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16)화 (16/123)

16화 사연이 없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한밤중에 카스피언가에는 때아닌 회의가 한창이었다. 식당 난롯가 주변에 모인 것은 공작가의 식솔, 로렌을 중심으로 집사와 정원사, 요리사, 하녀와 하인 몇이었다.

“당신도 얼른 의견을 내 봐요.”

로렌의 재촉에 집사가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음.”

이 커다란 성을 꾸려 나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인원이었다. 재정 상태가 썩 좋지 못했고, 흉흉한 소문에 휩싸여 있어서 새로 일하러 오겠다는 사람을 찾기도 어려웠던 탓이다. 집사는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면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그는 지금은 죽고 없는 아가타 카타니아, 공작의 어머니인 전 황후를 모시던 인물이었다. 지금은 이곳에서 집사를 하고 있었고, 고용인 중 직위가 가장 높았다.

“나는 말이지.”

자꾸 뜸을 들이는 집사의 모습이 답답한지 볼이 통통한 로렌이 그의 팔을 꽉 꼬집었다.

“이 양반아. 지금 그럴 때가 아니란 말이오.”

조용하던 카스피언가에 내분이 일어나서 연일 시끄러웠다. 이 모든 것은 공작가에 나타난 미오와 이번에 방문한 베일 영애 때문이었다. 그들 모두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진짜 공작 부인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휩싸였다.

“그래도 공작 부인으로는 백작가의 영애이신 라비니아 님이 낫죠.”

“맞습니다. 주인님이 라비니아 님과 결혼만 하시면 우리를 업신여기는 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줄 수 있을지도 몰라요. 베일가의 세력과 재산은 엄청나니까요.”

로렌의 눈치를 보던 하녀와 하인이 연달아 의견을 밝혔다. 그러자 로렌이 열정적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언제부터 그렇게 부귀영화를 좇았다고 그래. 물론 궁핍한 것은 나도 별로야. 하지만 순수하게 공작님 하나만 바라보는 미오 님을 봐. 그 멀리서 공작님을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몸까지 다쳐 가면서까지 말이야.”

로렌이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자 다들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는 곧장 집사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정에 이끌리기보다는 손익을 따지는 편에 속했다. 모두의 관심이 그에게 쏠리자 집사는 영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건 주인님이 알아서 하실 일이지.”

“누가 그걸 모른답니까? 그냥 우리는 우리대로 주인님을 돕자는 거잖아요. 얼른 말해 봐요. 평소에 하도 말을 안 하니까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잖아요!”

로렌의 말이 영 틀린 것은 아닌지라, 집사가 주름진 볼을 쓸더니 다시 끙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이 답답한지 로렌이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그녀는 퍽 단순한 성품을 지녔다. 마음에 드는 것은 조건 없이 품고 정을 주었다. 그 바람에 상처도 제법 많이 받았지만, 천성이란 게 쉽게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로렌의 재촉에 그는 슬쩍 일어나면서 작게 속삭였다.

“나는 주인님의 뜻을 따르겠지만, 꼭 베일가의 영애를 고집할 이유는 없을 것도 같고…….”

뭔가 알쏭달쏭한 말을 늘어놓고 집사는 부리나케 자리를 떴다.

“아니, 이렇게 가면 어쩌자는 거예요. 그래서 미오 님을 응원한다는 거예요, 아니라는 거예요?”

로렌이 그를 붙잡았지만, 집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복도를 나서는 그의 얼굴에 회한이 스쳤다.

카스피언 공작은 아가타 님이 남긴 유일한 혈육이다. 목숨을 바쳐서 아가타 님을 구할 수만 있었더라면 그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주인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어머니를 잃은 공작은 점점 차가워졌고, 웃는 법을 잊었다.

‘그래. 당연한 일이지.’

이 모든 것이 그가 주인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탓인 것 같아서 가슴께가 답답했다. 하지만 아직 한창 나이인 주인님은 인생을 조금 더 즐겨야 했다.

‘돌아가신 아가타 님을 위해서라도 말이야.’

충직한 그는 처음 공작가에 나타난 미오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돈이나 작위를 노리고 공작님께 달려든 그런 여인이겠지.’

게다가 평민이라고 하니 그 속내는 보나 마나 뻔했다. 하지만 미오는 그의 예상을 벗어났다. 방에 틀어박혀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주시해도 사리사욕을 채울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보석이나 드레스를 잔뜩 요구할 줄 알았는데…….’

역시 사람을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큰 실수를 불러오는 법이다.

‘게다가 퍽 영특한 아가씨다.’

얼마 전의 일이었다.

한 달 치 예산을 계산하던 그가 잠시 일이 있어서 나갔다 왔었다. 그랬더니 막혔던 부분이 말끔하게 풀려 있는 게 아닌가. 처음에는 공작님이나 사무엘이 한 줄 알았는데, 두 사람 모두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몇 번 더 수수께끼의 조력자가 그를 도와주었다.

‘누군지 알아내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몰라.’

그는 심지어 사례할 테니 이름을 밝혀 달라는 작은 쪽지까지 남겨 두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의 계산을 도와줄 뿐 굳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은발이 부드러운 실바람처럼 문틈으로 사라지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서재에 사는 유령이 그를 돕는 줄로만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집사는 로렌의 말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뜻을 보태고 싶었다. 공작님에게 힘을 실어 줄 가문도 없지만, 작은 여인이 눈에 밟혔다.

‘진심으로 공작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이 공작님의 곁을 지킨다면 나중에 하늘에서 아가타 님을 볼 면목이 조금은 있지 않을까.

