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지오프리 카스피언의 고백
어머니를 허망하게 보낸 후 지오프리는 간단한 계획을 세웠다. 이 모든 복수가 끝나면 그는 카스피언 제국을 떠날 작정이었다.
‘나고 자란 이 땅에 아무런 미련도 없다.’
물론 그의 계획을 누군가에게 말한 적은 없었다. 특히 로렌이 알게 된다면 퍽 속상한 얼굴을 할지도 모른다.
‘불쌍한 로렌. 그녀는 여전히 내가 이 제국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지.’
오늘따라 왜 이리 상념에 빠지나 모른다. 차가운 표정의 그가 이제 정말 나가려고 하는데, 누군가 지오프리의 망토 자락을 잡았다. 허리에 찬 단검으로 반사적으로 손이 갔다. 그때 미오가 다시 웅얼거렸다.
“지오프리, 제발―.”
“……하.”
붙잡힌 망토는 조금만 힘을 주면 뿌리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대로 멈춰 선 지오프리는 긴 한숨만 쉬었다.
“가망 없는 일에 힘을 쏟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잠에 취해 있는 그녀를 향해서 지오프리가 작게 중얼댔다. 어쩐지 그녀의 얼굴이 어린 날 희망에 들떠 있던 그때의 그를 닮은 것 같아서 짜증이 치밀었다.
“바보 같아.”
미오의 손을 홱 뿌리친 그가 성큼성큼 방을 나섰다. 갈 곳을 잃은 작은 손 하나가 침대 아래로 툭 떨어졌다.
* * *
빙의하고서 편안하게 잠든 기억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끔찍한 꿈은 처음이었다. 여우로 변한 미오가 숲속을 달리는데, 뒤로는 사냥개가 쫓아 왔고 말을 탄 사냥꾼이 그 개를 따라왔다.
‘여우가 굴로 달아나기 전에 얼른 물어!’
주인의 지시에 흥분한 개가 침을 뚝뚝 흘렸다. 작은 체구의 미오의 발바닥은 여기저기 벗겨졌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쉴 수 없었다. 잠시라도 서면 사냥개가 그녀의 숨통을 끊어 놓을 테니까.
‘……누구지?’
그때 숲의 가장자리까지 밀려 난 미오의 앞에 검은 말을 탄 남자가 접근했다. 붉은 망토가 바람에 사정없이 날려서 얼굴을 제대로 보기 힘들었다. 속도를 늦춘 그녀가 고개를 들자 무감한 표정의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지오프리?’
위기에 처한 그녀 앞에 나타난 그가 백마 탄 왕자처럼 보였다. 알 수 없는 안도감과 반가운 마음이 한데 섞였다. 그녀는 젖은 눈을 들어서 지오프리에게 이 마음을 전하려고 했다.
‘나 좀 구해 줘. 응? 뒤따라오는 저 사냥개가 날 죽이려고 해.’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짐승의 소리.
―끼잉끼잉.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조심스레 그를 향해서 한 걸음 다가서는데, 지오프리가 옆으로 늘어뜨렸던 화살을 고쳐 잡았다. 그의 모습에 미오의 호박색 눈에 공포가 가득 찼다.
‘구해 주는 게 아니라 나를 죽이려는 거야?’
순간 허탈함에 달아날 의지를 상실했다.
어째서 지오프리가 그녀를 구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까. 그와 미오는 결코 친구가 될 수 없는 사이인데…….
‘내가 완전히 착각했어.’
화살이 막 시위를 떠나려는 찰나, 미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날카로운 금속이 몸에 박히는 순간의 감각이 생생했다.
“……헉.”
눈을 뜨자 온몸이 땀투성이였다.
드레스를 입은 채 침대에 누운 그녀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가슴께를 짓누르고 있는 돌돌 말린 이불을 걷어 냈다. 그리고 손을 내려서 화살에 관통된 곳을 더듬어 봤다.
“꿈이었구나.”
