세요!”
미오가 서재의 문을 세차게 열어젖히고 들어서자 넓은 탁자에 앉아 있던 그가 가벼이 웃었다.
“몸도 덜 나았는데 또 다치면 어쩌려고요.”
“헉헉. 이것 좀 보시라니까요.”
숨을 바삐 고르던 미오가 탁자에 종이 하나를 내려 두자 집사가 그것을 유심히 살폈다.
“그것 보세요. 제가 공작님이 미오 아가씨의 청을 들어줄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전혀 짐작을 못 했거든요.”
귀족 증명서를 받고 사냥 대회에 함께 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그녀는 집사를 찾았다.
“주인님은 관대하신 분이랍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상하긴 해요.”
미오는 지오프리가 왜 이런 수고를 하면서까지 사냥 대회에 저를 데려가려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봐도 그 얼굴에서 호의가 느껴지진 않는단 말이야.’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대자 집사가 턱을 매만지면서 입을 뗐다.
“끝이 좋으면 모두 좋은 거라고 했습니다.”
“그렇겠죠?”
전혀 섞이지 못할 두 사람이 처음 대화를 나눈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어느 날 집사가 정리하다 두고 간 회계 서류를 미오가 대신 정리했고, 그 일이 두어 번 더 반복되었다.
‘이걸 당신이 푼 겁니까?’
완고한 인상의 노신사가 따져 묻자 미오는 당황스러웠다. 풀고 싶어서 푼 것은 아니었다. 그냥 자동 반사적으로 미완의 수식을 완성했을 뿐이다. 곱셈부터 시작해서 실생활에 전혀 쓰이지도 않는 미분과 적분을 공부한 결과였다.
‘아, 죄송해요. 여기에 있길래 제가 마음대로 풀었네요.’
답을 구한 것과는 별개로 남의 것에 함부로 손을 댄 것은 실례가 분명했다. 미오의 사과에 집사는 종이와 그녀의 얼굴을 여러 번 번갈아 보았다.
‘어째서 이리 어려운 것을 다룰 수 있습니까.’
귀족도 아닌 여인이 수학을 안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다. 원래 회계를 보던 청년 하나가 지병으로 고향으로 내려갔다. 새로운 이를 구해야 했지만, 넉넉하지 않은 재정상 그것은 쉽지 않았다. 그 바람에 회계사가 하던 업무를 그가 잠시 맡고 있었는데, 머리가 지끈댔다. 그런데 어느 날 잠시 서류를 두고 일을 보고 왔는데, 어려운 부분이 막힘없이 풀려 있는 게 아닌가.
‘누가 이걸 풀었지?’
의심 가는 이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무엘이나 공작님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이것을 풀고 있는 미오를 직접 목격하게 된 것이다. 미오는 로렌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로렌의 천성을 잘 아는 그는 그녀의 말을 그대로 믿기 어려웠다.
‘우리 공작님의 꽁꽁 언 마음을 녹여 줄 유일한 분이라니까요.’
늘 중립적인 태도를 고수하던 집사는 미오를 둘러싼 질 나쁜 소문에도 귀를 기울였다. 문란한 성생활을 즐기던 여인인데, 공작님을 유혹해서 한밑천 얻으려고 연기를 한다는 것이었다. 아픈 것도 일부러 꾸며 낸 거라는 의심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속단하기는 이르다.’
지오프리 카스피언은 지켜야 할 소중한 주인이었으므로 신중해서 나쁠 게 없었다. 하지만 수식을 어렵지 않게 풀어내는 미오를 본 순간 그는 중립이 아니라 치우친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아름다운 용모의 여인이라 이름도 쓰지 못할 줄 알았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어 보자 미오의 지식이 여간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영양실조를 꾸며 낼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 정도 거짓을 분별해 낼 나이는 되었지.’
그 이후로 두 사람은 종종 이곳에서 만났다. 그는 복잡한 수식을 내밀었고, 미오는 소일거리가 생겼다면서 반겼다.
‘그거 아세요? 우리 뇌는 쓰지 않으면 굳는다고 해요. 덕분에 저는 치매 예방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치매가 뭔가요?’
두 사람의 대화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러다 미오가 사냥 대회에 무척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기에는 무엇 하러 가고 싶은 거죠?’
‘그냥 공작님의 옆에 있고 싶은 거예요.’
로렌의 말처럼 그녀는 공작을 짝사랑하는 여인이었다. 드레스 하나 맞춰 달라는 부탁도 하지 않을 만큼 검소했다.
‘내 일을 도와주면서도 뭐 하나 요구하지도 않았지.’
집사는 착한 미오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다.
“그렇게 좋은 겁니까? 네?”
주름이 자글자글한 집사의 얼굴에 미소가 살며시 번졌다. 상대가 저리 기뻐하는 것을 보자 왠지 기분이 좋았다.
“그, 그럼요.”
미오는 서류를 가만 보다 어색하게 웃었다. 차가워 보이지만 알고 보면 마음씨 좋은 집사를 속이는 것 같아서 조금 불편했다. 하지만 모두가 거짓은 아니었다.
‘기분은 좋아.’
귀족이 잔뜩 모인다는 사냥터에 가면 그녀의 인연을 꼭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로운 인생, 새로운 인연, 새로운 출발!’
모처럼 미오의 얼굴에 희망이라는 감정이 드리웠다.
* * *
사냥 대회에 가게 되었지만,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남은 몇 가지 문제가 미오를 괴롭혔다.
