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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23)화 (23/123)

23화 데이트 두 번 했다가는 죽을지도 모릅니다

미오의 붉은 얼굴을 확인한 로렌은 이제 아예 확신에 찬 고갯짓까지 했다.

“이곳은 워낙 좁아서 비밀이 없답니다. 그러니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미오는 뒤의 말은 흘려듣고, 앞의 말에만 집중했다.

‘……비밀이 없는 곳이라면.’

이곳 고용인 모두가 지오프리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걸까. 그들은 공작의 기행을 감춰 주고 있는 걸까. 아니면 지오프리는 고용인조차 속이고 있는 걸까.

순간 머리가 다시 깨질 듯이 조여 왔다.

“공작님은 어째서…….”

어릴 때부터 지오프리를 봐 왔다던 로렌에게 묻고 싶었다. 왜 지오프리는 이렇게 변해 버린 거냐고, 어린 시절의 그 모습은 어디 간 거냐고.

‘그는 왜 한밤중에 시체를 묻는 어른으로 커 버린 거죠?’

하지만 입을 달싹대던 미오가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모두 하기는 주저되었다.

‘로렌이 모르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또 그녀가 안다는 사실을 들켜서 좋을 것 같지도 않았다. 어제 일을 떠올리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정말이지 기이한 경험이었다.

쇠 비린내를 훅 풍기는 지오프리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턱을 감싸 쥐는 순간 진짜 죽는 줄 알았다.

‘시체를 파묻었을지도 모르는데…….’

두려움만 느껴야 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미오는 그의 손이 닿는 순간 가슴이 두근댔다. 지오프리와 맞닿은 피부가 팔딱댔다.

‘안겨서 돌아오는 시간이 싫지 않았다고 하면 내가 완전히 미쳐 버린 걸까.’

아무래도 어제 너무 놀란 탓에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된 게 틀림없었다. 애써 붉어지는 볼을 쓸어내리는데, 로렌이 그녀의 옆구리를 살포시 찔렀다.

“맙소사! 우리 공작님 생각만 해도 그리 좋은 거예요?”

“아…….”

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저런 식으로 해석해 버리는 로렌을 도무지 이길 수가 없었다. 미오가 아무런 답 없이 고개를 푹 숙이자, 로렌이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에도 말입니다. 공작님이 미오 아가씨 상처를 꼼꼼히 확인하라고 여러 번 당부하셨답니다. 얼마나 섬세하게 챙기시는지 몰라요. 그리고 새로 온 손님은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어요. 그분은 사무엘 님의 친척일 뿐이니까요.”

베일가가 얼마나 세력을 떨치고 있는지, 얼마나 재산이 많은지는 굳이 알릴 필요가 없었다.

‘이럴 때는 가풍이 원망스럽다니까.’

찾아온 손님을 내치지 않는 것은 아가타 님의 부모님 이전부터 내려온 가문의 전통이었다. 하지만 왜 하필 공작님의 첫사랑이 이제 시작되려는 좋은 때에 베일 영애가 찾아온 건지 달갑지 않았다.

‘내가 책임지고 베일 영애를 막아 내야겠어.’

마치 그녀가 벌써 안주인이라도 된 것 같은 눈길로 성안 이곳저곳을 살피는 모습이 영 마뜩잖았다.

로렌이 한참 의지를 다지는데 미오는 완전히 지쳐 버렸다.

“저는 좀 쉬어야겠어요.”

어제저녁에 오랜만에 무리하게 움직인 데가 무서운 광경도 목격했고, 이마도 심하게 다쳤다. 피곤하지 않은 게 이상한 상황이었다.

“내 정신 좀 봐요. 아픈 사람을 붙잡고 너무 주책을 떨었네요. 얼른 쉬어요.”

콧노래까지 부르던 로렌이 방을 나가자 미오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데이트를 두 번 했다가는 목숨이 남아나지 않을걸?”

어째서 어제의 일이 데이트로 둔갑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소름이 돋은 어깨를 쓸던 미오가 고개를 흔들었다. 양손이 붉은 지오프리와 이마가 깨져서 피 칠갑을 한 미오를 누가 봤다면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게다가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어.’

미오를 안은 지오프리는 성으로 들어와서 층계를 오르면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턱을 잔뜩 굳히고 있는데 불편해서 숨 쉬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나를 무슨 짐짝 다루듯이 했는데 그게 무슨 데이트야.’

단숨에 층계를 오른 지오프리는 발로 침실의 문을 걷어찬 후에 미오를 침대에 눕혀 주었다. 사실 층계를 올라오면서부터는 몸이 아주 좋지 않아서 정신을 반쯤 잃었다.

‘…….’

침대에 그녀를 눕힌 그가 나가면서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도무지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광기와 거리가 조금 멀다고 생각했던 지오프리가 어쩌면 원작과 똑같은 인물일지도 모른다.

“이대로 곁에 있다가는 유혹은커녕 내가 먼저 죽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의 곁을 떠나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에는 아직 준비가 부족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겠어.”

진통 작용을 하는 차를 마셨지만, 미오의 두통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 * *

“사무엘. 느리다! 느려!”

“공작님, 제가 대련 상대가 될 리가 없지 않습니까. 헉헉.”

몸에 딱 붙는 검은 바지에 소매가 풍성한 흰 셔츠를 걸친 지오프리가 사무엘을 구석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검을 휘두르는 지오프리의 모습은 멀리에서 보면 춤을 추는 것처럼 동작이 유려하였다. 하지만 사무엘의 몸짓은 상대를 막는 데 급급해서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사무엘, 왼쪽에 틈이 있다.”

