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손님, 라비니아 베일 (2)
미오가 굳은 결의를 다지는데, 라비니아는 여전히 그녀를 빼고 대화를 이어 나갔다.
“여우를 사냥하면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요.”
라비니아가 들고 있던 포크로 뭔가를 푹푹 찌르는 시늉을 했다.
“사냥개가 목덜미를 물면 여우는 얼마 만에 죽나요? 활로 잡기도 하죠?”
지오프리는 귀찮은지 답도 하지 않는데, 라비니아는 질문을 쉴 새 없이 퍼부었다.
“저를 위해서 털이 붉은 여우 한 마리 잡아 주시겠어요? 목도리나 모자를 만들고 싶어요. 네?”
라비니아는 이제 목에 뭔가를 두르는 행동을 취하기까지 했다. 그 이야기를 듣던 미오의 얼굴은 점점 창백하게 질렸다.
‘……여우 사냥.’
방금까지 함께 숲을 거닐던 짐승이 사냥꾼의 화살에 목숨을 잃었다.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잡아먹는 것은 숲에서 늘 일어나는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인간은 여흥을 위해서 여우 사냥을 했어.’
차갑게 굳어 가는 작은 토끼를 바라보기만 하는 기분은 역겨웠다. 여우 수인이었지만 날고기를 먹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서 열매를 나눠 주던 착한 녀석이었는데…….
‘죽어 버리면 모든 게 끝이야.’
다시 떠오른 오싹한 감각에 손끝이 덜덜 떨렸다. 찻잔을 쥔 손이 미세하게 흔들리자 찻잔과 차 받침이 부딪치면서 약한 소음을 냈다.
‘싫어. 무서워.’
공포에 잠식된 미오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귓가에 사냥개가 컹컹대는 소리가 생생했고, 무시무시한 송곳니가 눈에 선했다. 작은 굴에 간신히 숨은 미오의 뒷다리를 물고 늘어진 개는 절대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뚝뚝 떨어지는 묽은 침과 사나운 외침에 미오는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다.
“또 어디가 아픈 건가?”
잔뜩 질린 그녀의 모습에 지오프리가 관심을 보였다. 그의 물음에 미오는 여전히 소리 내지 못하고 입만 벙긋댔다. 그녀를 강하게 응시하는 지오프리의 깊고 검은 눈에 미오가 어른거렸다.
‘나를 걱정하기라도 하는 거야, 지오프리?’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현기증이 강하게 일었다. 성큼 다가온 지오프리가 의자에서 쓰러지기 전 미오를 막아섰다.
“……공작님!”
지오프리가 미오를 번쩍 안아 들자, 라비니아가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괜찮―.”
숨을 헐떡대던 미오가 그의 가슴을 약하게 밀었다. 기절할 것 같았지만, 아직 의식은 멀쩡해서 이런 상황이 불편했다. 속이 뒤틀리는데, 짙은 그의 체향에 눈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지오프리는 그런 그녀에게 냉랭하게 입을 뗐다.
“가만히 있어.”
그녀의 저항을 가벼이 무시한 지오프리는 더욱더 힘을 주어서 그녀를 안았다.
“……으.”
진짜 밉살스러운 지오프리였지만, 그대로 기절해 버린 미오는 그를 미워할 틈도 없었다.
* * *
라비니아 베일, 막 성년이 된 백작가의 영애는 어제 카스피언가에 도착한 이래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나의 꿈이 눈앞에 있어.’
그녀가 지오프리 카스피언을 처음 본 것은 몇 년 전 사무엘이 공작의 종자가 되었을 때였다. 그때만 해도 황태자였던 지오프리는 카스피언 제국에서 가장 멋진 사내였다.
‘가질 수 없는 태양 같았지.’
하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지오프리는 폐위당했고, 변방으로 쫓겨났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일에도 라비니아는 마음을 접지 않았다. 오히려 디아나 여신이 그녀에게 준 기회라고 생각했다. 상처 입은 포악한 짐승을 구슬리는 일은 퍽 매력적이었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니까…….’
어리숙한 사무엘과 서신 교환을 계속해 온 것도 전부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작의 사정을 훤히 알고 있어야 공작 부인이 되는 것도 수월할 테니까.
‘지금은 엉망이지만 조금 있으면 카스피언가도 재정비될 거야.’