“아!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면서 미오가 인상을 썼다.
라니비아가 지오프리 옆을 차지해서 의기양양하게 구는 꼴도 보기 싫었고,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마음으로 충동적으로 결정한 일이었는데…….
“따져 보면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야.”
일단 갑자기 여우로 변하는 일에 대비해야 했다. 하기 싫어도 미리 지오프리와 입술을 비비거나 아니면 다른…….
“아, 싫다. 싫어.”
나한테 이렇게나 반해 있냐면서 우쭐해 할 지오프리의 거만한 눈빛을 떠올리자 낮에 먹었던 라자냐가 올라올 것 같았다.
“아니야. 이건 어디까지나 생존을 위한 일이니까.”
차가워진 호박색 눈이 옷장 앞에 달린 거울에 닿았다. 아무리 봐도 제법 예쁘게 생긴 얼굴이었다.
“묘하게 닮았어.”
머리카락 색도 눈 색도 이목구비 하나 닮은 곳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습은 원래 그녀를 떠올리게 했다.
“그런데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그다음은?”
그녀는 이제껏 연애해 본 적이 없었다.
어릴 때 좋아하는 남자아이는 많았다. 달리기를 잘하는 선배를 동경하기도 했고, 매력적인 음색을 지닌 가수의 노래를 반복해서 듣기도 했다.
“문제는 그게 전부 짝사랑이란 거야.”
다른 아이들처럼 남자 친구와 주말에 만나서 시간을 보내는 일은 없었다. 학원비와 교제비, 월세를 벌기 위해서는 눈코 뜰 새 없이 일해야 했으니까. 그녀가 알고 있는 남자는 드라마나 책 속에서 본 게 다였다.
“이런 내가 낯선 남자와 가까워질 수 있을까?”
허공에 던진 질문에 미오의 얼굴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경험 부족인지, 능력 부족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없었다. 당장 지오프리 하나도 어쩌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지.”
상대의 체취를 맡아 보고 이왕이면 손을 잡거나 옷으로 가려지지 않은 피부를 만져 보는 게 정확했다.
‘인연을 만나게 되면 단숨에 느낌이 온다고 했어.’
순간 재수 없는 까마귀의 말이 떠올랐다.
‘바보 아니야? 각인은 평생에 한 번, 한 사람에게만 하는 거야. 그건 네가 싫다고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깍깍.’
‘나는 지오프리를 거부하고 새로운 각인 대상을 찾을 거야!’
‘바보 여우! 이 숲에 너보다 멍청한 녀석은 없을 거야. 깍깍.’
‘오늘이야말로 기필코 너를 간식으로 먹어 주지.’
미오가 그녀를 한껏 비웃던 까마귀를 향해서 거칠게 덤벼들었었다.
푸드덕.
하지만 하늘로 날아오른 까마귀를 잡는 데는 실패했다. 잠시 상념에 젖어 있던 미오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까마귀는 늘 헛소리만 했었으니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왠지 예감도 좋아.”
숱한 죽음을 반복하면서 지오프리가 그녀의 앞에 먼저 나타난 것은 처음이었고, 또 그녀가 공작 성에 온 것도 처음이니까. 거울 앞에서 이렇게 저렇게 옷맵시를 만져 보던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 하라고 했지.”
거울 앞에서 한탄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곧장 미오가 찾은 곳은 공작의 집무실 옆에 마련된 작은 응접실이었다.
‘저기 있네.’
살금살금 걸어서 그녀가 찾은 사람은 바로 하늘색 단발의 사무엘이었다. 그는 그녀가 생각해 둔 새로운 인연의 유력한 후보이기도 했다. 서신 뭉치를 이리저리 뒤적거리는 옆모습이 참 귀여웠다.
「사무엘 베일 ― 베일 자작가의 차남. 착하고 온화함. 훈훈한 외모를 지니고 있으며 나를 좋아하는 것 같음. 재산 유무 알 수 없음.」
그의 정보를 다시 정리해 본 미오가 살며시 사무엘 앞에 섰다.
“좀 도와드릴까요?”
“안, 안녕하세요. 미오 님.”
서신에 집중하느라 그녀를 늦게 알아챈 사무엘의 볼이 온통 붉어졌다. 그는 미오를 보기만 해도 이렇게 수줍어했다.
‘좋았어. 이게 정상적인 반응인 거지.’
그녀의 미모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지오프리는 어딘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서신을 분류하는 건가요?”
얼핏 보자니 황실에서 온 것과 무도회 초대장, 변방에서 날아온 서신이 주를 이루었다. 사무엘이 답하기 전에 그의 건너편에 앉은 미오가 천천히 서신을 한 묶음 집어 들었다.
“저도 같이해요!”
“미오 님이 제 일을 도와주신 걸 알면 공작님이 저를 혼내실 겁니다.”
“괜찮을 거예요. 게다가 이렇게 신세만 지는 것도 그렇잖아요. 게다가 제가 심심해서 하는 일인걸요.”
“하지만…….”
울먹대는 사무엘의 얼굴을 바라보던 미오의 눈이 곱게 휘었다.
‘어쩜 머리가 저렇게 상큼한 하늘색일까.’
게다가 그의 눈은 초록빛이 감도는 푸른색이었다. 그래서 그를 가만 바라보고 있노라면 꼭 하늘을 보는 것 같았다.
“저기, 사무엘은 여자 친구 있어요?”
미오의 달콤한 음성에 화들짝 놀란 사무엘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