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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31)화 (31/123)

31화 마녀가 아닌데요

“마녀라니…….”

그의 말이 너무 황당해서 미오는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그러니까 불면증이 심한 그가 푹 잠든 것을 그녀가 부린 마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혼자 잠들어 놓고 왜 애먼 사람을 붙들고 늘어지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니까…….’

그녀가 마법을 부릴 줄 알았다면, 이런 생고생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거기다 하필이면 마녀라니!

누가 들을까 봐 겁이 났다.

제국에선 수인만큼 경멸받는 존재가 마녀였다.

‘마녀는 어린아이를 잡아먹는 데다 우물에 독을 푼다지, 뭐야. 그러니까 보이는 족족 전부 잡아서 죽어야 해.’

언제부터 그런 소문이 퍼졌는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철석같이 믿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근래에는 마녀의 씨가 말랐다. 그녀가 여우 수인인 것을 들키는 것도 문제지만, 마녀로 몰리는 것도 곤란했다.

“공작님. 저는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 줄 몰라요. 보름달이 뜬 밤에 괴상한 축제를 열지도 않고요.”

“그럼 지금 이 일을 무슨 수로 설명할 거지?”

그의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지오프리의 날카로운 콧날이 그녀의 볼에 닿을 것만 같았다. 추궁하는 사람치고 퍽 부드러운 음성에 미오는 당황스러웠다.

‘왜 이렇게 사람 헷갈리게 하는 거야.’

아마 누군가의 눈에는 꼭 껴안고 입맞춤을 나누는 연인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의 억센 손이 미오의 허리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의 손아귀에 사로잡힌 미오가 숨을 헐떡거렸다.

“제가 한번 잠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르는 편이라서요. 정말 모르는 일이에요.”

입술을 짓이긴 채 고개를 쳐든 미오가 맹렬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다. 서러운 나머지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울고 싶지 않은데…….’

지오프리 앞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인정하는 것 같잖아.’

정말 이번 일만큼은 미오는 결백했다. 각인 때문에 발작을 일으킨 것은 맞지만, 문을 잠그고 제법 대비를 철저하게 했다. 그녀에게 다가온 것은 지오프리였다.

“울면 뭐가 해결될 것 같나?”

울상이 된 미오를 향해서 그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정말 미치겠군.’

도무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마주한 것 같았다. 저 여인에게 대체 무슨 신비로운 힘이 있길래 불면증인 그가 잠이 든 건지. 그 비밀을 반드시 알아내야 했다.

하지만 미오가 우는 모습을 보는 것은 질색이었다.

‘꼭 내가 울린 것 같잖아.’

지오프리가 볼까 봐 항상 몰래 구석에 숨어서 울곤 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라서 가슴이 먹먹했다. 마냥 행복하던 시절은 정말 짧았다. 밝은 봄 햇살 같던 어머니의 얼굴은 순식간에 그늘졌다.

‘우리 지오프리, 카스피언의 황태자.’

그를 꼭 안아 주던 어머니의 음성은 지금 미오처럼 한없이 떨렸다. 어린 시절 지오프리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적당히 다정했다.

‘아버지처럼 훌륭한 황제가 되고 싶어요!’

한 살 차이가 나는 이복동생의 등장 전에는 그런 말을 하던 때도 있었다. 카트리나와 벤이 당당히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어머니는 뿌리가 썩어 버린 꽃처럼 말라 갔다.

‘지오프리. 못난 어미가 너를 지킬 힘이 없구나.’

어머니는 하루가 다르게 병세가 악화됐으나 항상 그의 미래를 염려했다. 그녀는 지오프리에게 숨겨진 비밀을 끝까지 감추기를 원했다.

‘아들아, 행복한 삶은 멀리 있지 않단다. 가장 평범한 것이 때로는 가장 값진 거란다.’

어머니는 지오프리의 평범한 삶을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했다.

‘너를 아껴 주는 사람을 만나서 웃으면서 사는 거야.’

