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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25)화 (25/123)

25화 각인의 밤 (1)

한낮의 황량한 들판을 가로질러서 누구도 찾지 않는 어두운 숲에 들어서는 사내가 있었다. 숲 사방으로 뿜어 나오는 어두운 기운 때문에 근처를 노니는 새 한 마리 찾기 어려웠다.

“레오. 아무래도 너는 여기서 기다려야겠구나.”

숲의 초입에서 겁을 집어먹은 말이 침을 질질 흘리면서 뒷발질을 해 댔다. 말에서 뛰어내린 지오프리가 레오의 갈기를 쓸어 주었다. 말이 진정하자 그제야 지오프리는 숲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으윽.”

심장께를 움켜쥔 지오프리 소매 사이로 시커먼 문양이 새겨진 팔이 드러났다. 성년이 지난 이후 마음의 평정을 잃을 때면 늘 이렇게 고통에 시달렸다. 아직도 폭주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다니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코로니스.”

짧은 신음을 내뱉은 지오프리를 삼킨 숲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냉기만 뿜어댔다.

* * *

내내 마음을 졸이고 있었는데, 점심은 혼자 먹게 되었다. 급한 사정이 생겼다는 공작의 전갈을 받은 미오의 표정은 왠지 어색했다.

“몸도 불편하니까 이게 훨씬 더 좋아.”

일부러 명랑하게 입을 열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금방 우울해졌다. 숟가락을 든 그녀가 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나는 절대 지오프리를 기다렸던 게 아니야.”

그냥 조금 익숙해졌을 뿐이다.

오후 2시가 되면 그와 얼굴을 마주 보고 식사를 했으니까.

“왜 이렇지.”

고기를 듬뿍 갈아 넣은 수프는 고소한 냄새를 풍겼지만, 어쩐지 먹고 싶지 않았다. 식사를 치운 미오가 침대에 힘없이 기대앉았다.

“까마귀가 지금 내 모습을 얼마나 비웃을까.”

항상 굶주린 탓에 누군가 먹다 남긴 것을 기웃대는 게 그녀였다. 그랬는데 입맛이 없다니 그녀가 생각해도 우스운 일이기는 했다.

이마에 감긴 붕대를 매만져 보던 미오가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기분이 별로야.”

이마에 열감이 느껴졌고, 속이 답답했다. 어제 다친 것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쳤다.

‘맞아. 지금이 며칠이더라.’

요즘 하도 사건 사고가 잦아서, 그녀의 처지를 잠시 잊고 있었다.

‘맙소사. 잊을 게 따로 있지.’

비틀대면서 침대에서 내려온 미오가 아직 열려 있는 창에 매달렸다.

“……흐윽.”

다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렸고, 볼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앞이 흐릿했고 숨이 자꾸 막혔다. 순식간의 몸의 변화에 미오는 ‘각인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맙소사! 지금은 안 돼.’

여우 수인이 되고서부터 한 달에 한 번 이렇게 고통에 시달렸다. 반나절 정도 지속하는 각인열은 정말 바닥을 데굴데굴 구를 정도로 힘들었다.

‘멍청한 여우. 그건 각인 상대와 애정을 나누어야 해소되는 거야.’

아파서 끙끙 앓는 미오를 보면서 까마귀가 날개를 퍼덕거렸다. 그는 아는 게 없는 미오에게 뭔가 알려 주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애정.’

친구도 없는 그녀에게 애정을 나눌 상대가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그렇게 볼품없는 여우를 누가 봐 줄까?’

킬킬대는 까마귀의 음성은 더는 그녀를 괴롭히지 못했다. 열기에 완전히 점령당한 몸을 옹달샘에 담그거나, 굴에 가두었다. 숲에서는 그렇게 이 시기를 견뎌 냈는데, 지금은 속수무책이었다.

“일단 문을…….”

몸을 잔뜩 숙인 미오가 문까지 기어가다시피 해서 잠금장치로 손을 뻗었다. 쇠줄을 잡는데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입가로 침이 주룩 흘렀지만 닦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헉, 헉.”

문을 잠갔으니까 반나절은 괜찮을지도 모른다.

‘……조금만 버티면 되니까.’

