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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20)화 (20/123)

20화 해피 엔딩은 쉽게 얻을 수 없다

희망에 부풀었던 것도 잠시, 곧 미오의 인생에 적신호가 켜졌다.

“오늘 저녁은 두 분이 드셔야 할 것 같습니다.”

미오가 식당에 내려왔는데, 초대한 당사자인 지오프리가 급한 용무로 나가고 없었다. 아까 제대로 그녀의 매력을 발산하지 못한 것 같아서 단단히 벼르고 왔는데, 미오의 앞에는 짜증 나는 얼굴만 있었다.

‘하필 라비니아랑 밥을 먹으라니.’

식욕이 전혀 동할 것 같지도 않아서, 그대로 방으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또 무도회라도 가는 사람처럼 차려입은 라비니아가 턱을 치켜드는 모습에 호승심이 들끓었다.

‘내가 질 것 같아?’

똑같이 턱을 쳐든 미오가 상대를 향해서 고운 미소를 띠었다.

“라비니아 아가씨. 드레스가 무척 아름다우세요.”

미오의 칭찬에 당황한 라비니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는 지오프리와 단둘이 식사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저딴 계집이랑 나란히 앉아 있어야 하는 거지?’

의자 옆으로 삐져나온 레이스와 리본이 우스꽝스럽게 짓눌려 있었다. 게다가 허리는 얼마나 졸라맸는지 숨을 쉬기 힘들었다. 그녀는 우아하게 장갑을 벗어 내리면서 미오에게 답을 건넸다.

“칭찬 고마워요. 미오.”

“안색이 안 좋은데 괜찮으세요?”

“내가 원래 하얀 편이라서 그래요. 걱정 감사합니다.”

예의가 바르고, 친절해 보이는 라비니아의 모습에 미오는 구역질이 났다. 그녀의 두 얼굴을 제대로 알 길이 없는 사람을 붙잡고 소리치고 싶었다.

‘저 천사 같은 얼굴에 속지 마세요!’

두 사람이 껄끄러운 신경전에도 불구하고 저녁 차림은 완벽했다.

전채 요리로 크림치즈소스를 곁들인 구운 관자가 나왔다. 보기만 해도 침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요리를 보던 미오가 코를 킁킁댔다.

‘고소한 냄새가 나는데.’

한입에 꿀꺽 삼켰는데, 혀끝에서 녹아서 사라졌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 음식이 눈 녹듯이 없어졌다. 황당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대는데, 관자를 작게 썰던 라비니아와 눈이 마주쳤다. 미개인을 보는 듯한 눈빛이 미오의 얼굴을 훑어 내렸다.

“식성이 좋군요. 미오. 아마 내일 일어나면 허리가 늘어나고, 드레스가 작아졌을지 몰라요.”

걱정해 주는 것 같았지만, 실은 잘 먹는 그녀를 조롱하고 있었다. 미오는 개의치 않고 빙긋 웃었다.

“입에서 녹아 버리네요.”

한참 조용히 식사에 몰두하는데, 라비니아가 눈을 내리깔더니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저녁 초대를 받았을 때는 이렇게 갖춰 입는 법이랍니다.”

아직 관자를 썰고 있는 라비니아가 미오의 옷차림을 지적했다. 미오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다음 요리만 기다렸다.

‘헛수고한 줄도 모르고 잘난 척은…….’

어차피 지오프리는 화려한 차림으로 유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심장이 돌처럼 굳어 버렸으니까.’

그것도 모르고 헛물켜고 있는 라비니아가 조금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때 새로운 요리가 나오는 바람에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옥수수수프와 얇게 저민 소고기 요리입니다.”

그녀는 옥수수수프에는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소고기가 담긴 접시를 내려다보던 미오의 얼굴에 실망이 어렸다.

‘고기가 너무 적잖아. 귀족들은 이걸 먹고 배가 부른 거야?’

투덜거리는 것도 잠시, 이내 종이만큼 얇은 소고기가 그녀의 혀에 찰싹 들러붙었다. 씹는가 했는데, 이미 목구멍으로 넘어가 버려서 입맛만 다셨다.

“나는 포도주 한 잔 부탁해요.”

