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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18)화 (18/123)

18화 당신의 적은 활짝 웃고 있다

사냥 대회용 의상을 내려다보던 미오의 눈에 복잡한 감정이 깃들었다. 지오프리를 누군가와 나누는 것은 싫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소유하려는 게 아니야.’

로렌은 마치 그녀를 카스피언가의 안주인으로 만들 기세였다. 이쯤에서 상대방의 오해를 조금 풀어 주지 않으면 나중에 큰 곤경에 처할지도 모른다. 표정을 정돈한 그녀가 로렌에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는 그저 공작님의 행복을 빌 뿐이에요. 어떠한 사심도 없답니다.”

인제 와서 팬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으므로, 아주 고결한 느낌의 팬의 느낌으로 가기로 했다. 그녀가 티 없이 맑은 미소를 짓자, 로렌이 미오의 손을 덥석 잡았다.

“늙은이 소원 들어주는 셈 치고 이거 한번 입어 봐요. 얼른.”

“……저는 그냥 순수하게.”

“그러니까 내가 이러는 거 아닌가요.”

“아, 진짜 이게 아닌데…….”

로렌은 가림막 뒤까지 미오를 막무가내로 밀었다. 힘이 얼마나 센지 미오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자, 여기 있어요.”

상자까지 탁자 위에 올려 주는 치밀함에 미오는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기다란 상자를 내려다보면서 손가락을 세게 튕기었다.

‘그러니까 이걸 입고 지오프리와 같이 사냥 대회에 가라는 것 같은데…….’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로렌은 그녀에게 잘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소원이라고 하는데 한번 입어나 보지, 뭐.’

미오가 상자를 열자 가림막 건너편에 있던 로렌이 입을 뗐다.

“도움이 필요하면 나를 불러요. 네?”

“괜찮아요.”

불편한 기분이 싫어서 옷이나 목욕 시중은 받지 않겠다고 거절해 뒀던 그녀였다. 그나저나 누구 옷인지 대충 걸쳤는데 치수가 제법 맞았다.

“저기, 다 입었어요.”

미오가 쭈뼛대면서 가림막 밖으로 나오자 로렌이 그 모습에 손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흐느꼈다.

‘역시 입지 말 걸 그랬나?’

괜한 짓을 했다는 후회에 재킷의 끝을 매만졌다. 잠시 후 고개를 든 로렌이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더니 활짝 웃었다.

“제가 참 주책이죠? 그게, 우리 아가타 님이 생각나서 말입니다.”

지오프리의 어머니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새로 지은 승마복을 입어 보지도 못했단다. 로렌은 자주 아가타와 어린 시절의 지오프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바람에 미오도 아가타라는 사람을 아는 것 같았다. 정원을 산책하는 것을 즐기고, 아들을 무척 사랑했던 아름다운 사람.

‘이게 지오프리의 어머니 옷이었구나.’

그것을 깨닫자 마음이 대단히 무거워졌다. 자기 어머니 옷을 입은 것을 지오프리가 알면 불같이 화를 낼 텐데.

‘지난번에 어린 시절 화첩을 본 것으로도 신경질을 냈잖아.’

“이제 갈아입을게요.”

“네. 제가 새 옷처럼 잘 다듬어 둘게요.”

“아니…….”

두 번 다시 입을 일이 없다는 뜻이었는데, 로렌은 오늘도 그녀 마음대로 해석해 버렸다.

* * *

“휴! 간신히 벗어났네.”

드레스 룸을 빠져나온 미오가 하품을 크게 했다. 하마터면 다른 드레스도 여러 벌 입어 본 다음에 액세서리까지 주렁주렁 달 뻔했다.

‘로렌의 인형 놀이만큼은 동의할 수 없어.’

어린 시절 아주 잠깐 공주님 드레스를 꿈꾼 적은 있었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이런 거추장스러운 옷은 질색이야.’

복도를 가만 걷던 그녀가 두 팔을 위로 쭉 뻗었다. 아까 잠을 잘못 잔 건지 여기저기 결리는 데가 많았다.

“그나저나 왜 이불을 그렇게 공처럼 해서 덮고 있었지?”

가슴이 아직 답답했다.

고개를 좌우로 까닥대는데, 누군가 그녀의 뒤에서 인기척을 냈다.

“내가 놀라게 했나요?”