다친 데도 없고, 죽지 않은 것을 확인한 그녀의 얼굴에 희미하게 안도의 빛이 어렸다. 하지만 끔찍한 악몽을 꾼 후라 좀처럼 긴장감이 가시지 않았다.
“내가 언제 침대에 누웠지?”
아침을 먹고 정원 산책을 하던 일이 떠올랐다. 그리고 조금 더 기억을 더듬자 아까 손님을 만났던 일을 생각해 낼 수 있었다.
‘여우 사냥!’
지나치게 자세하고 잔인한 여우 사냥 묘사에 겁에 질렸었다.
“진짜 무서웠어.”
가만 손을 올려서 가슴께에 대자, 심장이 세차게 쿵쿵댔다.
아무래도 지오프리를 유혹해서 뻥 차 버리려는 그녀의 계획에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아까…….”
기절하면서 지오프리의 품에 안겼던 일이 자세히 떠올랐다. 탄탄하고 따스한 그의 가슴팍이 이제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수치심에 그녀의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나를 얼마나 한심한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할 줄 아는 것은 짝사랑뿐인, 걸핏하면 기절이나 해 대는 그런 인간 말이다. 미오는 이불을 바닥으로 패대기치면서 굳은 결심을 다졌다.
“목표를 이룰 때까지 약해지면 안 돼.”
사냥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라비니아 베일이라는 훼방꾼을 처리할 방법도 마련해 봐야 했다.
“할 일이 많아.”
소매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쳐 낸 그녀가 다시 각오를 다졌다.
* * *
카스피언 제국의 성.
황제와 황후가 나란히 앉아서 차를 들고 있었다. 기다란 소파에 앉은 황제가 은근한 손길로 황후가 입은 붉은 모슬린 드레스를 쓸어내렸다.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가 그의 손가락 끝에서 피어올랐다.
“카트리나, 당신은 날이 갈수록 아름다워지는 것 같소.”
황제 루카스 카스피언은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한 체격이 좋은 사내였다. 그는 다정하고 온화한 성품을 지녔다. 정략혼이었지만 아가타와의 혼인 생활에도 최선을 다했다. 아가타가 아이를 가지자 그는 뛸 듯이 기뻐했다.
‘배 속의 아이는 카스피언 제국을 이끌어 나갈 후계자가 될 거요.’
하지만 지극히 평범한 일상은 금세 허물어져 내렸다. 몸이 약했던 아가타가 임신 중에 누워 있는 날이 늘어나면서, 황제는 혼자 있는 시간이 잦았다. 그때 황제는 우연히 미망인이었던 카트리나를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첫눈에 반했고, 주변 상황이나 그런 것을 모두 잊을 정도로 서로에게 몰두했다.
“황제 폐하. 낮부터 그런 말씀 부끄러워요.”
수줍게 볼을 붉히는 카트리나가 몸을 움직이자, 드레스 목선 아래로 풍만한 몸매가 여실히 드러났다. 그녀는 항상 루카스 황제를 갈증 나게 만드는 존재였다.
‘당신은 이제 아무 걱정 할 필요 없어.’
카트리나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는 것을 두려워해서 그를 떠나려 했다. 그때 황제는 디아나 여신을 걸고 맹세를 했다.
‘제국의 태양인 나를 믿어.’
두 사람의 비밀스러운 만남으로 지오프리와 한 살 차이가 나는 벤이 태어났다. 그렇게 모두의 눈을 속이기를 십수 년. 어느 날 루카스는 아가타에게 황후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요? 황제 폐하.’
카스피언 제국은 이혼을 금지했으니, 아가타로서는 믿기 힘든 게 당연했다.
‘내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그리고 지오프리보다 어린 아들이 있다. 그러니 욕심부리지 말고 물러나 주시오. 어린아이의 앞날을 망칠 게 아니라면…….’
루카스는 그의 불륜을 숨기려 들지도 않는 뻔뻔함을 보였다. 아가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잖아요.’
지오프리를 낳고부터 조금씩 멀어진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 살갑지는 않았지만, 부정을 저지를 만한 사람은 아니라고 믿었었다.
