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각인의 밤 (2)
위험한 고비를 넘기자 지오프리는 의문이 생겼다.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
지금 이 반응을 봐서는 이제까지 그녀가 했던 고백이 죄 거짓 같았다. 그를 계속 밀어 내는 작은 주먹을 세차게 붙들자 이마로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정신 차려 봐! 무슨 약을 잘못 먹은 건가?”
“……으응. 응.”
큰 소리로 물어봐도 상대는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 침대를 향해 걸어가던 지오프리가 손을 들어서 땀이 맺힌 앞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그러자 그녀의 버둥거림이 점점 줄어들었다.
‘이제야 얌전해졌군.’
아이나 애완동물을 키워 본 적은 없지만, 아마 이런 느낌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봤다. 굉장히 번거롭고 성가신데, 완전히 무시하기는 힘들었다.
“……휴.”
축 늘어진 미오를 침대에 눕히자 몸에서 힘이 빠졌다. 대충 걸터앉은 그가 떨리는 두 손을 내려봤다.
‘정말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제야 얼마나 다급하게 이곳까지 달려왔는지, 그녀를 구했는지 생각이 났다.
‘내가 왜 그렇게 놀란 거지.’
지오프리가 그의 감정을 더듬어 보다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이건 상대가 누구였더라도 당연한 거야.’
일진이 사나운 하루였다.
아침부터 라비니아를 맞닥뜨렸고, 발작을 일으켰다. 그리고 겨우 쉬려고 했더니 미오가 이 난리를 피운 것이다. 몸을 뒤척이는 미오에게 이불을 덮어 준 후 그녀를 세차게 노려봤다.
‘더 지켜보겠다고 한 게 후회될 지경이군.’
요즘 그가 믿고 따르는 신념이 자주 흔들렸다. 지오프리는 이불에 물드는 피를 보면서 로렌과 의원을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골칫덩이를 주웠어.”
엄밀히 말하자면 주운 게 아니라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거지만.
그렇게 침대에서 일어나려는데, 이불 속에서 뭔가가 불쑥 튀어나와 지오프리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피가 잔뜩 묻은 미오의 손을 내려다보던 그가 그대로 힘을 주어서 뿌리치려고 했다.
“……지, 지오프리.”
힘없는 그녀의 음성에 지오프리의 어깨가 굳었다.
전장에서 일찍 집을 떠나온 병사가 열에 시달릴 때면 대체로 어머니나 가족을 찾았다.
‘그런데 고열에 시달리면서까지 왜 너는 나를 부르는 거지.’
그는 미오에게 어떤 호의도 베푼 적이 없었고, 마음에 답을 한 적도 없었다. 조금 흔들리는 마음을 갈무리한 그가 다시 일어서려는데, 웬걸, 잡힌 손을 빼내기 힘들었다.
“……?”
접착제라도 바른 건지 미오의 손이 그의 손목을 꽉 잡고 있었다. 다른 손으로 그녀의 손을 떼어 내려는데, 어느새 눈을 뜬 미오와 눈이 마주쳤다.
“기절한 게 아니었나?”
“……지오프리. 정말 지오프리네.”
여전히 꿈에서 깨지 못한 것 같은 미오의 눈가에 붉은 기운이 서렸다. 그녀의 은밀한 음성은 마치 로렐라이의 노래 같기도 했다.
“넌 지금 많이 아파.”
“아닌데…….”
“도대체 내게 원하는 게 뭐지?”
미오의 눈이 타오를 듯 뜨거워 보였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당신한테서 좋은 향기가 나요.”
“……머리를 다친 건가.”
의원을 부르려고 일어서려는데 미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한 번만 깨물어 봐도 될까요?”
“……?”
별별 일을 다 겪은 그였지만, 이런 말은 예상하지 못했다.
‘깨물다니? 누가 누구를? 어디를 깨물겠다는 거지?’
아무래도 열 때문에 미오가 이상해진 게 틀림없었다.
“그런 장난에는 취미가 없다.”
일어서는 그의 허리를 미오가 부둥켜안는 바람에 지오프리의 몸이 침대로 무너졌다.
“혼자 있기 싫어.”
지오프리의 등에 고개를 댄 그녀가 훌쩍댔다.
“네게 지금 필요한 건 의원이다.”
그의 목에 두 팔을 감은 미오가 도리질 쳤다. 아무래도 하는 행동이 술에 취한 사람과 흡사했다. 하지만 방 어디에도 술병은 없었고, 술 냄새도 나지 않았다.
“내게 필요한 건 지오프리 당신뿐이야.”
미오의 눈물로 셔츠가 축축해졌다.
“헛소리는 그만해!”
지오프리가 소리를 내지르는데 웬걸, 이제 아예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는 게 아닌가. 드레스 아래로 드러난 삐쩍 마르고 상처투성이 다리를 보자 화가 조금 누그러졌다.
“상처가 덧나니까 그만 움직여.”
한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긴 그가 미오의 피딱지가 앉기 시작한 무릎으로 드레스를 내려 주면서 중얼댔다.
이렇게 작은 여자 하나도 제대로 못 떼어 내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했다.
“이제 떨어져. 미오.”
하지만 아예 한 몸처럼 들러붙은 미오는 그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은 채였다.
“냄새가 좋아. 진짜 좋아.”
그녀의 옅은 숨결이 목덜미를 간지럽히자 지오프리는 이 방에 들어와서 처음 이상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작은 손이 그의 등 근육과 어깨를 어루만졌고, 더운 김을 흘리는 입술이 셔츠 위를 스쳤다.
