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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19)화 (19/123)

19화 한 걸음 다가서면 두 걸음 멀어져 버리는

지오프리의 등장으로 이곳에 온 이유마저 까맣게 잊은 그녀가 입을 헤벌렸다. 검술 훈련을 하고 온 건지 셔츠도 몸에 착 달라붙어서 그의 탄탄한 근육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어쩜 땀 냄새까지 향기로워.’

다른 사람보다 체온이 낮은 지오프리의 몸에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의 시선과 체온, 향기에 사로잡힌 미오는 그의 삐딱한 음성에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할 거라면 들은 거로 하지.”

그녀를 지나쳐서 집무실 문을 벌컥 열어젖힌 그가 한심하다는 투로 입을 뗐다. 미오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내가 그에게 뭘 고마워해야 하지?’

답 없이 문기둥을 붙잡고 서 있는 미오에게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만 돌아가라는 뜻이다.”

“……아.”

그런데 이상하게 지오프리의 퉁명스러운 말투가 그리 기분 나쁘지 않았다. 미오의 세상은 온통 혼란스러웠지만, 그만은 변함이 없었다. 항상 그 자리에 서서 그녀에게 비난을 퍼부어 댔다.

‘……좀 이상한 등대 같다고 할까.’

갑자기 바다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지오프리를 떠올렸다. 인상을 찌푸린 그는 잔뜩 불평만 늘어놓고 있을 것이다. 해초로 뒤덮인 그를 생각하자 절로 웃음이 났다.

킥킥.

“왜 웃는 거지?”

지오프리의 얼굴에 난처한 기운이 역력했다.

쫓아내려고 냉랭하게 굴었는데 상대는 나가기는커녕 즐겁다는 듯 굴지 않는가.

그의 질문에 미오가 산뜻하게 웃으면서 입을 뗐다.

“왜긴요. 좋아서 그러죠.”

뭐든 처음이 힘들지, 고백도 자주 하니까 숨 쉬는 것처럼 술술 나왔다. 게다가 자꾸 이러다 보니 이게 진짜는 아닌지 조금 헷갈리기도 했다.

그녀의 뻔뻔한 고백에 지오프리가 머뭇거렸다.

“정말 부끄러운 게 뭔지 모르는 건가?”

책장을 붙잡은 지오프리의 손등 위로 굵다란 핏줄이 꿈틀댔다. 이런 고백은 절대로 익숙해지는 법이 없는지, 귓불이 확 달아올랐다.

미오는 책을 뒤적이는 그의 뒷모습을 가만 지켜봤다.

‘나도 부끄럽거든?’

이상하게 지오프리 앞에서 수치심도 모르는 캐릭터가 되어 가는 게 못마땅했지만, 얼른 용건부터 꺼냈다.

“제가 찾아온 이유는 사냥 때문이에요. 저랑 같이 가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라비니아 베일처럼 짜증 나는 애 말고 나랑 가자고 하고 싶었다.

‘내가 지오프리랑 갈 거야.’

로렌이 아무리 권했어도 그녀는 여우 사냥 따위에 갈 생각은 없었다. 라비니아가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라비니아에게 한 방 먹고 나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필요할 때야.’

황제가 주최하는 사냥 대회라면 귀족이 잔뜩 모일 것이다. 그러면 그곳에서 새로운 인연을 찾기도 수월할 것이다. 생각을 달리하자 다양한 가능성이 그녀 앞에 펼쳐졌다.

하지만 의심병이 깊은 지오프리는 그녀의 호의를 바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갑자기 왜 마음을 바꾼 거지?”

“그게 한 번은 거절하는 게 숙녀의 미덕이라고…….”

괜히 고개를 떨군 미오가 말끝을 흐렸다. 수치스러워서 목덜미가 타오를 것처럼 붉어졌다.

“보나 마나 로렌이 또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나 보군.”

책장에서 몸을 돌린 지오프리가 파르르 떠는 미오를 내려다봤다. 평소 같았으면 로렌이 그의 집무실을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찾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미오가 이곳에 온 후 하루에 두어 번도 들르지 않았다. 남은 시간은 죄다 미오와 함께 보내는 것 같았다.

