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악의가 짙게 내리고
라비니아는 달뜨는 욕망을 애써 억누르면서 고혹적인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그러다 곧 그녀가 바닥에 부채를 떨어뜨렸다.
“……어머.”
부채를 줍기 위해서 고개를 숙이면 드레스의 앞섶으로 풍만한 가슴이 훤히 보였다. 대부분의 사내가 아찔한 풍경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녀의 이 수법은 이제까지 실패한 적이 없었다.
‘당신도 역시 나의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을 거야.’
아주 느릿하게 부채를 주운 라비니아가 승리의 미소를 띠었다.
‘여기 있습니다. 라비니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지오프리의 멍한 눈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라비니아는 절대 한 번에 그의 마음을 받아 주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사내란 족속은 너무 쉽게 얻는 꽃을 가벼이 여기는 법이니까…….’
지오프리 카스피언의 애간장을 녹이고 싶었다. 그가 그녀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매달리는 모습을 상상하자, 지금의 괴로움도 즐겁기만 했다.
‘슬슬 고개를 들어서 가련한 사내를 봐 줄까.’
하지만 허리를 완전히 편 그녀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
처음에는 믿을 수 없어서 눈을 여러 번 깜빡댔다.
말을 타고 사라지는 공작을 보고서야 그녀가 혼자 남겨졌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라비니아! 오래 기다렸지? 아니, 공작님은 어디를 가신 거야.”
양손 가득 레모네이드와 곁들일 간식을 챙겨 온 사무엘이 주변을 두리번댔다. 곧 사무엘이 지쳐 보이는 라비니아에게 말을 건넸다.
“꽤 덥지? 얼른 이것부터 좀 마셔 봐. 생레몬을 듬뿍 짜 넣어서 정말 맛있을 거야.”
라비니아의 귀에는 사무엘의 목소리가 벌이 윙윙대는 것처럼 들렸다. 공작에게 오늘 아침 소문을 따져 묻는 것도, 그를 유혹하는 것도 모두 실패한 것이다. 그녀의 빛나는 금발이 바르르 떨렸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단장한 보람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누구한테 보이려고 이렇게 꾸몄는데…….’
더 가냘파 보이려고 눈을 뜬 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그런데 공작은 그녀의 이런 고운 모습에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몹시 자존심이 상한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딴 계집은 안고 난리 치면서, 왜 나는 봐 주지도 않아?’
지오프리 카스피언과 어울리는 사람은 바로 그녀였다. 분노로 부들부들 떠는데 옆에서 계속 사무엘이 귀찮게 굴었다.
“라비니아. 볼이 빨개. 얼른 마셔.”
“내가 지금 이딴 거 먹게 생겼어?”
라비니아는 지금 사무엘이 베푸는 친절이 짜증스러웠다. 그녀는 자꾸 들이미는 레모네이드 컵을 받아서 그대로 바닥에 집어 던졌다.
쨍그랑~!
유리컵은 단숨에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상큼한 레몬 냄새가 사방으로 훅 번졌다. 사무엘은 사방에 튄 유리 조각과 레몬 조각을 보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네가 이걸 먹고 싶다고 해서…….”
“헛소리는 그만 지껄이고, 당장 가서 공작님이 어디로 가신 건지 알아 와.”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라비니아.”
지금의 라비니아는 그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병신.”
망연자실한 표정의 사무엘의 어깨를 세차게 민 라비니아가 짧게 조롱을 건넸다.
“라비니아. 같이 가.”
이런 취급을 당해도 사무엘은 도무지 라비니아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녀를 봐 왔고, 또 그는 라비니아를 향한 남모를 감정을 키우고 있었다.
‘누구도 알아채서는 안 돼.’
제국 내 사촌 간의 혼인은 흔했지만, 이것은 허락받지 못할 감정이었다.
‘그녀는 라비니아 베일이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사무엘의 아버지는 형인 베일 백작에게 평생 굽신대면서 살았다. 그런 주제에 감히 라비니아를 마음에 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처럼 그녀를 더 열심히 보살펴 줘야지.’
이것이 라비니아를 향한 그의 애정을 드러내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 * *
점심때가 다가오자 미오는 괜히 초조해졌다. 이 시간쯤 되면 몸이 절로 반응했다.
‘같이 밥 몇 번 먹은 게 고작인데…….’
이렇게 의식할 것은 또 뭐람. 하지만 이 상태로는 먹은 게 고스란히 체할 것 같았다.
‘이마가 아프니까 핑계를 댈까.’
손으로 이마에 감긴 붕대를 더듬대다가 그녀도 모르게 지오프리를 떠올렸다.
달빛 아래 빛나던 그의 날카로운 옆모습이 아직 눈에 선했다. 지오프리의 손이 닿았던 곳이 아직도 뜨거운 것 같았다. 아무런 의미 없는 손길과 시선에도 그녀는 속수무책으로 빠져들었다.
‘각인 때문이야.’
그냥 몸이 반응하는 거지.
그녀는 절대로 지오프리를 의식하는 게 아니라고 중얼댔다.
하지만 그녀도 모르게 시계를 다시 살폈다.
똑똑.
가끔 시중들어 주는 하녀가 방을 찾았다. 그녀는 로렌과는 전혀 다른 성격이었다.