미오의 게걸스러운 식사 모습에 속이 거북해진 라비니아가 뾰로통하게 굴었다. 어디서 굴러온 잡초인지 모르겠지만, 여간 눈에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감히 나와 같은 탁자에 앉아서 밥을 먹다니…….’

라비니아는 지오프리가 없는 틈을 타서 아랫사람의 기강을 잡아 둬야겠다고 작정했다.

‘제까짓 게 아무리 날뛰어 봐도 내 아래라는 것을 알게 해 줘야지.’

미래 그녀의 보금자리가 될 카스피언가의 천장을 올려다본 라비니아가 의기양양하게 미소를 지었다.

곧 주요리인 안심스테이크가 나왔다. 여전히 배가 고팠던 미오는 포크로 쿡 찍어서 고깃덩어리를 들고 뜯었다. 한참 집중하는데, 라비니아가 남긴 음식이 눈에 들어왔다. 관자와 얇게 저민 소고기, 스테이크까지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설마 남기시는 거예요?”

“누가 이걸 다 먹나요? 잘록한 허리를 유지하는 것은 제법 까다로우니까…….”

라비니아의 체중 조절에는 별다른 의견이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또 이유 없이 당하고 싶지 않았다.

‘슬슬 나한테 이상한 수작을 걸 모양인데…….’

라비니아가 그녀 쪽을 보면서 묘하게 웃는 게 느낌이 왔다.

미오가 방긋 웃으면서 입을 뗐다.

“괜찮으시면 제가 좀 더 먹어도 될까요?”

“……뭐?”

벌떡 일어나서 라비니아의 곁에 다가선 그녀가 천연덕스레 웃었다.

“남기면 아깝잖아요. 안 그래요?”

미오가 남은 스테이크를 아예 손으로 집어 들자, 라비니아의 얼굴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남의 음식을 먹는 것은 천한 행위야.”

“여기는 밖인데 그런 말투 괜찮아요? 라비니아 아가씨?”

반쯤 익은 스테이크를 꽉 쥐었더니 비릿한 피가 탁자에 주룩 흘렀다. 라비니아는 끔찍한 광경에 어깨를 떨었다.

“오지 마! 가까이 오지 마!”

“괜찮다면 제가 먹어도 될까요? 제 것이 아니라서 꼭 허락을 받고 싶은데요.”

스테이크를 흔들자 라비니아가 말을 더 잇지도 못했다.

“이 미개한……!”

미오가 혀로 입가를 잔뜩 핥자 라비니아가 비명을 질렀다. 그 바람에 하녀 둘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곧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의 라비니아가 그들에게 의지해서 식당을 나가자 미오가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좀 조용히 먹을 수 있겠네.”

아무도 없는 식당을 둘러본 미오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 *

카스피언 공작 성은 고용인이 일하기 퍽 좋은 환경이었다. 공작은 성에 별 관심도 없었고, 집사나 하녀장 로렌의 눈치나 적당히 보면 되었다. 베스는 반들반들하게 닦은 마호가니 탁자를 바라보면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보다 더 완벽한 일터가 있을까.’

그랬던 카스피언 공작 성이 최근 들어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새로운 손님이 이곳을 찾은 탓이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말이야.’

미오라는 아가씨는 아무리 봐도 명문가의 영애는 아닌 것 같았다. 공작 성의 식솔 대부분은 미오에게 호감을 느꼈다. 그녀는 아주 오랜만에 맡는 손님이기도 했고, 무슨 사연인지 모르겠지만 몸이 퍽 불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 생각이 같지는 않았다. 특히 베스는 낯선 손님을 경계했다.

‘아프다는 핑계로 성에 눌러앉은 걸 보면 카스피언 공작님을 노리려는 수작을 부리는 게 분명해.’

미오가 벌써 공작 침대에서 뒹구는 것을 목격했다는 하녀가 있었다.

‘정말 역겨워!’

사실 그녀는 공작의 귀환 소식에 남몰래 야망을 품고 있었다. 공작이 돌아오기만 하면 그의 침실에 숨어들 작정이었다. 귀족이 부리는 하녀를 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비록 사생아라고 해도 아이를 낳고 나면 이런 하녀 일은 그만둘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가 뭐가 부족해서?’