날카로운 검이 사무엘의 왼쪽을 깊숙하게 노렸다. 깜짝 놀란 사무엘이 몸을 피하면서 울상을 지었다.

“공작님, 오늘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차라리 벌을 내려 주십시오.”

사무엘은 본래 검술보다는 다른 일에 능한 편이었다. 원래는 검도 겨우 들 정도였지만, 지오프리 아래에서 수련을 거듭한 끝에 보통 수준까지는 이를 수 있었다. 사무엘의 종아리가 덜덜 떨리는 것을 확인한 지오프리는 그제야 공격을 거두었다.

“잠시 쉰다.”

그대로 등을 돌린 지오프리는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기분이 엉망진창이었다.

얼마 전 사무엘이 곤란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공작님이 아끼시던 꽃이 전부 죽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오래 돌봐 주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사무엘이 말하는 것은 그가 3년 전에 심었던 것으로 호수 주변을 아름답게 장식하던 수선화였다.

‘주인님.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니까, 내 손으로 묻어 주겠다.’

이런 대화를 나눴었다.

지오프리는 남몰래 화초 가꾸기에 몰두하고는 했다. 살아생전에 이 정원을 사랑했던 어머니를 추억하는 그만의 방식이었다.

드러내고 할 수 없는 탓에 주로 야심한 시간을 틈타서 화초를 관리했다.

3년을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으니 화초가 시든 것도 당연한 일이다.

‘사람이나 화초나 애정을 받지 못하면 말라비틀어지는 법이거든.’

어제저녁엔 나갔던 일이 빨리 끝나서 수선화를 새로 심을 여유가 있었다.

새로 구한 모종을 심고 생장에 좋다는 비료를 듬뿍 구해 왔다. 부서지는 달빛에 시간이 멈춘 것 같은 호숫가는 완벽 그 자체였다. 좀처럼 감상에 젖어 드는 법이 없던 그의 인생이 모처럼 단순해지는 순간이 찾아왔다.

‘어머니와 함께했던 일인데…….’

도르프 제국 출신 어머니는 카스피언의 황량한 풍경에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생명력이 강한 모종을 구해서 이 정원을 가꿨었다.

‘그렇게라도 고향을 추억하고 싶으셨겠지.’

드레스 자락이 젖는데도 활짝 웃어 주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던 찰나였다. 그래서 더없이 소중한 순간이었는데, 누군가의 훼방으로 모두 망쳐 버렸다.

‘미오, 미오 그 여인 때문에 말이다.’

그는 연애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수시로 접근하는 여인들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지오프리의 가슴속에는 복수심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그에게 어느 날 찾아온 미오는 자꾸만 작은 돌을 던졌다.

그런 맹목적인 애정이 이 세상에 아직 존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의 신비로운 두 눈은 항상 그를 따라다녔다.

‘응해 줄 필요가 없는 마음이다.’

하지만 그녀의 고백이 거슬렸다.

지오프리는 어제 미오를 침대에 눕혀 주면서 잔뜩 이를 갈았다.

‘내가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 아닌 것에 감사해야 할 거야.’

그렇지 않았더라면 당장 미오를 쫓아냈을 것이다.

그녀의 어리석은 행동은 그에게 동정심은커녕 분노만 불러일으켰다.

‘사랑 그까짓 것 때문에 이렇게 몸을 돌보지 않는다면 다음은 없어.’

그때는 맹세코 미오를 벼룩이 득실하고, 부상병으로 넘쳐나는 일반 병원으로 쫓아 버리겠다고 다짐했다.

그때였다.

‘아파. 너무 아파.’

상처 때문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는지 미오가 끙끙대자 지오프리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아픈 사람을 앞에 두고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한 지오프리가 거친 말을 내뱉었다. 눈앞의 저 골칫거리를 생각하면 이렇게 종종 열이 뻗쳤다.

“꺅! 공작님!”

지오프리의 상념은 근처에 다가온 라비니아가 비명을 지르면서 깨졌다. 그가 무심결에 휘두른 검집에 맞을 뻔했는지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지오프리는 소란을 떠는 상대를 보면서 그대로 몸을 틀었다. 지금은 가만 누워서 끙끙 앓고 있는 그 여인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라비니아. 괜찮아?”

사무엘이 곧장 달려와서 잡아 준 덕에 라비니아는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이것 놔주면 좋겠어.”

그의 손을 부채로 탁 쳐 낸 라비니아가 고개를 쳐들었다.

“들어가서 레모네이드 좀 가지고 와.”

“그건 하인에게 지시하면…….”

“사무엘, 직접 부탁해.”

엄연히 이런 일은 사무엘이 할 법한 것이 아니었다. 사무엘이 공작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길을 보냈지만, 지오프리는 등을 돌린 상태였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곧 사무엘이 시야에서 멀어지자 라비니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는 옷매무시를 정돈한 후 얼른 공작의 곁으로 다가섰다.

“공작님. 땀을 많이 흘리셨어요.”

부채를 팔랑대면서 공작의 주변을 알짱대는 그녀의 눈이 커졌다.

‘어쩜 이렇게 야할까.’

격렬한 검술로 공작이 걸친 흰 셔츠가 피부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탄탄한 가슴 근육이 셔츠 아래로 꿈틀댔고, 굵은 허벅지에 눈길이 절로 갔다.

‘수도에 있는 애송이들과는 전혀 달라.’

카스피언 공작은 전장에 한 번 나가 본 적도 없는 귀족 사내와는 풍기는 느낌부터 달랐다.

‘당장 그의 품에 안기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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