“나의 황제 폐하. 무슨 생각을 하느라, 그렇게 이마를 찡그리시는 거예요?”
잠시 과거를 떠올렸던 루카스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카트리나가 몸을 들어서 그의 품에 폭 안겼다. 마치 한 몸처럼 포개진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그윽하게 들여다봤다.
“아무것도 아니었소. 우리가 함께 있는데, 내게 무슨 근심이 있으려고.”
“폐하. 허락해 주신다면 여우 사냥 준비는 제가 하고 싶어요.”
카트리나의 볼을 입술로 더듬던 황제가 의아한 눈을 했다.
“뭐 하러 그런 힘든 일을 하려고 한단 말이오. 응?”
“명색이 제가 어미인데, 아들을 위해서 그 정도는 해 주고 싶어서요.”
카트리나의 말에 황제는 크게 웃으면서 그녀의 허리를 꼭 안았다.
“당신은 정말 디아나 여신의 현신 같구려. 이리 마음씨까지 곱다니까.”
그대로 카트리나의 몸을 눕히자, 그녀가 주먹을 들어서 가벼이 황제의 가슴을 쳤다.
“곧 회의가 있으시잖아요.”
“잠깐만, 응? 정말 잠깐만.”
정염으로 뒤덮인 황제의 눈이 카트리나의 입술을 삼킬 듯 뜨거워졌다.
* * *
머리가 복잡해진 미오는 종일 방에 머무르려고 마음먹었다. 실패 없이 일을 진행하려면 완벽한 계획은 필수였다. 그녀가 종이 한 장을 펼쳐 두고 이것저것 고심하는데, 뜻하지 않은 손님이 들이닥쳤다.
“지금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니랍니다.”
“……네?”
미오의 의사도 묻지 않은 채 로렌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렇게 온 곳은 사방이 거울로 장식된 방이었다. 어디를 봐도 그녀의 모습이 비치는 터라 약간 두렵기까지 했다.
“여기를 왜 온 거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커다란 옷장이 있는 공간으로 로렌이 사라지자 미오는 거울 앞으로 다가섰다. 티끌 하나 없이 맑은 거울에는 그녀의 모습이 지나치게 또렷이 보였다.
“볼에 살이 좀 붙었나.”
잘 먹고 잘 잤더니 피부에 윤기도 좀 흐르는 것 같았다. 그때 로렌이 혼잣말을 연신 해 댔다.
“이게 아닌데 말이야. 이것도 아니야.”
‘도대체 뭘 하려는 걸까.’
분명 로렌은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단지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 뿐이었다. 살면서 이렇게 이유 없이 호의를 베푸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이런 건 정말 익숙하지 않다고…….’
나자마자 베이비 박스에 남겨지게 된 미오는 혼자였다. 부모에 대한 기억은 하나도 없었다. 잘 웃지 않고, 울지도 않는 아기였다고 했다. 그녀를 키워 준 곳은 종교 단체였는데,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미오는 성장했다.
‘기도만 하면 좋은 가정에 입양 갈 수 있을 거야. 미오.’
‘네가 욕심을 모두 버리면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얻게 될 거다.’
하지만 어떤 종교도, 신도 그녀에게 가족을 만들어 주는 기적을 보여 주지는 않았다. 고아원 생활을 떠올린 바람에 괜히 울적해졌는데, 로렌이 부산스럽게 다가섰다.
“찾았답니다. 이거예요.”
“……?”
로렌이 들고 나타난 상자에는 녹색 깃의 검은색 재킷과 베이지색 바지, 검고 긴 장화, 검은 벨벳 모자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도대체 이것을 왜 그녀에게 보여 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미오가 눈만 끔뻑대자 로렌이 상자를 탁자에 올려 두고서 다시 팔을 끌었다.
“베일 영애한테 공작님을 뺏겨도 괜찮아요? 네?”
‘지오프리를 누군가에게 넘겨준다라.’
그런 이야기를 남에게서 듣자 혼자 생각했을 때보다 훨씬 더 기분이 별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