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지오프리 카스피언의 은밀한 취미
라비니아가 자기 분을 못 참고 기절해서 나가는 것을 본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나도 체한 것 같아.”
미오가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면서 인상을 썼다.
역시 마음 편한 것이 최고였다. 아무리 풍성한 식사라도 이런 불편한 상황에서는 소화가 잘될 리가 없었다. 맛있는 것을 먹고서도 속이 좋지 않아서 기분이 영 별로였다.
“한숨 푹 자고 나면 좀 낫겠지.”
침실에 돌아간 그녀는 숲에서 지낼 때처럼 웅크리고 누워서 잠을 청했다. 하지만 아침부터 잠을 많이 잔 탓에 쉬이 잠들지 않았다.
“양 한 마리, 오리 두 마리, 양 세 마리…….”
통통하고 맛있어 보이는 양과 오리를 수백 마리 세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건가?”
이곳에서는 사냥하거나 잠자리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이전과 비교해서 활동량이 눈에 띄게 줄었다.
“이래서는 건강해지는 게 아니라 굼떠지겠어.”
영영 이대로 살 수만 있다면 상관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언제 여우로 변할지 모른다. 빨리 달리지 못하면 그녀처럼 약한 짐승은 금방 도태될 것이다.
“하지만 대놓고 운동을 할 수는 없어.”
이곳 사람들 모두 그녀를 손대면 부러질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도록 내버려 두는 게 나한테 이득이긴 해.”
‘공작님을 짝사랑하는 가여운 여인.’
듣기에 좀 오글거리기는 하지만, 그녀만 참으면 그만이었다.
“더한 것도 했잖아!”
지오프리에게 고백을 몇 번이나 했는지 셀 수도 없었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던 그녀가 침대로 내려와서 씩씩하게 섰다.
“이 정도면 달리기도 가능하겠어.”
옷장을 열어서 최대한 어두운 로브를 꺼내서 걸친 미오는 조심스레 바깥을 살폈다. 카스피언 공작 성은 어둠 속에 깊이 잠들어 있었다. 경비가 삼엄한 편이 아니라서, 그녀가 밤에 복도에 나온 것을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것 같았다.
“하긴 지오프리 카스피언이 있는데 어느 도둑이 여길 오겠어.”
게다가 이곳은 화려한 느낌과는 거리가 멀었다. 벽에는 수많은 초상화가 걸려 있었고, 복도에는 조각상이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값나가 보이는 번쩍거리는 물건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잘 모를 때는 지오프리가 지금과는 다른 생활을 할 줄만 알았다.
“매일 파티를 열어서 방탕하게 지낸다든가…….”
그녀가 본 지오프리의 일상은 정말 답답해서 숨이 막힐 정도였다. 검술 연습, 회의와 서류 검토, 승마하면서 영지 돌아보기. 그 외에 다른 것은 잘하지 않았다. 파티 초대는 모두 거절했고, 이곳에서 파티를 여는 자체는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쓸데없이 또 지오프리 생각을 하고 있었네.”
주먹을 힘차게 쥔 미오가 살금살금 복도를 지나쳤다.
복도를 밝히는 희미한 불빛 아래 오래된 액자에 미오의 그림자가 어른댔다.
“에취~!”
바깥은 생각보다 더 쌀쌀했다. 볼을 스치는 칼바람에 망토의 모자를 푹 눌러쓴 미오가 인상을 썼다.
“일을 다 끝내면 따뜻한 에카라오에 가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가 보지 않은 곳이라서 조금 걱정되기는 했지만, 카스피언만 아니면 어디든 괜찮을 것 같았다.
“까마귀가 거짓말한 거면 어쩌지?”
그녀는 숲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대체로 두루두루 잘 지냈다. 하지만 까마귀와는 친구라고 말하기는 좀 어려웠다.
“거짓말쟁이에 악담만 하는 녀석이란 말이야.”
까마귀를 떠올리자, 겨울 숲이 눈 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숲에서 미오는 별종 중 별종이었다. 사냥 능력이 없다시피 한 데다 붉은 피가 흥건한 날것을 잘 먹지 못했다. 열매와 풀을 주식으로 삼았고, 가끔 사냥꾼이 먹다가 남긴 구운 고기 찌꺼기를 먹었다.
과거 생각을 하며 걸어 들어오다 보니 제법 깊숙한 곳에 도달했다. 그녀는 몸을 움직이기 전 사방을 살폈다. 누구에게 들켜서는 안 되는 일이라서 신중해야 했다.
“아무도 없는 게 확실해.”
하긴 이 밤에 호숫가에 나올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이곳에서는 밤마다 노래하는 인어가 나온다든가 하는 괴이한 전설이 있다고 했다.
“인어는 하나도 안 무서워.”
사실 무서운 것은 먹을 것도 아닌데 무차별적으로 짐승을 학살하는 인간들이었다.
“그러면 생존을 위해서 하나, 둘~!”
두 팔을 벌려서 제자리에서 풀쩍풀쩍 뛰어 보았다. 거추장스러운 드레스가 발목에 걸려서 생각하는 멋진 동작은 취할 수 없었다. 또 오랜만의 격렬한 움직임에 고작 몇 분 만에 그녀는 녹초가 되었다.
헉헉.
등이 축축하게 젖었고,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래서 운명의 상대를 찾기도 전에 먼저 죽겠네.”
숨이 가빠서 아무래도 잠시 쉬어야 할 것 같았다. 미오는 연못 근처에 있는 큰 나무에 기대섰다. 달빛이 부서지는 물 표면을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에 아련한 감정이 깃들었다.
“저기에서 그 통통한 오리를 놓쳤지.”
