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28)화 (28/123)

28화 최악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2)

고개를 굽신대는 미오의 모습이 퍽 보기 좋았다.

‘이제야 주제 파악을 했나 보네.’

라비니아는 상대가 감히 그녀와 대적할 수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러자 짜증스러운 마음이 조금 가셨다. 존귀한 자는 무릇 발아래 비천한 것들을 용서하는 법이다.

“괜찮다면 제가 드레스를 하나 선물해도 될까요?”

라비니아의 친절한 제안에 주변의 고용인들이 모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들의 눈에는 베일가의 영애는 기품이 있는 데다 아름다운 훌륭한 분이었다.

“정말이세요?”

고개를 번쩍 든 미오의 답에 다시 한번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보통 이런 일은 그냥 하는 인사치레와 비슷해서, 덥석 받는 일은 드물었다.

“그럼요. 마음껏 둘러봐요.”

준다고 했으니 인제 와서 물릴 수는 없었다. 라비니아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대자 미오가 제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라비니아 아가씨! 최고예요!”

인사를 꾸벅하더니 미오가 이리저리 상자를 열어 보기 시작했다.

“와! 예쁜 게 너무 많아서 도저히 하나를 고르지 못하겠어요. 몇 개 더 가져도 될까요?”

“……네?”

이번에는 완전히 당황한 라비니아가 큰 소리로 되묻고 말았다. 사실 그녀는 자기 물건을 남과 나누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한 번도 그런 일을 해 본 적도 없었다.

‘네까짓 거한테 내가 입는 그런 드레스가 어울릴 것 같아?’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데 내색도 할 수 없었다. 주변의 평판이라는 것은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라고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배운 탓이었다.

‘당장 저 돼먹지 않은 계집에게 매질하고 싶어.’

분노를 간신히 억누른 라비니아는 부채질을 세게 했다. 그제야 원하는 것을 전부 골랐는지 미오가 상자 몇 개를 두고 이마의 땀을 훔쳤다.

“정말 고마워요!”

“아니, 난 그런 물건이 산더미처럼 있으니까요.”

“어쩜 마음이 그렇게 고우세요.”

라비니아는 미오가 고른 상자를 보면서 입술을 짓이겼다. 하필 고른 것이 포르테 의상실에서 맞춘 것이었다. 수도의 아가씨라면 모두가 목을 매는 의상실로, 일 년 전부터 예약해 두고서 간신히 손에 넣은 것들이었다.

‘눈을 뜨고도 코를 베인다고 하더니…….’

아끼는 물건을 눈앞에서 뺏기는 지금에 딱 들어맞는 말이었다. 라비니아는 끝까지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녀 하나를 불렀다.

“저 상자를 날라 주도록 해.”

그러자 고용인들의 입에서 존경의 찬사가 터져 나왔다. 곧 미오는 베스를 따라서 응접실을 나갔고, 라비니아는 그 뒷모습을 가만 지켜봤다.

“차가 좀 식었구나.”

짜증으로 목이 타서 차를 홀짝이는데, 다 식어 버린 차는 지독히도 떫기만 했다.

“아! 무거워!”

가져온 상자를 방구석에 내팽개친 미오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골탕을 좀 먹이려고 했을 뿐인데…….’

어쩌다 보니 욕심을 부려서 상자를 들고 오느라 팔이 저렸다. 베스가 방 한구석에 드레스와 구두, 모자가 든 상자를 정돈했다.

“베스. 도와줘서 고마워요.”

“제가 응당 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베스는 얼떨떨했다.

‘진짜 모를 일이라니까…….’

라비니아 베일은 혈통부터 남다른 진짜 아가씨였다. 이곳의 고용인은 카스피언 공작을 제외한다면 누구도 아가씨에게 함부로 할 수 없었다. 베일 백작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가였다. 소유한 광산과 배가 수없이 많아서 자고 일어나면 재산이 몇 배로 불어난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저런 계집이 아가씨에게 불손하게 굴 수 있는 거지?’

베스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보기에 미오는 가진 것이라고는 눈부신 은발에 신비로운 호박색 눈, 호리호리한 몸이 전부였다. 그녀는 불쾌한 감정을 숨긴 채 슬쩍 입을 열었다.

“다시 돌려 드리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귀한 것은 너 따위에게 가당치 않다는 속마음은 살짝 숨겼다.

베스의 말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미오가 상대를 빤히 쳐다봤다.

“하지만 내가 달라고 조른 것도 아니잖아요?”

미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건…….”

베스가 머뭇대자 미오는 천하태평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베푸는 호의를 무시하는 게 더 예의에 어긋나는 게 아닐까요?”

상대가 괘씸했지만, 도무지 말로는 이길 수가 없었다. 아무 말 없이 베스는 앞치마만 매만졌다. 그 모습을 지켜본 미오가 활짝 웃었다.

“아! 내 걱정해 준 거죠? 고마워요.”

“……음.”

베스는 엉뚱한 오해만 해 대는 미오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

진한 녹색 드레스를 걸친 미오가 전투적으로 식사에 임하고 있었다. 최대한 고개를 들지 않으려고 숙였더니 접시에 코가 닿을 정도였다. 요리는 맛있었지만, 사실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물. 물!’

너무 급하게 먹어서 목이 꽉 막혔다.

하지만 물을 마시려면 고개를 들어야 해서 주저되었다. 그녀는 최대한 음식을 꼭꼭 씹어서 힘겹게 삼켰다.

‘원래도 불편했는데, 오늘은 진짜진짜 불편해.’