‘그래서 편하다니까.’
미오는 그녀를 공기쯤으로 여기는 상대가 고마웠다. 이곳에서는 과도한 관심을 받아서 자주 피곤했다.
오늘도 무심한 하녀는 인사도 없이 창부터 벌컥 열었다. 그러고는 곧장 먼지를 떨어내기 시작했다.
‘그래. 공기가 좀 텁텁하기는 했지.’
로렌이 환자는 바람을 쐬면 안 된다고 창을 절대 못 열게 했었다. 한순간 속이 뻥 뚫렸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섞인 정원의 꽃향기가 코를 간지럽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청소에 열중하는 하녀를 보면서 미오가 싱긋 웃었다.
‘예전 나랑 비슷해.’
미오는 학창 시절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지 못하고 교실 구석에서 시간을 보냈다. 친구를 사귀는 것이 싫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때는 그럴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으니까…….’
방과 후에 늘 아르바이트를 했던 터라 누군가와 교류할 시간이 없었다. 물론 한 번도 친구를 사귀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딱 한 명 있었어.’
하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우정은 그 끝이 좋지 않았다. 학기마다 손쉽게 만났던 여왕벌 무리는 항상 누군가를 소외시키는 것을 소일거리 삼았다.
‘그때 목표물이 내가 되었지.’
가난하고, 부모도 없는 그녀를 공격하는 것은 아주 손쉬운 일이었다. 힘든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단 하나의 친구가 그녀의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너무 어려서 혼자 그런 일을 견뎌 내는 방법을 몰랐다.
‘왜 그래?’
그 무리에게 공격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하나뿐인 친구가 언젠가부터 그녀를 피했다. 영문을 몰랐던 미오는 무작정 친구에게 매달렸다.
‘내가 뭘 잘못했어? 그런 거라면 이야기해 줄래? 내가 고칠게. 응?’
하지만 간절한 애원에도 친구는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때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처음부터 가진 게 없었지만, 마치 모든 것을 다 잃은 기분이었다.
‘너랑 어울리면 걔도 따돌리겠다고 협박했다더라. 그러니까 걔가 너와의 우정이랑 왕따를 저울에 달아 본 거야.’
미오의 슬픔에 딱지가 앉고 새살이라는 무감한 눈을 갖게 되었을 때, 누군가가 지나가는 말로 알려 주었다. 상대는 지나간 가십에 불과하다는 투였지만, 미오는 차마 웃을 수 없었다.
‘그랬구나.’
그때 미오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좋아하던 친구가 미오 때문에 고통받는 것을 보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혼자만 견디는 데 제법 이력이 나 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상처받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혼자 있는 것이 괜찮았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왠지 쓸쓸해 보이는 하녀의 등이 신경 쓰여서, 평소 하지 않던 행동을 했다.
“이름이 뭐라고 했죠?”
“저 말입니까?”
타조 털로 만든 먼지떨이를 열심히 휘두르던 하녀가 멈칫했다. 그녀의 등을 바라보던 미오가 어설프게 감사를 전했다.
“네. 항상 도움 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베스라고 합니다. 저는 그저 할 일을 하는 것뿐이니까…….”
그런 인사는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차마 뱉을 수가 없었다.
‘왜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거야?’
먼지떨이를 잡은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누구도 하녀의 이름을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녀가 시중을 드는 라비니아 아가씨도 정작 베스의 이름조차 몰랐다. 그게 당연한 일이라서 어떤 의문을 품은 적도 없었다. 하녀는 지시를 잘 따르면 그만이었으니까.
‘괜히 감동할 이유가 없어.’
상대는 공작의 침대에 숨어들거나 일부러 다쳐서 주인의 관심이나 사는 앙큼한 여자다. 베스는 그녀가 얼마나 상대를 증오하는지를 다시금 되새겼다. 그때 미오가 다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진짜 고맙다고 이야기해 주고 싶어요.”
미오의 말은 진심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책에 빙의해서 죽을 고생을 했고, 실제로도 여러 번 죽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퍽 근사한 경험을 많이 했다. 그중에서 이렇게 좋은 방에서 귀족 아가씨라도 된 것처럼 지내는 데는 베스라는 하녀의 도움이 컸다. 차가워 보여도 할 일을 야무지게 잘했다.
먼지떨이를 아래로 축 늘어뜨린 하녀가 서둘러 하던 일을 마무리했다.
“저는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감사의 말을 듣자 베스의 볼이 화끈거렸다. 그녀가 이제껏 했던 심술궂은 일이 한 번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찬 바람이 환자에게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하지만 일부러 창을 열었다.
거기다 먼지를 떨어댔으니 방의 공기는 최악이었다. 아픈 사람에게 냉수로 목욕을 하라고 했던 것도 그녀였다.
‘왜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거지?’
청소 도구를 미처 챙기지도 못한 베스가 후다닥 사라졌다.
방에 홀로 남은 미오가 낭패 어린 표정을 지었다.
“역시 괜한 짓을 했나 보네.”
로렌의 흉내를 내 본 것이 실패한 게 틀림없다. 로렌처럼 타고나길 온화한 봄 같은 사람과 응달에서 자란 이끼 같은 그녀가 같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
“친구는 필요 없어.”
베스가 남기고 간 먼지떨이를 보면서 희미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