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최악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1)
몸을 뒤로 물리는데, 침대가 자꾸 삐걱 소리를 내서 입 안의 침이 다 말랐다. 그 소리에 지오프리의 속눈썹이 흔들리자, 심장이 떨어질 것 같았다.
‘절대로 지금 일어나지 마.’
지금 그가 일어나면 이것보다 더 민망한 상황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조금 더 자.’
지오프리에게 최면이라도 걸듯 중얼대면서 미오는 아픈 몸을 움직였다.
거리로 치면 겨우 한 걸음 움직였을까.
온몸이 다 부서지는 것 같았다. 잠시 멈춘 미오가 뻐근한 골반을 내려다보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대체 밤에 뭘 했길래?’
단순한 물음을 스스로 던진 순간 미오의 표정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맙소사. 이건…….
예상했던 것보다 상황이 더 좋지 않았다.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밤새 지오프리의 품을 파고들던 그녀의 몸짓이 생생했다.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친친 감기도 했었다.
‘네가 뱀이야?’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던 미오가 속으로 소리를 내질렀다.
그것뿐이면 좋았을 텐데…….
내내 향이 좋다면서 그의 어깨와 등에 코를 파묻었던 것도 같다. 최악은 이것이 기억할 수 있는 일부분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저 어깨의 흔적도 설마 내가 만든 건가.’
지오프리를 보면서 깨물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하긴 했지만, 아닐 것이다.
‘그가 가만있었을 리가 없잖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오프리의 잠든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자는 모습만큼은 천사 같다니까…….’
이런 엉망진창인 상황을 잊게 할 만큼 그의 눈 감은 얼굴이 아름다웠다. 부드러운 햇살이 지오프리의 머리 위에서 강렬하게 부서졌고, 빛이 반듯한 이마에서 흩어졌다.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모습에 미오는 입을 헤벌렸다.
‘자꾸 보니까 익숙해져서 그런가.’
금발에 푸른 눈 미남이라는 그녀가 정해 둔 이상형 기준이 흔들렸다.
‘성격이 조금만 다정하면…….’
잠시 해 본 생각에 미오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고개를 젓고 싶었지만, 목 뒤가 뻐근해서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그렇게 시선을 아래로 내리다 꿈틀대는 목울대와 활짝 열린 셔츠에 닿았다. 셔츠는 그의 몸에 간신히 걸쳐져 있는 수준이었다. 미오는 군데군데 찢어지고 구멍이 난 셔츠를 보면서 현실을 부정했다.
‘저건 내가 한 게 아니야.’
그리고 선명한 이빨 자국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만약 저런 짓을 한 것이 그녀라면…….
‘아니야. 그런 생각은 하는 게 아니야.’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현실도 그렇게 되는 법이라고 했다. 확인하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잘 벌어지지도 않는 입을 잔뜩 벌린 채 그녀가 은밀하게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갔다. 꿈틀대면서 옆으로 몸을 움직이는데, 귓가에 긴박한 배경 음악이 재생되는 것 같았다.
‘……맞는지만 확인하는 거야.’
두 팔로 침대를 짚은 미오가 그의 어깨를 향해서 입을 크게 벌렸다.
크아앙.
그리고 최고로 흉한 얼굴일 게 분명한 그 순간 미오는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나를 아예 잡아먹기라도 할 참인가?”
잠에서 막 깬 지오프리의 음성은 꽉 잠겨 있었다. 아직 온전한 정신이 아닌지 초점이 흐릿한 그의 검은 눈동자 안에 미오가 가득 새겨져 있었다.
“아니, 아니에요. 저는 하품을 하는 거였어요.”
미오는 얼른 손을 뻗어서 입을 가렸다. 그리고 빛의 속도로 그에게 등을 돌린 채 이불을 끌어 덮었다. 그때만큼은 어디가 아프다는 것을 느끼지도 못했다.
‘제발 아무것도 따지지 말아 줘.’
미오가 두 손을 꼭 모은 채 누군가에게 기도를 올렸다.
