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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30)화 (30/123)

30화 낭만적인 산책이 있는 오후 (2)

지오프리는 미오가 마치 앙겔라스와 교감이라도 하는 것처럼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에서 고개를 돌렸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다른 예상을 했었다.

‘분명 미오가 겁을 집어먹고 내게 매달릴 줄만 알았지.’

또 어제의 일로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미오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밥만 잘 먹는 게 아닌가.

‘얄밉다고 해야 하나?’

지오프리의 새카만 눈동자 위로 묘한 기운이 비꼈다.

‘감히 내 몸에 상처를 내고도 모른 척하겠다?’

상대는 예상보다 더 뻔뻔한 데다 수상한 구석이 있었다. 이제 아예 앙겔라스가 배를 내놓으면서 곤봉이 달린 꼬리를 흔들자, 그는 인상을 팍 썼다.

‘저런 모습이나 보려고 이곳에 온 건 아니다.’

고용인 누구도 오지 않으려 해서 가끔 먹이를 챙겨 주는 건 그의 몫이었는데…….

‘나한테도 저리 애교를 떨지 않던 녀석인데 말이야.’

미오는 언제 겁을 먹었냐는 듯 깔깔 웃기 시작했다. 둘의 사이가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지오프리의 얼굴은 침울해졌다.

그는 옆에 있던 먹이가 담긴 통을 발로 걷어찬 후 입을 뗐다.

“미오! 이쪽으로.”

지오프리는 그녀를 기다리지도 않고 그대로 후원을 빠져나왔다.

지오프리의 뒤를 쫓아가던 미오가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가 사라지는 게 아쉬운지 짐승이 드레스 끝을 물고 늘어졌다.

‘다시 놀러 올게!’

그렇게 말하자 겨우 그녀를 놓아주었다. 잔뜩 먹어서 저녁을 굶어도 될 줄 알았는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벌써 소화가 다 된 것 같아. 그래도 이제 방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지오프리와 헤어질 생각에 아까보다 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뭐야! 산책이 끝난 게 아니야?’

건물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꺾는 지오프리를 보면서 그녀가 말없이 비명을 질렀다.

‘지오프리! 멈춰!’

정원을 가로지르는 지오프리는 뒤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를 따라잡으려면 거의 뛰듯이 걸어야 했다.

헉헉.

슬슬 지친 그녀가 주변 풍경을 돌아봤다가 깜짝 놀랐다.

‘하필 왜 여기지?’

지오프리가 그녀를 이끄는 곳은 나름의 추억이 있는 호숫가였다.

‘아름다운 추억이 아닌 게 문제지만…….’

반짝대는 햇살이 비치는 호수는 그 밤처럼 괴기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밤의 기억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미오는 이마에 붙은 작은 반창고를 매만졌다.

‘그 밤의 지오프리는 무서웠다고…….’

그러다 앞에 있는 단단한 벽에 코를 박았다.

“앗.”

지오프리가 갑자기 멈춰 서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었다. 미오가 손으로 코를 문지르면서 우뚝 선 그의 등을 잔뜩 노려봤다.

“이쯤이면 아무도 우리를 못 보겠지.”

“네……?”

커다란 나무 뒤쪽이라서 호수 건너편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들을 보기 힘든 위치였다.

‘왜, 왜 은밀한 곳을 찾는 거지?’

하필 호숫가 근처에서 그런 말을 해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기에는 우리밖에 없다는 말이야.”

“아니…….”

그건 아까 후원에서도 그랬다고 말하려던 미오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햇살을 등졌는데도 지오프리의 얼굴은 빛으로 물들었다. 서늘한 눈매와 촉촉하게 젖은 붉은 입술, 새하얀 셔츠에 어울리는 감색 바지가 그의 외모를 더욱더 돋보이게 했다.

‘그만 쳐다봐야 해.’

두근대는 가슴께를 꽉 움켜잡은 그녀가 얼른 고개를 숙이려는데, 지오프리의 손이 더 빨랐다. 그의 손이 흐트러진 미오의 은발 타래를 부드러이 끌어 잡았다.