부유한 집의 외동딸인 그녀가 카스피언가의 안주인이 되면 말이다. 게다가 그녀는 카트리나 황후와도 제법 친밀한 편이었다. 미래의 일을 상상하던 라비니아는 지오프리의 얼굴을 상상하며 몸을 떨었다.
‘어쩜 몇 년 사이에 저렇게 더 잘생겨졌을까.’
처음 봤을 때 애티가 조금 남아 있었다고 하면 스무 살이 넘은 지오프리의 전신에는 거친 사내의 냄새가 진동했다. 괜히 몸이 달아오른 라비니아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저 탄탄한 가슴에 안기면 어떤 기분이 들까.’
상상만으로도 짜릿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하지만 이런 달콤한 기분은 순식간에 흩어졌다. 낮에 단둘이서 차를 마실 때만 해도 미래의 공작 부인이 된 것처럼 행복하기만 했었다.
사무엘의 방에 쳐들어온 라비니아가 녹색 눈을 사납게 번뜩였다.
“사무엘 베일! 이런 말은 없었잖아? 안 그래?”
라비니아는 낯선 여인을 안고 성큼성큼 건물로 사라지는 지오프리 카스피언의 뒷모습만 바라봐야 했다. 아무리 목이 터져라 불러도 공작은 라비니아를 돌아보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나보다 그따위 볼품없는 계집이 더 중요하다는 거야?”
라비니아가 바닥에 부채를 집어 던지면서 소리를 지르자 사무엘이 그녀를 달랬다.
“맙소사. 라비니아.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미오 님은 카스피언가의 손님이셔.”
“손님 같은 소리 하네! 나한테 사실대로 말해 봐. 그 계집, 귀족도 아니지? 공작님한테 무슨 알랑방귀를 뀌었는지 모르겠지만, 내 눈은 못 속여. 그 계집은 분명 불순한 목적이 있어서 공작님에게 접근한 거야!”
화가 날 대로 난 라비니아는 발을 쿵쿵 구르기까지 했다. 그러다 갑자기 평온한 얼굴을 한 그녀가 사무엘에게 다정하게 웃었다.
“내가 뭐라고 했어. 나를 도와주면 오빠도 나쁠 게 없다고 했잖아.”
“라비니아. 나는 너를 도울 거야. 하지만―.”
사무엘이 순수한 눈을 끔뻑대자 라비니아가 그의 등을 마구 후려쳤다.
“이 얼뜨기! 옛날부터 하나 변한 게 없어!”
“라비니아, 제발 그만 화내.”
사무엘은 라비니아의 일이라면 뭐든 도울 작정이었다.
그것이 양심에 어긋나는 일만 아니라면 말이다. 그는 묵묵히 라비니아의 매질을 견디면서 고개를 숙였다. 라비니아는 어릴 때부터 늘 이랬다. 백부의 딸인 그녀는 사무엘보다 한 살 어렸는데, 늘 그를 시종 취급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지.’
차남인 아버지는 형인 베일 백작의 도움으로 자작 작위를 겨우 얻었다. 형편이 그렇다 보니 사무엘의 집은 라비니아와 친척 관계라고는 하나, 실상 주종 관계나 마찬가지였다.
‘이를 어쩌면 좋지.’
그는 맹세코 라비니아가 어떤 마음을 품고 이곳에 왔는지 몰랐다. 그저 사촌 오빠의 소식을 궁금해하는 줄로만 알았다.
‘얼뜨기라고 불려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인가.’
한참 그를 때리던 라비니아가 의자에 앉자 사무엘이 물을 따라서 가져다주었다. 오랫동안 그녀의 수족 노릇을 했던 것이 몸이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내 말 잘 들어. 나는 카스피언 공작 부인이 될 거야.”
물잔을 내친 라비니아가 턱을 쳐들고 사무엘의 눈을 응시했다.
“하지만 공작님은 너를―.”
“닥쳐. 내가 카스피언 공작님을 유혹 못 할 것 같아?”
“라비니아. 너 그게 무슨 소리야?”
너무 놀란 나머지 사무엘이 말까지 더듬었다.
라비니아가 거친 성격을 지니기는 했지만, 그의 눈에는 여전히 어리고 여린 소녀였다.