등을 문에 기대는데 몸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고통을 참다 못해서 손톱으로 목을 세차게 긁었다. 그러자 목구멍을 타고 괴상한 울음소리가 흘렀다.

“……안 돼. 으흥.”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미오가 남은 힘을 쥐어짜 내서 창 쪽으로 기어갔다. 몸이 너무 뜨거워서 본능적으로 찬 바람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무릎으로 바닥을 기는 바람에 흰 붕대가 풀려서 바닥에 나뒹굴었다. 상처가 덧나서 그녀가 움직이는 길이 붉게 물들었지만, 그런 고통은 사소해서 느끼지도 못했다.

“조금만, 더―.”

창틀을 붙잡고 몸을 세우는데 입 밖으로 진득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얼굴에 바람을 쐬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미오는 아예 창틀을 타고 넘어가서 걸터앉았다. 드레스 자락이 거추장스러워서 무릎까지 훌렁 걷었다.

휘잉.

강한 북풍이 전신을 강타하자, 그제야 미오의 호흡이 한결 편했다. 머리가 잠시 맑아지자 남모를 서러움이 밀려들었다.

“……이게 뭐야. 정말.”

어쩌다 사람도 짐승도 아닌 몸이 되었을까.

왜 괴물이 된 걸까.

애초에 어디에도 속한 기억이 없는 그녀였는데, 끝까지 세상은 자비를 베풀어 주지 않았다. 자포자기하지 않으려고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아 봤지만, 이건 노력으로 한계가 있었다.

죽음을 되풀이하는 빙의를 누가 원했을까.

울지 않으려고 손등을 세차게 깨무는데 입 안에서 비릿한 맛이 가득하였다. 그러다 저 아래 반갑고도 미운 얼굴이 어른거렸다.

“열이 나서 헛것을 보는구나.”

정원 어딘가에서 그녀를 향해 뭐라고 소리치는 것 같은데, 귀가 먹먹해서 들리지 않았다. 미오는 상대를 향해서 힘없이 손을 흔들었다. 어쨌거나 지오프리를 보니까 기분이 좋았다.

“내가 내내 지오프리만 생각해서 그래.”

오늘 사실 그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온몸을 타고 흐르는 열기가 살갗을 따갑게 찔러 댔다. 통증이 점점 강해져서 이제 몸을 흔들어서 떨어뜨릴 것 같은 북풍도 소용없었다.

“너무 더워. 연못이라도 있으면 뛰어들 텐데…….”

그때 흐릿한 시야에 반짝이는 호수의 표면이 눈에 들어왔다.

“……물이야! 물.”

미오는 창가에서 무작정 몸을 일으켰다. 머릿속은 이미 물속에서 이 끓어오르는 몸을 식히는 상상에 젖어 있었다.

막 발을 떼려는데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진짜 미친 거야?”

익숙한 음성에 미오가 천천히 잡힌 손목을 내려다봤다. 커다랗고 마디가 불거진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 단숨에 알 것 같았다.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 그녀의 심장이 먼저 반응했으니까.

“아, 안 돼.”

지금 가장 만나서는 안 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였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녀가 잡힌 손목을 빼내려고 몸을 버둥댔다.

“……못 말리겠군.”

지오프리가 아예 그녀를 거칠게 안아서 품에 가두었다. 작은 몸은 끊임없이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 냈다.

“지오프리, 저리 가.”

지오프리는 그의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불러 대는 미오를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봤다. 안은 그녀의 몸이 펄펄 끓고 있었다.

“왜 이러는 거지? 나를 괴롭히려고 작정이라도 한 건가?”

이렇게 그를 성가시게 하는 존재는 처음이었다.

“미칠 노릇이군.”

최근 그가 가장 놀랐을 때는 연회장에서 미오를 만난 때였다.

“더 놀랄 일이 생길 줄 몰랐는데…….”

그의 가슴팍에 거머리처럼 붙은 미오를 내려다보던 지오프리가 인상을 썼다.

“저리 떨어지라고…….”

지오프리가 제법 세게 미오의 몸을 떼려고 했지만, 그의 어깨에 이빨을 박아 넣은 여인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까는 전부 연기였던 건가?”