‘뭘, 뭘 하려는 거지.’

설렘과 두려움이 한데로 뒤엉켜서 그녀는 그만 눈을 꼭 감아 버렸다.

“……음.”

아까까지 그렇게 노골적으로 그를 볼 때는 언제고…….

지오프리는 소라게처럼 숨어 버린 미오를 보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제야 그의 손가락에 감긴 미오의 은발을 의식했다.

‘나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반짝대는 그녀의 머리카락은 솜털처럼 부드러웠다. 지오프리는 바람에 섞인 익숙한 향기에 어젯밤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지오프리, 네가 너무 미워.’

미오는 연신 그가 밉다면서 지오프리의 품을 지독하게 파고들었다. 그가 머뭇대는데, 미오가 고개를 들었다.

‘남의 머리카락을 붙들고 뭐 하는 거야.’

지오프리의 까만 눈에 어린 것은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이었다.

‘……설마.’

그녀를 해칠까 봐 잔뜩 겁을 집어먹었는데, 지금 그의 얼굴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치 사랑에라도 빠진 것 같았다.

‘이대로 입맞춤이라도 하려는 거야?’

한 손으로 입술을 틀어막은 그녀가 그를 저지했다. 지오프리를 유혹해서 먼저 차 버리겠다는 계획에는 변함이 없었다.

‘다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그녀가 한발 물러서자, 지오프리의 커다란 손이 미오의 허리를 꽉 틀어잡았다.

“공작님, 이건 너무 빠―.”

지오프리에게 완전히 사로잡힌 꼴이 된 미오의 음성이 한없이 떨렸다. 그는 한 손으로 여전히 그녀의 머리카락을 쥐고 있었고, 허리까지 안았다. 이제 두 사람 사이에는 종이 한 장이 간신히 들어갈 여유만 남아 있었다. 서로의 숨소리를 공유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

“인제 와서 빠르다?”

미오의 은발에 입술을 대려고 시늉하던 그가 싱긋 웃었다. 간밤에 그를 못 가게 붙잡았던 미오가 할 말은 절대 아니었다. 그녀의 입술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고, 손길은 거침없었으니까.

“날 그만 괴롭히고, 할 말이 있으면 그냥 해요!”

눈물이 글썽해진 미오가 그의 손길에서 벗어나려고 몸에 힘을 주었다. 지오프리의 서늘한 눈이 그녀를 훑더니 머리카락을 잡았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순식간에 은발이 그의 어깨 근처에서 나풀댔다. 머리카락의 움직임이 잦아들 때쯤 냉랭한 음성이 흘렀다.

“어제 나한테 했던 말과 행동에 대해서 변명해 봐.”

드디어 걱정했던 순간이 찾아왔다.

침을 꿀꺽 삼킨 미오가 눈에 힘을 주었다.

살아남으려면 절대 모르는 척해야 한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저는 그냥 평소처럼 잤고, 오늘 늦잠을 잔 것밖에 없는데요.”

아예 지오프리와 간밤에 함께 있었던 것을 부정하기로 했다. 그녀의 말에 지오프리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오리발을 내미시겠다? 어제 그 난리를 피우는 것을 본 사람이 수두룩한데?”

“……아.”

그 생각까지는 미처 못 했던 미오의 눈이 떨렸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로렌은 분명히 지오프리와 그녀를 본 것 같았다.

‘우리 주인님 닮은 아기는 얼마나 귀여울까요?’

늦게 일어난 미오를 챙겨 주면서 그런 말을 불쑥 건넨 것이었다. 로렌의 말에 등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었다.

‘그래도 나는 모르는 일인 거야.’

“제가 몽유병이 있어서 말이에요.”

그녀가 배시시 웃으면서 상황을 모면하려고 하자, 지오프리의 음성이 더욱 험악해졌다.

“자꾸 헛소리하면…….”