‘그런데 유혹이라니 맙소사…….’
아름다운 라비니아의 금발을 응시하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에 시선이 닿았다. 몇 년 보지 않은 사이에 라비니아가 어느새 숙녀가 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이 시뻘게지자, 라비니아가 코웃음을 쳤다.
“저런 숙맥을 어디다 쓰겠어?”
“라비니아. 그런 말은 숙녀가 쓸 만한 말은 아닌 것 같아.”
“사무엘 베일, 정신 차려! 지금 네가 하는 말은 영감 같으니까 말이야.”
그녀의 계획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사무엘을 뒤로하고 라비니아는 창가로 가서 문을 활짝 열었다.
“잘 다져진 길에 자갈이 하나 있어. 이럴 때는 무슨 방법을 써야 할까.”
딱히 답을 바라고 물은 것은 아니었다.
“그건 그냥 파내면 그만인 거야.”
아까 지오프리의 모습이 그녀의 머리를 복잡하게는 했지만, 차분하게 심호흡하려고 애썼다.
‘퍽 아픈 여자라고 했었지. 동정심 때문에 돌봐 주는 것까지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지.’
다시 기분이 좋아진 라비니아가 방을 빙글빙글 돌았다.
“사무엘. 내가 가져온 옷 좀 봐 줘. 사냥 대회에는 제대로 갖춰 입어야 한다면서?”
라비니아가 지나치게 다정하게 굴자 사무엘은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반응 따윈 관심도 없는 라비니아가 혼자 말을 이었다.
“공작님과 잘 어울리는 한 쌍으로 보여야 해.”
그녀는 의상을 한 아름 가져다 놓은 방으로 씩씩하게 움직이다가, 멍하니 앉아 있는 사무엘을 다그쳤다.
“안 따라오고 뭐 해?”
“……응.”
내키지 않는 걸음을 내딛는 사무엘의 얼굴에 슬픈 기운이 가득했다.
* * *
어두운 복도를 지나던 지오프리가 손으로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차라리 피비린내 나는 전장이 더 속이 편했을까.’
허술한 막사는 사방에서 몰아치는 바람도 막지 못해서 자려고 간이침대에 누우면 소음이 귀에 거슬렸다. 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냉기에 저절로 이가 떨리고는 했다. 식사도 부실하기 짝이 없어서 멀건 죽에 딱딱한 빵 한 덩이가 전부인 날이 흔했다.
‘이곳에는 푹신한 침구에 따뜻한 식사가 있기는 해도…….’
수도로 돌아오자 그의 신경이 더욱더 예민해져서 살갗이 따가울 정도였다. 카트리나가 드리운 보이지 않는 칼날이 그의 온몸을 예리하게 찌르는 것 같았다.
‘나를 위해서 사냥 대회를 열다니…….’
황후가 손수 썼다는 서신을 떠올린 그의 이마에 굵은 핏줄이 불거졌다. 황실의 개로 써먹었던 그의 손에 기어코 피를 묻히겠다는 심산이리라.
‘어쩌면 잡고 싶은 게 여우가 아닐지도 모르지.’
어머니가 숨을 거두었을 때 그의 나이 열일곱 살. 온전한 어른이 되기에는 부족했지만, 세상을 모를 만큼 어리지도 않았다. 지오프리는 황제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를 능가하는 새로운 권력을 지닌 이를 질색했다.
‘카트리나와 벤의 지독한 탐욕도 빠뜨릴 수는 없겠지.’
카스피언 제국과 돌아가신 어머니, 황제와 그의 적을 차례로 떠올리자 관자놀이께가 지끈거렸다.
‘변방의 적은 섬멸했지만, 나의 진짜 전쟁은 아직이니까.’
가슴속에 품은 계획을 천천히 곱씹던 지오프리의 귀에 누군가의 신음성이 들렸다. 건너편 미오의 침실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수상한 낌새에 그가 문을 활짝 열었다. 다행히 그녀의 침실에는 누구도 없었다. 문가에 섰는데 침대에 누운 미오가 두 팔을 허우적대고 있을 뿐이었다.
“저리 가! 나 맛없어. 물지 마…….”
“……하.”
마치 누군가에게 물리기라도 한 것처럼 공포에 질린 그녀의 음성에 지오프리의 두통이 더 심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