어머니가 하는 말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진심 어린 어머니의 말은 그의 가슴에 문신처럼 새겨졌다.

그때 굵은 눈물이 미오의 고운 볼을 타고 도르르 흘러내렸다.

흑흑.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그의 얼굴을 올곧게 응시하면서도 턱을 덜덜 떨었다. 세차게 깨문 입술이 터져서 피가 살짝 맺혔다.

“그만 울어.”

보다 못한 지오프리가 허리를 감았던 손을 풀어서 미오의 턱을 세게 움켜잡았다. 입술을 타고 한 줄기 피가 흘렀다. 창백한 피부 위를 흐르는 피는 유독 붉었다.

화들짝 놀라 손을 뗀 그가 마른세수를 거칠게 했다.

‘애처롭다니……. 이런 감정을 품는 꼴이 우습군.’

두 사람 사이에 기이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미오가 손으로 피를 훔쳐 내는데 지오프리가 다시 입을 뗐다.

“마녀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수상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변함없다.”

그게 아니고서는 그의 지독한 불면증이 그렇게 쉽게 치료될 리가 없었다.

“내가 항상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해.”

할 말을 마친 지오프리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갑작스레 그에게서 풀려난 미오의 몸이 바람에 나부끼는 낙엽처럼 흔들렸다.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니 오늘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람.’

한참 붙잡혀 있던 허리가 화끈거려서 손으로 주물럭댔다.

‘진짜 대단해. 이런 환한 낮에도 서슴지 않고 협박하다니 정말 놀라워.’

굳이 이 연못가까지 끌고 와서 말이다.

고개를 숙인 채 지오프리를 향해서 끝없이 욕을 해 댔다.

‘나쁜 놈! 반드시 나중에 내 앞에서 울게 할 거야.’

그때 지오프리가 품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서 내밀었다.

“이게 뭐죠.”

곱지 않은 음성이 그녀의 입술을 타고 흘렀다.

‘지금 이 종이가 땅문서라고 해도 기분이 풀릴 것 같지 않거든?’

새침한 얼굴을 한 미오가 그것을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귀족 증명서?”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아주 비싸 보이는 종이에 미오의 이름이 아주 멋들어지게 적혀 있었다.

“우르체카 공국 출신, 미오 라고푸스 우르체카.”

너무나 낯설고 긴 이름을 중얼대는데 소름이 끼쳤다. 우르체카 공국은 어디지?

그녀가 눈을 끔뻑대자 지오프리가 느긋하게 대꾸했다.

“사냥 대회는 귀족만 참석할 수 있거든.”

“아. 그렇구나.”

서류를 쥔 미오의 얼굴이 갓 짜낸 석류즙처럼 붉은 물이 들었다.

‘지오프리가 나를 위해서 이런 걸 만들어 온 거야?’

귀족 서류를 만드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꽤 까다로운 작업이라고 들었다.

‘역시 아닌 척하지만, 나한테 단단히 빠진 걸까.’

하지만 헛다리를 너무 자주 짚은 탓에 이번에는 신중해지기로 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요.”

얄미운 라비니아 대신 그녀가 지오프리 곁에 서고 싶기는 했지만…….

그녀가 우물대자, 지오프리가 냉랭하게 입을 뗐다.

“착각이 심하군. 이건 네 부탁 때문이 아니다.”

어쩐지 기분이 상한 지오프리가 곧장 등을 돌렸다. 구겨진 깃을 매만지는 그는 뒤에서 피식피식 웃어 대는 미오를 애써 외면했다.

‘간밤의 일을 따지려고 했는데…….’

눈물을 보이니까 뭐라고 더 추궁하기가 어려웠다.

‘전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만 해 대니까 말이야.’

그녀가 했던 행동을 구체적으로 따져 묻기도 내키지 않았다.

“공작님! 우르체카 공국이 어디죠? 저는 여행을 해 본 적이 별로 없어서 그곳이 어디인지 잘 모르겠어요.”

