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피보다 붉게 물든 그의 손
당장 지오프리에게서 벗어나고 싶었으나 다리가 풀린 데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당장 이 손을 놓지 않으면 진짜 매운맛을 볼 거야!’
계속 이러면 저 손을 꽉 물기라도 해야지.
숨통이 조이는 가운데도 그녀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미오의 턱을 잡은 손에서 힘이 풀렸고, 지오프리는 이제 다른 손으로 그녀의 앞머리를 들췄다.
‘보지 마!’
기다란 손가락이 미오의 이마에 막 닿으려 하자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모습을 지오프리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도대체 뭐 하려는 거야.’
미오가 손길을 피하려고 움찔대는 사이 그의 손가락은 그녀의 이마를 부드럽게 쓸었다.
“이렇게 자꾸 다치면 어쩌자는 거지.”
손길과는 사뭇 다른 냉랭한 음성에 미오가 눈을 번쩍 떴다.
‘나를 걱정하는 거야?’
방금까지 누군가를 파묻은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다정한 손길이었다.
그때 미오의 이마에서 흐른 피가 콧잔등을 타고 풀 위로 뚝 하고 떨어졌다. 긴장이 풀렸는지, 상처가 쑤셔 오기 시작했다. 울상이 된 미오가 이마로 손을 뻗자, 그가 그녀의 손등을 탁, 쳤다.
“감염이라도 되면 어쩌려고 상처를 만지는 건가?”
노골적인 힐난에 미오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아니, 자기는 흙 파던 손으로 내 이마를 방금 만졌으면서?’
근처 풀을 한 움큼 뜯은 지오프리가 그것을 미오의 이마에다 댔다. 흙이 후드득 떨어지는 잡초보다는 그녀의 손이 더 깨끗하지 않을까. 불만스러웠지만, 그런 내색조차 할 수 없었다. 한참 지혈을 한 뒤 그가 손을 뗐지만, 미오는 꼼짝하지 못했다.
‘……무서워.’
덜덜 떠는데 그의 비난이 이어졌다.
“물에 빠져 죽으려고 들더니, 이제는 이런 방법까지 쓰는 건가? 대놓고 시위라도 하는 거야?”
“……네?”
저번에 오리를 잡아먹으려다 실패했을 때도 그랬지만, 가끔 그가 하는 말이 외계어처럼 들렸다.
‘하나도 모르겠어. 그냥 무서워서 도망치다가 넘어진 건데, 무슨 말이야?’
피가 나는 것도 서러운데 괜한 오해까지 받자 너무 서러웠다. 비릿한 피 냄새도 싫었고, 그에게 이런 취급을 받는 것도 끔찍했다. 손으로 눈가를 훔치자 소매에 피가 묻어났다. 미오가 어깨를 들썩대기 시작하자 그가 큰 소리를 냈다.
“울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나는 우는 여자라면 딱 질색이니까…….”
하지만 말과는 달리 지오프리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너무 아파서 울음을 참을 수가 없어요.”
사실이었다.
상처를 한번 인식하고 나자 이마가 쪼개질 것처럼 쑤셨다. 게다가 여전히 그가 너무 가까이 앉아 있어서 불편했다.
‘그에게서 쇠 비린내가 나.’
익숙하게 맡아 본 냄새였다. 축 처진 짐승의 몸에서 흐르던 붉은 액체. 그것은 온도를 잃어서 금방 식어 버렸지만, 냄새만은 숲에 오래 배어 있었다. 그 생각에 미오가 헛구역질했다.
“……우욱.”
“이래서야 원…….”
지오프리가 혀를 차면서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지 성가시기 짝이 없는 여인이었다.
흘러내린 피가 거미줄처럼 가느다란 은발에 점점이 튀어 있었다.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모습이 갓 태어나 비틀대는 송아지처럼 보이기도 했다.
‘왜 한밤중에 나를 쫓아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이대로 버리고 갈 수는 없었다.
“……하. 정말.”
긴 한숨을 내쉰 지오프리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갑작스레 공중에 붕 뜬 미오는 팔다리를 열심히 버둥댔다. 이대로 그가 성으로 사라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그녀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내려 주세요. 괜찮아요.”
그녀의 저항에 지오프리가 차갑게 대꾸했다.
“가만있어.”
“괜찮다니까요. 공작님.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전히 그녀의 태도가 못마땅한 지오프리가 차갑게 굴었다.
“떨어지기 싫으면 손으로 내 목을 안아.”
“저 걸을 수 있어요. 진짜예요.”
“지금 피를 많이 흘려서 눈도 제대로 못 뜨는 데다 다리도 온통 상처투성이야. 밤새 여기에 있을 작정은 아니겠지? 그랬다간 분명 과다 출혈이나 저체온으로 사망할 거야.”
꽁꽁 얼어서 눈도 못 감고 죽은 그녀의 모습이 불쑥 떠올랐다.
“……헉.”
“피 냄새를 맡고 늑대라도 올지 모르지.”
“그렇다면 실례하겠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에 미오는 조심해서 지오프리의 목에 손을 감았다. 불편한 상황이긴 하지만, 그의 말이 모두 옳았다. 게다가 지금 그녀는 지오프리를 열렬히 사랑하는 연기를 해야 했다.
“……흠.”
지오프리는 얼굴이 피범벅이 된 그녀를 안아 든 채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보폭이 넓어서 그가 움직일 때마다 미오는 땅으로 곤두박질칠 것 같았다. 가뜩이나 피 냄새 때문에 울렁거리는 속이 더 뒤집힐 것만 같았다.