‘그것 자체는 딱히 신경 쓰이지 않는데…….’

자꾸 불필요한 정보나 옛이야기를 미오에게 하는 것은 거슬렸다.

그때 미오가 고개를 들었고, 그와 시선이 엉켰다.

‘또 뭔가 못마땅한 얼굴이야.’

그를 설득해서 사냥 대회에 함께 가려면 뭔가 더 보여 줘야 했다. 미오는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나는 지오프리를 사랑하고 있어. 그리고 진심으로 그와 같이 가고 싶은 거야.’

잔뜩 몰입한 그녀는 물기 어린 눈으로 지오프리를 그윽하게 바라봤다.

“정말 같이 가고 싶어요.”

“……글쎄.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지.”

‘글쎄라고?’

그의 음성은 여전히 한겨울 서릿발처럼 차갑기만 했다. 미오는 속이 뒤틀리는 것을 꾹 참고 미소를 지으려고 애썼다.

‘지금 생각해 본다고 한 거야?’

예상 밖의 대답에 미오는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그를 설득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

미오는 사람이 너무 짜증을 내도 눈물이 난다는 것을 이번에 깨우쳤다. 가만 서 있는데 전신에서 끓어 넘치는 뜨거운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 건드리기만 해도 소리를 마구 칠 것 같았다. 꾹꾹 참는데 어깨가 들썩거리기 시작했고, 바닥으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런 모습, 들키고 싶지 않아.’

소매로 얼굴을 거칠게 훔친 미오가 그를 향해서 고개만 꾸뻑했다.

“……아.”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지오프리가 짧은 신음을 뱉었지만, 그녀는 돌아볼 수 없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서 아주 흉한 얼굴일 게 뻔했으니까.

그녀의 뒤로 집무실의 육중한 문이 쿵 하고 닫혔다. 천천히 복도를 걷던 미오는 그 소리에 점점 더 속력을 높였다. 알 수 없는 감정에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 * *

책장에 등을 기대고 서 있던 지오프리가 닫힌 문을 강하게 응시했다. 이상하게 기분이 불쾌했다.

“꼭 내가 울린 것 같잖아.”

숨통이 막혀서 셔츠의 단추를 몇 개 끌러 내렸다. 목이 바싹 탔고, 온몸이 달떴다. 소매도 팔꿈치까지 걷어 올렸고, 핏줄이 불거진 손으로 목을 세차게 긁었다.

‘지오프리. 누군가를 울리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겠니?’

이제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어머니의 음성이 귓가에 스쳤다. 결혼이라는 신성한 맹세를 깬 아버지의 불륜으로 어머니는 숱한 날, 눈물을 흘려야 했다.

‘……어머니.’

몰래 울고 있던 어머니의 등에 손을 올렸을 때, 그녀는 급히 눈물 흔적을 지웠다.

‘지오프리. 내 눈에 벌레가 들어갔구나.’

애써 웃어 보이려는 어머니의 얼굴로 아까 미오의 미소가 겹쳤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울리더니 단검으로 팔을 후벼 파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헉. 헉.”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데 복도에서 훌쩍대는 누군가의 음성이 희미하게 들렸다.

“……젠장.”

한 손으로 눈을 틀어막은 채 서둘러 책상 서랍을 열었다. 작은 유리병을 찾은 그는 얼른 작은 알약 하나를 삼켰다. 그리고 책상을 꽉 움켜잡는데 책상이 덜덜 흔들릴 정도로 몸이 떨렸다.

몇 분이 지났을까.

겨우 진정된 그의 몸은 식은땀 범벅이었고,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꼴사납군.”

몸을 일으키면서 그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창에 비치는 지오프리의 모습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순간 카스피언 공작을 둘러싼 무수한 소문을 떠올렸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괴기스러운 것이었다.

‘피를 먹는 괴물이니 무덤에서 잠을 청하는 미친놈이니.’

그것 중 많은 것은 카트리나 황후가 퍼뜨린 것이었다.

“하지만 어쩌죠, 새어머니?”