그가 슬쩍 연못을 돌아보자 미오가 두 손을 세차게 흔들었다.

“저, 저는 진짜 수상한 사람이 아니에요.”

“수상한 사람이 아니다……?”

미오의 말을 따라 읊던 그의 반듯한 이마가 일그러졌다.

‘그렇게 말하면 더 수상해 보인다는 것은 모르는 모양이군.’

애써 외면하고 있던 그 밤의 기억을 모조리 꺼낸 지오프리가 낮은 신음을 뱉었다.

밤새 그에게 매달린 미오를 떼어 내지도 못한 채 잠이 들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지금도 믿기 어렵다.’

그의 품에 꼭 안긴 미오의 정수리를 확인한 그가 뭐라고 입을 떼려는데, 상대가 꿈틀댔다.

순간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잠든 척을 했다.

잠에서 깬 그녀는 깜짝 놀라더니 그대로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렇게 성가시게 굴 때는 언제고 멀어지자 어쩐지 허전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곧장 잠이 들었지.’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부분이었다.

그를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서 말이다.

‘내 심장은 왜 이렇게 뛰는 거지?’

그녀의 곁에 서면 이상하게 긴장이 되었다. 전장에서 적의 칼날이 번쩍일 때나 막사를 몰래 침입하는 암살자를 맞닥뜨렸을 때만큼.

지오프리가 눈을 가늘게 뜨는데, 미오가 손을 뻗어 그의 가슴을 살짝 밀었다.

“……?”

“제발 조금만 떨어지면 안 될까요. 누가 볼 수도 있고…….”

가슴이 아직 진정되지 않은 탓에 미오의 음성이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아까부터 너무 바싹 붙어서 제대로 된 생각을 하기 힘들었다. 간밤에 실컷 맡긴 했지만, 지오프리의 체향에 노출되자 다리 힘이 풀렸다.

‘이러다 다시 이상해질지도 몰라.’

미오의 달아오른 볼을 확인한 지오프리가 허리를 감은 손을 풀었다. 그러곤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지오프리가 두 팔로 그녀의 몸을 꽉 안았다. 아까보다 더욱 바싹 붙어서 미오는 손으로 그의 허리를 밀어 냈다.

“진짜 왜 이래요. 공작님.”

“날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

이렇게 맞붙은 상태에서 지오프리의 그윽한 음성을 듣자 현기증까지 일었다. 대답해야 하는데 입술이 떨려서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안는 것을 거부할 이유가 있나?”

“……그게, 제게 공작님은 하늘의 별과 같은 분이라.”

이렇게 가까이하는 일은 기대한 적도 없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누군가 보면 진짜라고 믿고도 남을 만큼 진지한 얼굴이었다.

“……헛소리.”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를 속일 수는 없다.

간밤에 미오가 얼마나 그의 품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는데, 인제 와서 아닌 척이라니.

날카로운 지오프리의 눈이 그녀가 숨기고 있는 무언가를 찾으려고 번들댔다.

“나는 심각한 불면증을 앓고 있다.”

그의 말에 미오가 고개만 끄덕댔다. 로렌도 공작의 불면증 때문에 걱정이 산더미였다.

“그런데 또 네 옆에서 잠이 들었지.”

이건 정말 생각해 봐야 할 문제였다.

또 미오는 자꾸 그의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뭐가 네 진짜 얼굴이지?’

그를 좋아하나 싶다가 또 아닌 것도 같았다.

‘저리 가라고 난리를 치더니, 가지 말라고 날 붙잡고 놔주지 않았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들이었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 너 말이야.”

깊숙하게 숙인 그의 앞머리가 미오에게 닿을락 말락 했다. 지오프리의 서늘한 눈동자가 그녀를 태워 버릴 것 같았다.

‘……너무 가까워.’

설렘에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입술을 앙다문 미오가 한 발을 뒤로 빼려는데, 지오프리의 가느다란 입술이 벌어졌다.

“설마 너 마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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