고개를 돌리자 무도회라도 갈 것 같은 차림의 라비니아가 활짝 웃고 있었다. 몇 겹의 풍성한 붉은색 드레스는 복도를 가득 채울 듯했다. 목걸이와 귀걸이, 머리 장식까지 전부 반짝이는 보석이라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아침에 입었던 드레스는 어쩌고 왜 또 옷을 갈아입었지.’

미오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그녀가 성큼 다가와 미오의 손목을 끌어 잡았다.

“이제 몸은 좀 괜찮나요?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걱정해 주는 것도 별로 달갑지 않았고, 이렇게 손을 잡히는 것은 더 싫었다.

‘당장 뿌리치고 싶은데…….’

보는 눈이 많아서 그러기는 힘들었다.

미오가 불편한 감정을 간신히 삭이는데, 상대가 명랑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맛있는 디저트를 먹으려던 참이에요. 이렇게 만났으니까 함께 먹어요. 네? 혼자는 너무 외롭거든요. 갈이가 줄 거죠?”

어린아이처럼 졸라 대는 라비니아 때문에 머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당연히 디저트를 같이 먹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딱 잘라 거절하기는 좀 애매했다. 미오는 액자의 먼지를 떠는 하녀를 살피다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 그럴까요.”

거절하기 귀찮아진 미오가 그대로 라비니아의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을 후회하게 된 것은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소파에 털썩 걸터앉은 라비니아가 방에 있던 하녀를 밖으로 내보냈다. 영문을 알 까닭이 없는 미오는 탁자에 놓인 다양한 간식을 쳐다봤다.

그때였다.

라비니아가 탁자에 부채를 홱 집어 던지더니 날카롭게 입을 뗐다.

“차를 좀 따라 봐.”

설마 그녀에게 하는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미오가 주변을 두리번댔다.

“그렇게 굼떠서 내 전담 하녀가 될 수 있겠어?”

‘이게 무슨 헛소리지?’

듣고도 귀가 의심스러운 나머지 미오가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러자 라비니아가 탁자에 준비된 디저트 트레이와 찻잔을 손짓으로 가리켰다.

“멀뚱하니 서 있지 말고 빨리 해. 나 지금 땀 흘리는 거 안 보여?”

“지금 저한테 시중들라는 거예요?”

“그럼 내가 할까?”

그렇게 따지고 드니까 분한데 할 말이 없었다. 여기는 엄연히 신분제가 존재하는 곳이니까. 마음 같아서는 찬물이나 확 끼얹고 싶었지만, 미오는 간신히 화를 삼켰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고? 더러워서 피하는 거지.’

지오프리 상대하는 데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이 문제까지 보태지 않고 싶었다.

말없이 차를 따라 주자, 라비니아가 다시 손가락을 까닥댔다.

“머리 장식도 좀 떼 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참고 일어난 미오가 라비니아의 머리 장식을 잡았다.

‘첫인상이 별로긴 했는데, 상상 그 이상이네.’

라비니아는 참 오랜만에 만나는 인성 파탄자였다. 그녀는 이런 유형의 인간을 질리도록 봤다.

‘너는 고아라면서?’

학기가 바뀔 때마다 비싼 옷과 가방을 자랑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낡은 옷을 입은 미오를 무리에 끼워 주지 않았다. 그뿐이면 다행인데, 묘하게 조롱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다.

‘아무래도 너는 힘들겠지? 우리는 백화점에 쇼핑 갔다가 스테이크를 먹으러 갈 거라서.’

처음부터 함께 갈 생각도 없었으면서 배려하는 척 구는 모습이 참 같잖았다.

‘나도 너네랑 놀 생각 전혀 없거든?’

생각도 없는데 먼저 선을 긋던 인간들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그때 생각에 손이 힘이 들어갔는지 머리 장식을 떼다가 라비니아의 머리카락을 몇 가닥 뽑았다.

“아야! 너 시중 처음 들어 봐?”

“나 시중들어 본 적 없는데?”

가난했지만 누구의 시중을 들면서 살지는 않았다.

마뜩잖은 얼굴을 한 미오가 쥐고 있던 머리 장식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그냥 조용히 지내는 게 낫지 않을까 했지만, 이런 취급을 받을 이유는 없었다.

“……뭐? 감히 나한테 반말한 거야?”

나뒹구는 장식을 보던 라비니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 얼굴을 보자 묘하게 웃음이 나서 미오는 조금 더 음성을 낮췄다.