“이러지 마…….”
몸이 뻣뻣하게 굳은 지오프리는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했다. 따지고 보면 여인과 이렇게 가까운 접촉을 하는 게 처음이었다.
그때 문밖에서 다급한 음성이 들렸다.
“공작님! 공작님! 괜찮으십니까?”
집사의 음성이 들렸고, 그 뒤로 로렌과 고용인이 소곤대는 음성이 들렸다.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모두 물러가도록…….”
지금 이 꼴을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었다. 그의 등에 매달린 미오도 문제였지만, 지오프리의 달아오른 얼굴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지오프리의 명에 모두 대번에 문 앞에서 멀어졌다. 여러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복도를 요란스레 울리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그러는 중에도 미오는 그의 등을 더듬어 댔다.
“지오프리, 당신 목소리도 마음에 들어.”
“……하.”
아주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좋다고 할 기세였다. 이미 고백이라면 지긋지긋하게 들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그를 어루만지면서 낮게 속삭이자 평소와 너무 다르게 느껴졌다.
“함께 있고 싶어. 지오프리.”
미오의 입가에서 달콤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내 이름을 너무 쉽게 부른다는 생각은 안 드나?”
그를 이렇게 불러 주는 사람은 이제 세상에 없었다. 쓸쓸한 생각에 잠기려는데, 미오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지금이 뿌리치고 나갈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내가 없으면 아까처럼 그 소동을 또 피우겠지.’
지오프리는 미오라는 손님을 끝까지 책임질 작정이었다.
“일단 누워.”
“그러면 가 버리려고…….”
“안 간다.”
주저하던 미오가 천천히 침대로 쓰러지자 그도 옆에 함께 누웠다.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심장이 세차게 뛰었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막 지려는 해가 방 안으로 스며들어서 천장과 벽이 온통 붉었다.
“……휴.”
얼떨결에 눕긴 했지만, 막상 몸을 쭉 펴자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지오프리는 옆을 돌아보지 않은 채 머리 아래 손을 넣으려고 팔을 뻗었다. 그러자 작은 손이 그의 손에 스쳤다.
“지오프리, 사실 나는 네가 미워.”
미오가 아주 작게 중얼댔다.
“기분이 참 변화무쌍한 편이군.”
저리 가라고 밀어 내더니, 생명의 동아줄이라도 된 듯 그렇게 집착했었다. 그런데 이제 또 미운 건가? 너무 기막혀서 화도 나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고 두 손을 베개 삼아 누웠다. 그때 침대 시트가 부스럭대더니 멀리 있던 미오가 그의 곁에 찰싹 붙었다.
“방금 밉다고 하지 않았나?”
그녀의 이마를 밀어 내려고 팔을 내리던 지오프리가 손을 거두었다. 어제 넘어져서 다친 상처를 건드릴까 조심스러웠다.
“지오프리, 날 죽이지 마.”
미오는 그의 팔을 붙든 채 흐느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물론 미오가 저지른 수많은 사건 때문에 머리끝까지 화가 난 적은 숱하게 있었다. 당장 내치고 싶은 충동도 여러 번 느꼈다.
‘하지만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물론 그녀가 카트리나 쪽 사람이라면 그때는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지오프리. 살려 줘.”
눈을 꼭 감은 채 미오가 연신 생명을 구걸하자 지오프리의 이마가 꿈틀거렸다.
“그래. 지금 당장은 너를 죽이지 않을 거다.”
미오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가 났다. 열린 창으로 어느새 까만 하늘이 펼쳐졌고, 시원한 바람이 스며들어 왔다.
“저리 좀 떨어져.”
그가 팔을 살짝 흔들어 봤지만, 양손으로 그의 팔뚝에 매달린 미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못할 상태는 분명했다.
“후함…….”
나른한 피로감에 온몸이 잦아들었다.
어차피 선잠만 이룰 뿐 깊이 자지는 못할 게 뻔했기에 지오프리는 잠시 눈을 감았다. 순식간에 시야가 어두워졌다.
* * *
눈가를 간지럽히는 시원한 바람이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두 팔을 쭉 뻗어서 기지개를 켜려는데, 팔을 움직일 수 없었다. 게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잇몸이 욱신욱신했다.
‘밤에 갈비를 뜯는 꿈이라도 꾼 건가.’
감은 눈에 힘을 빡 주는데 눈앞의 풍경이 괴이했다.
“……?”
커튼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풀어 헤쳐진 흰 셔츠였고, 그녀가 자석처럼 들러붙어 있던 곳은 지오프리의 탄탄한 가슴팍이었다.
순간 시간이 멈춘 것처럼 머리가 멍해졌다.
‘내가 또 지오프리의 침실에 간 거야?’
찰싹 달라붙어 있는 몸을 조금씩 떼어 내면서 빠르게 기억을 더듬어 봤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이곳은 그녀의 방이 분명했다.
‘그럼 지오프리가 나한테 왔다는 건가?’
그때 이빨 자국이 난 지오프리의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미오가 덜덜 떨기 시작했다.
‘맞아. 어제 발작을 했었어.’
각인열이 오르는 바람에 문을 걸어 잠갔던 기억이 있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것도, 환각 속에서 지오프리를 봤던 것도 생각해 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 가운데, 미오는 크게 심호흡했다.
그러자 방 안에 가득 찬 지오프리의 체향이 그녀의 폐를 가득 채웠다.
“……아.”
순간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꽉 누른 채 미오가 침착해지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최악의 상황은 아닐지도 모르잖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미오가 어색하게 웃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