아까까지 기절이라도 할 것처럼 슬픔에 잠겨 있던 여인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비처럼 팔랑대는 미오가 지오프리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럼 저도 귀족이에요?”

“정말 성가시군.”

귓가의 파리를 쫓아내는 것처럼 손을 휘젓는 지오프리의 입꼬리가 묘하게 삐뚤어져 있었다.

* * *

우당탕탕.

복도를 지나는데 울리는 커다란 소리에 미오는 얼른 주방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프라이팬을 든 주방장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반드시 잡고 말 테다!”

“무슨 일이죠?”

몸집이 큰 주방장은 우락부락한 인상과 달리 퍽 마음이 푸근한 이였다. 그는 미오가 너무 말랐다면서 따로 간식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아니, 글쎄! 제 소중한 주방에 쥐새끼가 한 마리가 들어왔지 뭡니까.”

며칠 전부터 재료나 요리가 자꾸 없어져서 속상하다는 그의 말에 미오는 유감을 표했다.

“이 쥐새끼를 찾으면 꼬리를 쥔 채 곧장 난로로 던져 버릴 겁니다.”

활활 타오르는 화덕을 바라보면서 다짐하는 그의 눈동자가 이글댔다.

“주방이 엉망이 되었네요.”

단단히 화가 났는지 주방장이 구석구석 들춰 보는 바람에 바닥에 감자와 당근이 나뒹굴었다. 몸을 숙인 채 감자를 하나 주워서 담는데 선반 유리병 사이로 노란 눈이 반짝였다.

‘풍성한 꼬리를 보니까 다람쥐인가? 케이에게 잡히면 정말 큰일 날 것 같은데…….’

케이에게는 쥐와 다람쥐가 크게 차이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미오는 어쩐지 작은 짐승이 가여웠다.

주방을 어지럽힌 것은 잘못이지만, 굶주림을 참다 못해서 그랬을 것이다.

정신을 집중한 그녀가 다람쥐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여기에서 당장 나가지 않으면 큰일 날 거야.’

그녀의 말에 유리병 뒤의 작은 귀가 움찔댔다. 미오는 다람쥐가 그녀의 말을 알아듣는다고 확신한 후 얼른 입을 뗐다.

“저기 밀가루 포대 자루가 있는 곳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 것 같아요.”

다람쥐가 있는 곳과 먼 곳을 가리키자 주방장이 황소처럼 그곳으로 돌격했다. 주방장이 움직이는 것을 본 미오가 얼른 창을 열었다.

‘지금이야! 얼른!’

미오가 다람쥐에게 신호를 보내자 작은 짐승은 쪼르르 아래로 내려와서 열린 창을 향했다. 하지만 몸집이 너무 작아서 높은 창으로 올라가지를 못했다.

‘나를 타고 가.’

얼른 미오가 창을 등지고 서자, 다람쥐가 재빨리 그녀의 드레스를 타고 올라갔다.

“아가씨. 여기는 아무것도 없는데요?”

여전히 프라이팬을 붕붕 휘두르고 있던 케이가 실망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 그런가요?”

“그나저나 감자는 왜 쥐고 계시죠?”

케이는 양손에 감자를 쥔 미오를 보면서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아, 맛있어 보여서요.”

그녀의 말에 화색을 띤 케이는 냄비를 내려뒀다.

“그렇다면 오늘은 으깬 감자를 곁들인 스테이크를 준비해야겠습니다.”

“진짜 기대되는데요.”

쥐를 잡던 중인 걸 잊은 건지 케이는 갑자기 요리 준비로 분주해졌다.

몸을 살짝 돌린 미오는 금세 나무를 타고 올라간 다람쥐의 풍성한 꼬리를 볼 수 있었다.

“……다행이다.”

주방장도 다람쥐도 모두 만족할 만한 결과를 맞이했으니까.

‘이만하면 나도 그렇게 쓸모가 없는 존재는 아닌가.’

창틀에 기댄 미오가 바람에 가만 턱을 내밀어 보았다. 바람이 달고 부드러운 평범한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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