그녀는 식사 시중을 들어야 하는데, 왜 미오라는 계집은 공작과 함께할 수 있는 거지?

‘네게 마호가니 가구가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거야?’

은근히 짜증이 난 그녀는 미오의 방에 몸시중을 들러 가서 알게 모르게 심술을 부렸다.

‘머리가 좀 엉켜 있네요.’

매끄럽고 탐스러운 머리를 빗으로 벅벅 빗어서 화풀이하려 들었다. 분명 상대가 아파서 울겠지 했는데, 미오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웃고 있었다.

‘안 아파?’

얼굴에 분을 발라 주는 척하면서 볼도 세게 꼬집었다.

‘아가씨는 병색을 가려야 하니 특별히 더 강하게 해야 하거든요.’

이 정도면 진짜 펄쩍 뛰고도 남을 만큼 아플 텐데, 그때도 미오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분풀이를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자, 로렌이 외출한 사이에 차가운 물을 준비했다.

‘너무 따뜻한 물로만 씻으면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해요.’

베스의 뻔뻔한 말에도 미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온다고 힘들었죠. 고마워요.’

아무도 모르게 공작을 유혹할 때는 언제고, 인제 와서 착한 척하는 게 우스웠다.

‘설마 저기서 목욕하지는 않겠지?’

베스조차도 저렇게 차가운 물에는 몸을 담가 본 본 일이 없었다.

‘……?’

미오는 그대로 욕조에 들어가더니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약한 코 고는 소리까지 났다. 찬물에서 느긋하게 잠을 청하는 미오를 보면서 베스는 질겁했다.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야.’

그녀의 힘만으로는 당해 낼 수 없다고 생각하자, 베스는 새로운 손님 라비니아에게 빌붙었다.

‘베일가의 공녀라면 공작님과 격이 맞으니까 말이야.’

베스가 기절한 라비니아의 손발을 열성적으로 주무르다 아가씨의 속눈썹이 흔들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가씨. 정신이 드세요?”

힘겹게 눈을 뜬 라비니아가 주변을 살폈다. 공작과 저녁에 만난다고 한껏 들떠서 세 시간 넘게 치장한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왜 이곳에 누워 있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나 짜증스레 입을 열자, 베스가 얼른 머리 아래 쿠션을 받쳐 주었다.

“그 요망한 것이 아가씨를 위협해서 기절하셨어요.”

가뜩이나 허리를 꽉 졸라맨 탓에 속이 안 좋았는데, 게걸스럽게 먹는 미오를 지켜보다 정말 토할 뻔했다.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야.”

몸을 제대로 일으키지도 못한 라비니아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장차 그녀가 이끌 카스피언 공작 성에 거슬리는 것은 조금도 남겨 두지 않을 것이다.

“아가씨. 얼른 물부터 드세요.”

라비니아의 몸을 일으켜서 앉힌 후 베스가 얼른 물을 가져다주었다. 가볍게 입을 축이는데, 너무 화가 나서 눈물이 절로 흘렀다.

“우리 베일 영지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야. 그렇게 경우 없는 천한 것은 묶어 두고 매질을 실컷 해야 한다고!”

베일 영지에서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보이면 죄다 잡아 와서 버릇을 고쳐 뒀다. 지금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지오프리 때문이었다.

‘그 계집을 제법 끼고도니까 말이야.’

물론 그의 행동이 애정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냉혈한처럼 보이는 공작이지만, 덜떨어진 사무엘을 옆에 두는 것을 보면 영 매정하지는 못한 게 분명했다.

‘그저 다리 부러진 말을 돌보는 것과 비슷한 거야.’

사무엘의 서신을 통해서 카스피언 공작이 예전부터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들었다.

‘이건 나만 알 수 있는 거야.’

타고난 미모와 가문 모든 것을 가진 라비니아는 누구에게 진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 말이야. 아무래도 그 계집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줘야겠어.”

“아가씨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 따르겠습니다.”

라비니아가 단단히 벼르는 것을 지켜본 베스도 덩달아 신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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