“조금만 천천히…….”
그의 목을 잡고 있던 미오가 한쪽 손으로 지오프리의 가슴을 두드렸다. 아무런 답 없이 걸음의 속도를 줄인 지오프리의 입꼬리가 남몰래 살짝 올라갔다.
* * *
‘어제 말이야. 공작님이 미오 아가씨를 다정하게 안고 침실로 들어가셨대.’
‘아가씨가 공작님 목을 꽉 안고 있었다네.’
‘두 분이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봤다던데?’
공작 성의 고용인 모두가 간밤의 낭만적인 사건으로 시끌벅적했다.
“어허! 다들 왜 이렇게 산만한 게야!”
주방에 들른 로렌이 모두에게 호통쳤지만, 어쩐지 평소보다 기합이 들어가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앞치마에 손을 닦던 로렌이 터져 나오는 미소를 간신히 숨겼다.
‘내가 공연한 걱정을 했었나 보네.’
지오프리 카스피언. 아가타 님의 유일한 혈육이자 그녀의 주인인 공작님은 그녀에게는 든든한 등불이자 유일한 걱정거리였다. 아가타 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그녀에게 신신당부하였다.
‘불쌍한 우리 아들, 내 아들을 잘 돌봐 줘. 유모.’
‘걱정하지 마세요. 이 비천한 목숨을 걸고 황태자 전하를 지키겠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모신 황후를 먼저 떠나보낸 로렌은 내내 죄책감에 시달려 왔다. 아가타 님에게 철석같이 약속했건만, 주인이 황태자위에서 폐위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일개 하녀장이 무슨 힘이 있겠냐마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그것뿐인가. 변방으로 쫓겨나는 것을 지켜봤으니 말이야.’
황제는 호의를 베푸는 척 이곳 성 하나를 남긴 채 지오프리에게 내려졌던 영지와 재물을 모조리 거두어 갔다. 죄인의 아들이기에 속죄해야 한다고 했었다.
‘디아나의 이름으로 아가타와 지오프리의 재산을 빈민에게 기부하겠다.’
분명 황제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 재산이 어디로 흘러갔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보나 마나 카트리나 황후의 주머니에 들어갔겠지.’
하지만 증거도 없었고, 밝힌다손 쳐도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녀에게는 지오프리가 여전히 카스피언 제국의 주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속에 담아 둘 뿐, 이제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공작님이 좋은 짝을 만나서 행복하게 사셨으면…….’
그것이 로렌의 마지막 소원이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잘 풀리니 어찌 가만있겠어.’
주인님의 품에 안겨 있던 미오를 처음 봤던 날, 예감이 좋았다. 어쩐지 이런 순간이 찾아올 것만 같았다.
‘늙은이의 감이라는 것은 때로는 아주 용하거든.’
로렌은 헛물만 잔뜩 켜고 있는 라비니아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고개를 조아렸다.
“내 아침으로 부드러운 단호박수프를 준비하라고 일러. 그리고 공작님은 지금 어디 계시지?”
일국의 공주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당당했다. 하지만 다른 말로는 퍽 무례해서 로렌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로렌은 오랜 경험을 살려서 전혀 내색하지 않고 예를 갖춰 답했다.
“라비니아 아가씨. 식사는 이르신 대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공작님은 지금 검술 훈련을 하실 시간입니다. 그러면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흠잡을 데 없는 예법으로 무릎을 살짝 구부려 인사하자 라비니아가 시큰둥한 얼굴로 로렌의 옆을 빠르게 지나쳤다.
“여기는 어떻게 된 게 전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방금 만난 하녀장은 자기가 아직도 황궁에서 일하는 줄 아는지 고개를 뻣뻣하게 쳐들고 있었다.
“웃기고 있어.”
그녀가 이곳의 안주인이 되면 쳐 내야 할 가지가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사소한 일로 화를 낼 때가 아니었다.
“당장 공작님을 만나야 해.”
아침에 막 전해 들은 기막힌 소식에 라비니아는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감히 천해 빠진 게 내 남자한테 눈독을 들여?”
발에 힘주어서 걷는 라비니아의 볼이 분노로 달아올라 있었다.
* * *
미오는 아침부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새벽부터 의원이 두 명이나 다녀갔다. 이마와 깨진 무릎에 흰 천이 둘둘 감겨 있었다.
‘진짜 귀족 아가씨라도 된 것처럼 이게 뭐야.’
게다가 아까부터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치료를 받는 내내 로렌이 하트로 변한 눈으로 그녀를 지켜본 탓이었다.
‘왜 또 저런 눈으로 나를 보면서 히죽히죽 웃는 거지?’
치료가 대충 끝나고 의원이 모두 돌아가자, 로렌이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았다.
“이만하길 다행이에요.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가만 누워서 치료받는 것밖에 안 했는데, 왜 칭찬을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에요. 제가 또 번거롭게 해 드렸네요.”
이불을 끌어 덮어 주던 로렌이 그녀를 향해서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나저나 다음부터 두 분 말입니다. 데이트를 조금만 살살 하셔야겠어요.”
“네? ……데이트라뇨.”
로렌의 말에 이마의 상처가 다시 욱신대는 기분이었다.
“부끄러워할 거 없답니다.”
로렌의 은밀한 음성에 미오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데이트의 ‘ㄷ’ 자와도 닮은 구석이 없는데요?’
전하지 못할 말을 속으로 외치는 그녀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