‘제가 무신론자이긴 하지만, 이제부터 당신을 믿을게요.’
카스피언 제국을 수호한다는 디아나 여신을 부른 미오는 제발 지오프리를 다시 잠들게 해 달라 빌었다.
‘그게 힘들다면 어제의 기억을 지워 주실 수 있을까요.’
너무 억울해서 눈가에 눈물이 금방 고였다. 각인열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면 이건 그녀의 의지가 절대 아니었다.
‘여기에 제 의지대로 되는 게 뭐가 있었나요?’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를 했는지 몸이 가늘게 떨렸다.
* * *
아침부터 카스피언가로 몇 대의 마차와 수레가 줄지어 들어왔다. 고즈넉한 정원이 말이 내는 울음소리로 소란스러웠다. 미오는 풀풀 피어오르는 먼지 사이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고용인을 한참 지켜봤다.
“저게 다 뭐 하는 거지?”
심드렁하게 중얼대던 미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저 안에 황금이 가득 있다고 해도 관심 없었다.
‘어차피 내 것도 아닌데, 뭐.’
창틀에 기대선 그녀가 방을 돌아보자 절로 간밤의 일이 떠올랐다. 방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지만, 문에 남은 미세한 손톱자국까지 가리지는 못했다. 울부짖으면서 저 문을 박박 긁어 댔던 그녀의 모습을 기억에서 지우고 싶었다.
“진짜 울고 싶다.”
가뜩이나 욱신대는 이마의 상처를 후벼파는 듯한 두통이 밀려들었다. 게다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입맞춤한 기억이 없으니 여우로 변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그녀는 여전히 인간이었다. 사실 이제까지는 반신반의했었다. 하지만 아직 인간인 것을 보면 입맞춤만이 유일한 해답이 아닌 게 확실했다.
“이러면 규칙이라는 게 존재하는 이유가 없잖아.”
언제 갑자기 여우로 변할지 모른다고 생각하자, 어깨가 덜덜 떨렸다. 자칫하면 진짜 큰 봉변을 당할지도 모른다. 원래의 세상으로는 죽은 몸이라 돌아갈 수도 없었고, 이곳에서는 인간도 짐승도 아닌 몸이었다.
‘만약에 지오프리가 보는 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같이 슬픈 결말뿐이었다.
“참 우울하다. 우울해.”
이럴 때는 빠른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미오는 옷장에 몇 벌 없는 드레스 중에 하나를 골라서 갈아입었다. 피 칠갑이 된 손과 상처를 보고 깜짝 놀랐지만, 생각보다 다친 곳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두통은 여전했지만, 로렌이 건네준 동글동글한 검은 알약을 먹었더니 기운이 넘쳤다.
“진짜 그런 이상한 약은 어디서 구해 오나 몰라.”
낑낑대면서 긴 은발을 곱게 빗었고, 한쪽 머리에 드레스와 같은 색의 리본을 매는데, 밖에서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라비니아 아가씨가 만남을 청하셨습니다.”
지금은 누구를 만날 기분이 아니었다. 그게 재수 없는 라비니아라면 더욱더 말이다. 옷을 갈아입고 정원이나 가볍게 돌아볼 참이었던 미오가 작게 답했다.
“어쩌죠. 지금 좀 쉬고 싶어서요.”
“그게, 꼭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미오의 완곡한 거절에 하녀가 무척이나 난처해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일이지만, 그녀 때문에 다른 사람이 곤란해지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잠깐만 갔다가 산책하러 나가면 되겠지.’
하녀를 따라서 라비니아가 있다는 손님용 응접실로 들어섰는데, 미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에는 발 디딜 틈 없이 드레스와 모자, 구두가 담긴 상자가 쌓여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하인들이 짐을 나르고 있었다.
“미오. 와 줘서 고마워요.”
십년지기 친구의 미소를 띤 라비니아가 그녀의 손목을 맞잡고 안으로 이끌었다. 겉과 속이 너무 다른 상대의 친절에 떨떠름한 미소를 띤 미오가 드레스 자락을 잡고 인사를 건넸다.