그를 밀어 내려고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 일순간 이렇게 지오프리의 몸에 들러붙었다.

“이게 도대체 다 무슨 일이지?”

숲에 다녀온 지오프리가 막 카스피언 공작 성에 돌아왔을 때였다.

‘베일 아가씨가 공작님을 찾으셨습니다.’

집사가 그를 맞으면서 해야 할 일들을 알려 주었다. 베일이라는 말에 지오프리는 이마를 찡그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집사. 내가 베일 영애와 결혼하기를 바라나?’

그의 물음에 집사가 당연히 그렇다고 답할 줄 알았다. 하지만 집사는 한참 침묵을 지키더니 천천히 입을 뗐다.

‘저는 언제나 주인님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그런가?’

지오프리는 그런 식의 정략혼을 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정략혼이야 가문을 더욱더 일으키려고 하는 수작이었다.

‘나는 어차피 후계니 가문 따위에는 관심이 없거든.’

그가 바라는 것은 카스피언 제국의 멸망이자, 적의 몰락이었다.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지오프리는 라비니아에게 조금의 매력도 느끼지 못했다.

‘그래. 다른 일은……?’

‘분부하신 일은 차질 없이 준비가 완료되었고, 황궁에서 사냥 대회 서신이 왔습니다.’

‘그래. 빌어먹을 사냥 대회 말이지.’

성으로 들어가는 지오프리의 얼굴은 어딘가 지쳐 보였다. 간밤에도 잠을 거의 이루지 못했다.

‘깨어 있는 지 얼마나 되었을까.’

오후가 되자 머리가 멍했다.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쳐들 때였다.

‘아니, 저게 뭐지?’

처음에는 창틀에 천이 펄럭이는 줄 알았지만, 자세히 보니 사람이었다. 창문틀에 걸터앉은 미오가 두 다리를 달랑댔다.

한눈에 봐도 위험천만한 상황에 지오프리의 음성이 낮아졌다. 그처럼 건장한 남자라면 저 정도 높이에서 떨어져도 크게 다치지 않겠지만, 운이 나쁘면 죽을 수도 있었다.

‘집사! 혹시 모르니 얼른 마사에 있는 짚단을 가져와서 정원에 깔아 둬.’

급히 지시를 내린 그는 순식간에 층계를 올랐다. 가쁜 숨을 내뱉으면서 문손잡이를 돌리는데, 문이 잠겨 있었다.

‘아예 죽으려고 작정한 건가?’

다급한 마음에 어깨로 몇 번 문을 쾅쾅 두드렸다. 안에서 쇠로 만든 걸쇠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고, 곧 방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리고 펼쳐진 풍경에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이게 다 뭐지.’

방은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엉망진창이었다. 바닥과 벽에는 피가 잔뜩 묻어 있었고, 벽지와 이불이 찢겨 있었다. 그의 시선 끝에 창틀에서 일어서려는 미오가 들어왔다.

‘거기 꼼짝 말고 있어.’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발 하나를 공중에 내밀려고 했다. 급히 문을 닫은 후 그는 미오에게 달려갔다. 주변의 이목을 따질 여유도 없었다. 급하게 그녀의 손목을 끌어 잡은 지오프리의 입에서도 거친 숨이 흩어졌다.

‘진짜 미친 거야?’

화가 잔뜩 난 그가 다시 뭐라고 쏘아붙이려고 할 때였다.

‘……아.’

눈물이 그렁그렁한 신비로운 눈이 지오프리를 올려다봤다. 차마 화를 더 내지 못한 그가 입술을 짓씹는데, 그녀가 지오프리를 밀었다.

‘얼른 가. 지오프리.’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미오는 얼굴과 목,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열병에 걸렸거나, 독충에 물렸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꾸만 벅벅 긁어서 피를 내는 미오를 보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너를 구해 주려고 온 거다.’

‘지금 위험하니까…….’

‘누가 누구한테 위험하다는 거야!’

결국, 소리를 내지른 지오프리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미오는 그의 품에 안겨서도 끝까지 저항했다.

‘너는 안 된다고―.’

‘왜 나는 안 되는 거지?’

지오프리는 어쩐지 거절당하는 느낌이 불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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