날것은 먹지도 못하면서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했는지 모른다.
“그날 생각만 하면 진짜…….”
수치스러워서 이대로 증발해 버리고 싶었다. 미오가 고개를 가벼이 흔들자 나뭇잎이 살랑살랑 흩어졌다.
“아, 나무 냄새 너무 좋다.”
돌연히 몸을 돌린 미오가 나무를 꽉 껴안았다. 나무는 정말이지 그녀에게 아낌없이 제 모든 것을 내어 주었다.
낙엽 더미가 없었다면 빈약한 털을 가진 미오는 숲에서 동사했을 것이다. 또 사나운 짐승을 피해서 그녀가 나무에 오르지 못했다면, 이미 누군가의 간식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참 나무를 얼싸안고 옛 추억을 더듬는데, 가까이에서 땅을 파헤치는 소리가 났다.
“……?”
분명 근처에 누군가가 있었다.
미오는 발소리를 내지 않고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가 봤다. 누가 그녀의 지금 모습을 봤다면 입을 막아 버릴 작정이었다.
‘후환을 살려 둬서는 안 되니까.’
호박빛 눈에 음험한 기운이 서렸다.
살금살금 다가서자 연못 물이 찰랑찰랑 시작되려는 그쯤에 누군가가 웅크리고 있었다. 잘 다듬어 둔 측백나무 뒤에 몸을 숨긴 그녀가 수상한 움직임을 관찰했다. 어깨가 넓고 몸집이 큰 것을 보면 남자가 분명했다.
‘……야밤에 저기에서 뭘 하는 거지?’
남자는 수선화가 핀 곳을 마구 파헤쳤고 한참 쇠붙이와 돌과 땅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퍽퍽퍽.
그때 기이한 행동을 하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미오는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헉.”
그리고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입술 사이로 제법 큰 소리가 새어 나갔다. 급하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 봤지만, 상대에게 들켰을지도 모른다.
‘꼭꼭 가리고 있기는 해도 저 서늘한 눈을 못 알아볼 리가 없어.’
저 남자는 분명 지오프리였다.
저녁에 급한 일이 생겨서 그녀와 라비니아를 내팽개쳐 두고 어딘가 갔다고 했던 그가 왜 지금 땅을 파고 있는 거지?
일찍 돌아왔을 수는 있다.
혹은 아예 나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미오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그의 커다란 두 손이었다.
‘손이 피투성이야…….’
지금 지오프리의 양손이 달빛 아래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피, 지오프리, 광기.’
미오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창백하게 질렸다.
고요하던 정원에 매서운 북풍이 한차례 몰아쳤고, 미오의 머리를 가리고 있던 두건이 훌렁 벗겨졌다. 그러자 혼란스러운 머릿속에 뭔가 떠올랐다.
‘정원 구석구석에 시체가 파묻혀 있어서 밤이면 카스피언가에서 유령을 종종 볼 수 있다던데.’
어디서 들은 말인지, 책에서 읽은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았다. 확실한 것은 그녀가 그것을 똑똑히 기억한다는 것이었다.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고 생각하자, 미오의 턱이 덜덜 떨렸다.
‘맞아. 저번에도 이상한 일이 있었잖아.’
일전에 우연히 지나다 지오프리와 사무엘과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주인님. 죽은 것을 되살리는 법은 없는 법입니다.’
‘내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니까, 내 손으로 묻어 주겠다.’
그때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누가 죽었다는 거지? 아니, 누가 누구를 죽인 걸까.
‘……지금 지오프리는 누구를 묻은 거야?’
요즘 그와 가까이 지내는 바람에 판단력과 경계심 모두가 흐릿해졌다. 원작에서부터 지오프리는 평범한 사람은 절대 될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어쩌다 내가 그와 조금 친해졌다고 착각한 걸까.’
그녀가 좋아하는 지오프리의 체향이 미오의 머리를 둔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오늘 일을 확인하자 지오프리의 지난날이 모두 의심스러웠다.
‘항상 저렇게 은밀하게 시체를 묻는 걸까.’
하지만 지금은 그에게 들키지 않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여기에 있다가는 그녀도 저 옆 구덩이에 파묻힐지도 모른다. 미오는 조심해서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후들대는 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여지질 않았다.
“……어. 어!”
이렇게 중요한 순간 발이 꼬였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버둥대던 그녀는 앞으로 폭 고꾸라졌다.
“……윽.”
돌부리에 이마를 정면으로 박아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지나치게 긴장한 터라 아픈 느낌도 없었다. 들키지 않았을 거라고 중얼대면서 그녀가 두 팔로 풀을 짚을 때였다.
서걱서걱.
풀을 짓밟는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이내 기다란 그림자가 미오의 전신을 완전히 뒤덮었다.
“……또 너인가?”
그녀의 앞에 선 지오프리는 짜증이 잔뜩 섞인 음성을 뱉었다.
‘일단 지금 위기를 모면해야 해.’
그녀가 지오프리가 무엇을 하는지 봤다는 것을 알면 당장 끌려갈지도 모른다. 미오는 고개를 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애원했다.
“저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정말입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미오가 비굴하게 굴었다. 하지만 오늘이 있어야 내일이 오는 법이다. 눈물을 간신히 참은 미오가 손을 싹싹 빌자, 그가 무릎을 세운 채 반쯤 앉았다.
“이건 또 뭐지?”
커다란 손이 그녀의 턱을 잡아 뽑듯이 움켜잡았다.
“……컥.”
미오는 숨통이 막혀서 호흡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두려움에 잠식된 그녀의 눈가로 붉은 피가 온기를 잃은 채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