차갑게 식어 내린 얼굴의 지오프리가 창을 바라보면서 싱긋 웃었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당신의 아들은 그리 온전하지 못하답니다.”

정신이 맑아지자 발작을 일으키기 전 일이 생각났다.

“내가 그녀를 울렸지.”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

“내가 지나치게 의심하는 걸까.”

상대는 하찮은 존재였다. 제대로 걷지도 못했고, 비둘기 한 마리도 죽일 힘이 없는 것 같았다. 정말로 그의 무용담에 홀려서 수도까지 따라온 정신없는 여인일지도 모른다.

“그런다고 뭐, 달라지는 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 중에 그녀보다 나은 대안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 미오에게 함께 갈 것을 제안했었다.

“퍽 재미있는 사냥 대회가 되겠군.”

말이 사냥 대회지.

카트리나 황후가 그를 위해서 온갖 재미있는 장난을 숨겨 두었을 게 분명했다.

책상에 어지럽게 놓여 있는 단검 하나를 집어 든 그가 집무실 문을 향해서 날렸다. 그것은 언제나 한곳 누군가의 심장을 정확하게 맞혔다. 단단한 나무에 세게 박힌 검이 흔들리는 것을 본 지오프리는 그제야 자리에 앉았다.

“됐어. 쓸데없는 생각은 이 정도만 하자.”

검토해야 할 서류는 날마다 쌓여 있었다. 긴 한숨을 내쉰 그가 천천히 안경을 집어 들었다. 잠시 후 종이 넘기는 소리 외에는 집무실의 고요를 어지럽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 *

펑펑 울면서 방으로 돌아온 미오는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너무 짜증이 나서 견딜 수 없었다.

“내가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까지…….”

가볍게 쥔 주먹으로 눈을 꾹꾹 눌러 봤지만, 울음이 쉽사리 그칠 것 같지 않았다.

“내가 좋아한다고 해 줘, 사냥 대회도 같이 간다고 해 줬는데…….”

그렇게 애썼는데 돌아온 것은 무시와 냉대라니, 기가 막혀서 웃음이 났다.

“요즘 조금 다정하다 싶었는데 전부 착각이었나 봐.”

분통이 터져서 음성이 점점 더 커졌다. 복도 끝에 있는 그의 집무실까지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뭐, 나만 좋자고 그런 제안을 한 것 같아?”

물론 사심이 다분히 섞여 있기는 했다. 금발에 푸른 눈 미남을 꿈꾸기는 했으니까.

“하지만 먼저 제안한 쪽은 지오프리였잖아.”

묘하게 그녀가 지오프리에게 매달리는 꼴이 되어 버렸다.

‘왜긴요. 좋아서 그러죠.’

그 말을 했던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 듣고 있던 그의 오만한 얼굴이 생생했다.

“내가 간다고 하면 황송해서 나를 업어 줘도 부족하지 않나?”

마치 그녀의 말을 참아 주기 힘들다는 얼굴이었다. 오늘의 일로 그녀는 교훈을 하나 얻었다.

‘지오프리를 보통 사람이라 생각해서는 안 돼.’

그나저나 오늘 그는 평소보다 더 저기압이었다. 온기 한 점 느낄 수 없고, 뿌연 흙먼지만이 부유하는 차가운 숲을 닮아 있었다.

“광기라도 도진 걸까.”

하지만 책 내용대로라면 벌써 지오프리는 살인을 밥 먹듯이 해야 하는데…….

살인은커녕 매일 서류와 씨름 중이었다.

“이상하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원작이고, 어떤 부분이 달라진 거지.”

방을 서성이다 어지럼을 느낀 미오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역시 구름 침대라고 이름 붙인 이 침대가 최고로 좋았다.

“몸이 그대로 가라앉는 기분이라니까.”

그녀가 있던 숲에 지오프리가 찾아왔고, 그의 공간에서 함께 생활하는 것은 전에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이 정도면 거의 새로운 이야기 아니야?”

턱을 가만 문지르던 미오는 느닷없이 손뼉을 쳤다.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인생, 해피 엔딩?”

생각을 정돈하자 얼굴에서 근심이 걷혔고 그제야 발랄할 기운이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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