건너편에 앉은 지오프리는 느긋하게 차만 들이켜고 있었다. 그의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만 보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지오프리의 어깨를 문 것으로 추정된 아침.

기억에서 지워 버리고 싶었던 그날 그녀의 기도가 이루어졌다.

‘딱 절반 정도…….’

지오프리가 깨지 않거나 기억을 잃는 대신 그녀가 잠이 들었다.

사실 까무룩 기절한 것에 가까웠지만…….

눈을 떠 보니 언제 의원이 다녀갔는지 상처가 깔끔하게 치료되어 있었다. 방도 말끔해서 어제의 난동을 짐작하기조차 어려웠다.

게다가 고용인 누구도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로렌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굴어서 미오가 착각하는 건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제발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면 좋겠다.’

긴 한숨을 내쉰 미오가 다시 포크로 음식을 뒤적였다.

말도 없이 사라진 지오프리를 다시 보는 것은 무척 괴로운 일이었다.

‘차라리 막 따지거나 화를 내면 좋겠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 상황이 초조해서 견딜 수 없었다.

초조한 심정으로 미오는 곁눈질했다.

‘뭐야. 웃는 거야?’

좀처럼 잘 웃지 않는 그가 분명 희미하게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터질 것 같은데,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꿈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이마에 닿던 그의 체온이 아직 느껴지는 것 같았으니까.

심장 뛰는 소리에 부드러운 숨소리가 어우러져서 그녀의 가슴을 흔들었다.

그녀가 일방적으로 껴안고 있던 지오프리의 탄탄한 몸을 떠올리자, 볼이 달아올랐다. 씹던 콩이 기도에 걸렸는지 캑캑거리는데 그녀 앞으로 물이 담긴 잔이 내밀어졌다.

벌컥벌컥.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라서 얼른 물부터 들이켰다. 간신히 위기를 넘긴 후 고개를 들자 지오프리가 아주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응시했다.

“로렌이 아침을 굶겼나?”

“아니에요. 아침도 충분히 먹었어요.”

그제야 설거지가 필요 없어 보이는 그녀의 말끔한 접시가 눈에 들어왔다.

“잘 먹어야 빨리 낫겠지만, 아무래도 식사 예법은 좀 배워야 할 것 같군.”

“……?”

똑똑히 듣고도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다. 몸만 나으면 곧 떠나라고 해 놓고 무슨 예법 타령인가.

“괜, 괜찮습니다.”

“이제 다 먹은 것 같은데 맞나?”

지오프리가 그녀의 접시를 훑으면서 물었다.

“……네.”

배가 얼마나 부른지 연못에 빠지면 그대로 바닥까지 가라앉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고문 같던 식사가 끝났으니 방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구름 같은 폭신한 침대가 최고야.’

언제 끝날지 모르는 호사를 조금 더 누리고 싶은 마음에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러면 날씨가 좋으니 산책이라도 할까.”

“……?”

오늘따라 환청이 자주 들리는 것 같았다. 그녀와 지오프리가 산책할 만한 사이는 아니지 않을까. 그런 일이 있었으니 특히나 피해야 할 일이었다.

“라비니아 님을 불러드리겠습니다.”

겨우 생각해 낸 것이 그를 라비니아에게 넘기는 것이었다. 미오가 더듬더듬 건넨 말에 지오프리가 이마를 잔뜩 찌푸렸다.

“여기에서 베일 영애가 왜 나오는 거지?”

“그거야…….”

귀족 나리들끼리 산책을 하라는데, 왜 자꾸 인상을 쓰는지 알 수가 없었다. 화를 내기라도 할 기세라서 미오는 얼른 아픈 척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사실 제가 아직 몸이 불편해서요.”

“상관없어. 내가 안으면 되니까.”

“네? 그건 좀…….”

안 그래도 그녀가 지날 때마다 고용인이 수군덕대는 통에 불편한데, 여기에서 소문을 더 추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거절의 말을 건넨 후 고개를 드는데 지오프리가 곧장 그녀를 죽여 버릴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과식해서 산책이 꼭 필요할 것 같아요.”

그렇게 전혀 계획에도 없던 산책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얼굴을 마주 보는 식사보다 더 힘든 고행이었다.

“일전에 보니까 산책을 즐기는 편인 것 같던데 아닌가?”

말없이 걷던 지오프리의 물음에 미오가 한숨을 쉬었다.

‘즐길 틈을 줘야 말이지.’

이곳에서는 산책 한번 마음 편하게 할 수 없었다. 낮에는 나왔다가 지오프리와 라비니아를 맞닥뜨렸고, 밤에는 피 칠갑을 한 지오프리를 만났으니까 말이다.

“……의원도 조금씩 움직여 주는 게 좋다고 했으니까요.”

다시 대화는 끊겼고 그녀는 지오프리의 등만 보고 걸었다. 그러다 인적이 드문 길로 접어들자, 미오는 바짝 긴장했다.

‘드디어 그날 일을 따지려는 걸까.’

지오프리 입장에서는 정말 황당한 일일 것이다. 모르긴 해도 이성을 잃은 그녀가 짐승처럼 덤벼들었을 테니까…….

정수리 위로 뜨거운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기억나지도 않는 밤을 더듬는데 얼굴이 수치심으로 달아올랐다. 모퉁이에서 뭉그적대다가 지오프리를 놓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 어디 간 거지?”

급히 그의 뒤를 쫓는데, 괴이한 소리가 들렸다.

크르르, 크르르.

긴장한 그녀가 소리가 나는 곳으로 뛰어들었고, 할 말을 잃었다. 황소만 한 짐승이 지오프리를 곧 덮칠 것처럼 날뛰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