주인을 닮은 아기의 배냇짓을 떠올린 그의 주름진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그려졌다.

‘아가타 님. 보고 계십니까?’

집사는 1층에 걸린 아가타의 초상화를 보면서 그렇게 한참을 머물렀다.

* * *

한편 손님방 앞에 선 지오프리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도대체 어디에서 온 누구일까.’

어느 날 그의 앞에 나타난 미오는 수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공작님을 오랫동안 마음에 두고 있었어요.’

열렬한 고백을 하더니 그의 앞에서 죽으려고까지 했다. 그의 환심을 사려고 내내 애를 써 댔다. 그런 그녀가 그가 라비니아와 함께 있자 기가 푹 죽어 있었다.

‘질투라도 하는 건가?’

혼자 하는 사랑을 하는 주제에 빠지는 것은 없이 죄다 할 모양이었다.

‘……가소롭다니까.’

눈을 가늘게 뜬 지오프리가 침대 위에서 몸을 뒤척이는 미오를 향해서 한결 누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굳이 점심을 같이하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기는 했지만…….’

수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의심을 모두 거둔 것은 아니지만, 그의 목숨을 노리는 게 아닌 건 틀림없었다.

‘저렇게 걸핏하면 기절이나 하니까.’

그러다 카스피언가를 방문한 손님의 존재를 떠올린 그가 이마를 찌푸렸다.

“……베일가라.”

라비니아 베일은 불청객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문전 박대할 수는 없었다. 사무엘의 친척이기도 했고, 그녀의 아버지 베일 백작의 체면을 봐서였다. 그녀의 방문 목적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하고 있었다.

‘사냥 대회를 함께 가자고 조르겠지.’

진짜 목적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베일가는 카트리나 황후와 가까웠다. 황후의 권력까지 등에 업은 라비니아는 그에게 결혼을 강요할 게 분명했다. 성질 같아서는 당장 내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문제를 일으키기 좋지 않은 때였다.

“기분이 별로군.”

그때였다.

잠잠하던 미오가 다시 큰 소리를 냈다.

“추워. 낙엽이 날아가 버렸어. 내 이불 내놔!”

“……?”

잠꼬대 내용이 무척 괴상했다.

언제 걷어찬 건지 바닥에 이불이 떨어져 있었다. 모른 척 나가려는데, 미오의 입에서 기침이 터졌다.

“그래. 건강해져야 빨리 내보낼 수 있을 테니까.”

문가에 기대서 있던 그가 몸을 떼자, 침실의 문이 느리게 닫혔다. 지오프리가 몸을 숙여서 이불을 주워 드는데, 기분이 좋지 않았다.

“후, 내가 지금 이게 무슨 짓인지.”

누군가의 시중을 드는 모습이 낯설었다.

“다 낫기만 해 봐.”

이불을 끌어안은 그가 달빛 아래 몸을 웅크린 미오를 바라봤다. 너무 마르고 작은 여인은 잠옷이 커서 목이 깊게 파였다. 그 사이로 언뜻 엿보이는 흰 피부 아래 푸른 핏줄이 비쳤다. 묘하게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의 목울대가 불거졌다. 당황한 지오프리가 급히 고개를 돌렸고, 그는 성의 없이 이불을 던졌다.

“……응.”

갑작스러운 이불 더미의 공격에 놀란 미오가 신음을 뱉었다. 혹시 이불이 그녀의 숨통을 틀어막은 건 아닌지 걱정이 된 그가 다시 몸을 돌렸다. 다행히 이불은 배 위에 뭉개져 있었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왜 우는 거지?’

미오의 가느다란 속눈썹 끝에 물기가 맺힌 것을 본 그가 의문을 품었다. 그때 그녀의 울음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어깨를 들썩이더니 삐죽대는 입술로 서러운 음성이 새어 나왔다.

‘무슨 사연이 있을까.’

하지만 연민은 여기까지였다. 사연이 없는 사람이 없듯 힘들지 않은 인생도 존재하지 않는 법이니까.

그때 미오가 그를 부르지만 않았더라면 지오프리는 분명 침실 문을 열고 나갔을 것이다.

“지오프리―.”

애절한 음성에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꿈에서조차 나를 그리는 건가?’

그를 열렬하게 원하는 여인은 미오가 처음은 아니었다.

‘지나치게 많았지.’

수려한 외모에 재력, 권력까지 가진 그를 향해서 숱한 유혹이 쏟아졌다. 짙은 화장에 역한 향수 냄새를 풍기는 자들이 온갖 달콤한 말을 속삭였다. 가면 뒤에 숨은 더러운 존재는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순수한 소년에게도 그들은 거침없이 마수를 뻗쳐 댔다.

‘정말 역겨웠다.’

원래도 혼자인 게 좋았던 그는 점점 고립되었다. 그편이 훨씬 안전하고 편했다.

‘전장에서도 마찬가지였지.’

어디서 소문을 듣고 온 건지 귀족이나 평민 여인이 그가 자는 막사에 몰래 들어왔다. 경비를 어떤 식으로 구워삶았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공작님. 제가 후계자를 낳아 드리겠습니다.’

나신으로 달려들던 여인 모두가 후계자 타령을 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지오프리를 전혀 몰랐다.

‘나는 후계자 따위를 두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다짐한 지오프리는 비혼을 결심했다.

“……하지만.”

결심과는 별개로 이상하게 미오의 고백이 역겹지는 않았다.

“……카트리나의 소원대로 내가 슬슬 미쳐 가는 건가?”

자조 섞인 지오프리의 음성이 스산한 밤을 달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