“너도 하는데, 나라고 못 할 이유가 뭐야?”

“뭐라고? 내가 공작님과 혼인하면 너를 거둬 줄까 했는데, 이렇게 주제도 모르다니 어림도 없어.”

도대체 누가 누구를 거둔다는 건가. 생각할수록 불쾌한 기분이 한가득하였다. 미오가 미안해하는 기미를 보이지 않자 라비니아가 길길이 날뛰었다.

“나는 베일가의 외동딸이야. 유일한 후계자라고!”

놀란 라비니아가 부들대면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리에 털썩 앉은 미오는 아까 따라 둔 차를 홀라당 마셨다. 그리고 소파에 느긋하게 등을 기댔다.

“그래서? 네가 후계자면 나한테 뭐, 재산이라도 줄 거야?”

정말 웃기고 있다.

누구는 언제 죽을지 몰라서 하루하루가 전쟁인데, 어디서 힘겨루기 따위를 하려고 드냐는 말이다. 이런 미오의 말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지 라비니아가 발을 동동 굴렀다.

“너는 하찮은 신분이고, 나는 귀족이라고!”

“그렇다고 내가 네 전담 하녀가 된다는 의미도 아니잖아. 지금 나는 어디까지나 공작가의 손님이야.”

한마디로 예의를 저버린 것은 네 쪽이니까 제발 닥쳐 줬으면 좋겠거든.

“이건 무슨 맛이지?”

미오가 태연스레 트레이에 있는 마카롱을 집어 먹자 라비니아가 씩씩거렸다. 열받아서 돌아 버리기 직전에 흔히 보이는 현상이다. 그녀는 마카롱을 한 입 베어 물고서 다정하게 입을 열었다.

“잘 들어 둬. 라비니아. 네가 나를 안 건드리면 나도 가만있을 거야. 그런데 네가 도발하면 난 안 참아.”

지오프리야 이유가 있어서 그녀가 참는 거지.

마카롱을 먹다 보니 보기보다 퍼석퍼석해서 취향에 맞지 않았다.

“맛도 없네.”

먹다가 만 마카롱을 탁자에 올려 둔 미오가 먼저 일어났다. 몸을 돌린 그녀가 분노로 새하얗게 질린 라비니아를 향해서 서늘하게 입을 뗐다.

“이런 일로 한 번만 더 불러 봐.”

“……너!”

부들부들 떠는 라비니아를 돌아보지도 않고 미오는 쿵쿵 소리를 내면서 바깥으로 향했다.

‘네가 원하는 일은 그게 무엇이든 이루어지지 않을 거야.’

어금니를 꽉 깨문 미오의 눈이 묘하게 반짝였다.

* * *

“일진이 사나워.”

아침부터 여우 사냥 같은 말이나 듣더니, 라비니아까지…….

물론 가만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지만, 영 분이 풀리지 않았다. 방을 서성이던 미오가 손을 들어서 턱을 만지작댔다.

“저런 애가 책에 나왔던가?”

지오프리를 쫓아다니던 여자가 워낙 많았던 터라 이름을 전부 기억하는 것은 무리였다. 게다가 일방적인 사랑뿐이었다. 심장이 차갑게 굳어 버린 지오프리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는 존재였다.

“계속 저러면 진짜 곤란해.”

라비니아가 했던 말을 곱씹던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이곳의 안주인을 노리는 라비니아가 여기에 오래 머물면 그녀의 계획에도 큰 차질이 생긴다. 가뜩이나 지오프리와 만날 시간도 많지 않은데, 방해꾼이 설치게 둘 수 없었다.

‘지오프리를 유혹하는 일을 조금 더 서둘러야겠어.’

단단히 기합을 넣은 그녀가 문손잡이를 세차게 잡아 돌렸다. 성큼성큼 걸어서 찾아간 곳은 지오프리의 집무실 앞.

그녀가 제 발로 온 것은 처음이라서 문을 두드리는 것이 망설여졌다.

“지금 말고 나중에 다시 올까?”

여기까지 오니까 괜히 왔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결심이 3초 만에 흔들리는 거야.’

하지만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가 더 필요한 것 같았다. 몸을 막 돌리는데, 시꺼먼 그림자가 그녀의 몸을 전부 휘감았다.

“내가 보고 싶어진 건가? 또?”

땀으로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는 지오프리의 그윽한 음성이 미오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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