“초대, 감사합니다.”
“여기 와서 한번 볼래요? 글쎄, 아버지가 이렇게나 많은 선물을 보내셨지 뭐예요.”
아마 아침에 시끌벅적했던 이유가 저것이었나 보다.
라비니아가 손짓하자 하인 하나가 상자를 가져와서 탁자에 올려 두었다. 그것을 열자 작은 티아라와 목걸이, 팔찌, 귀걸이가 세트로 반짝대고 있었다. 저렇게 화려한 보석은 처음이라서 미오의 눈이 동그래졌다.
“엄청나게 비싸겠어요.”
“글쎄요. 나는 가격은 물어본 적이 없어서…….”
거들먹대면서 부채를 부쳐 대는 꼴이 우스웠다. 미오는 그제야 라비니아가 왜 불렀는지 이유를 알아챘다.
‘자랑하고 싶은데 봐 줄 사람이 없었구나?’
그런 거라면 대충 장단 맞춰 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역시 부유한 분은 다르네요.”
미오가 감탄하듯 눈을 크게 뜨자 라비니아가 약간 놀란 듯하더니 곧 코웃음을 쳤다.
“촌스럽게 뭘 이런 거로 놀라고 그래요.”
미오의 부러워하는 얼굴에 신이 난 라비니아가 그녀에게 몇 필의 말이 있는지, 드레스 룸이 몇 개인지 끝도 없이 자랑했다. 베일 영지에 가면 온천도 있단다. 하지만 한쪽 귀로 라비니아의 말을 흘려듣던 미오가 몸을 일으키면서 물었다.
“너무 궁금한데 구경 좀 해도 되나요?”
“물론이죠.”
미오가 상자를 여는 모습을 지켜보던 라비니아의 얼굴이 승리감에 젖었다.
‘드레스가 아마 세 벌은 되려나.’
미오는 같은 드레스를 돌려서 입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백작가의 금지옥엽과 저런 하찮은 계집을 비교할 수 있을까.
‘딱 봐도 궁핍하기 그지없어.’
그런 주제에 공작을 유혹하려는 미오가 더욱더 견딜 수 없었다.
‘그냥 원래 네가 있던 진창에 얌전하게 처박혀 있을 것이지.’
어디 감히 그녀나 지오프리가 있는 이곳에 기어오르려고 드냐는 말이다.
‘내가 지금 이렇게 정중하게 대해 주는 것은 순전히 그이 때문이야.’
곧 결혼해서 이곳의 안주인이 되기 전에 괜히 공작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았다. 그 이유가 아니라면 저런 천한 것과는 말 한마디 섞고 싶지 않았다.
‘아가씨. 또 그 계집이 공작님을 침대로 끌어들였답니다.’
왜 지오프리는 저런 하찮은 것을 가까이 두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날 때부터 아름다웠고,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이의 의중을 정말 모르겠어.’
라비니아는 진심으로 지오프리를 손에 넣고 싶었다. 그녀가 짜 둔 계획의 정점에 그가 있었으니까.
지오프리와 결혼하게 되면 미오라는 저 계집을 반드시 전담 하녀로 두겠다고 다짐했다. 이 모멸감은 그때 가서 제대로 풀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선물을 열어 보면서 연신 감탄을 내뱉는 미오를 향해서 말을 건넸다.
“미오는 옷이 몇 벌 없나 봐요.”
가엾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는 라비니아의 얼굴에 숨겨진 자만심이 방을 채우고도 남았다.
‘적당히 하는 법을 모르는구나?’
이 정도 상대해 줬으면 그만둬도 좋을 텐데, 상대는 욕심을 끝도 없이 부렸다. 미오가 일부러 고개를 푹 숙인 후 입을 달싹댔다.
“네. 제가 형편이 좋지 않아서요.”
사실 형편이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가진 게 아예 없었다.
‘나중에 먹으려고 땅에 묻어 둔 도토리 몇 알 빼고는 말이야.’
그것마저도 어디에 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처음엔 그냥 장난이었지만, 어쩐지 쓸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