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손님, 라비니아 베일 (1)
잠깐의 적막이 흐른 후 지오프리가 천천히 잔을 내려 두었다. 그는 탁자에 놓여 있던 초대장을 펼쳐서 읽은 후 긴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는데, 천천히 입을 뗐다.
“곧 사냥 대회가 있는데, 함께 가 주었으면 한다.”
“……!”
이번에도 헛다리를 짚은 모양이다.
미오는 착각을 한 게 민망해서 얼른 물을 들이켰다.
“……사냥.”
단어를 읊조리던 미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로렌에게서 듣기는 했지만, 그녀에게 이런 제안을 할 줄은 몰랐다.
원래 미오는 싫어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그다지 없었다. 눈뜨면 인강 듣고, 책 읽고, 아르바이트를 다녀와서 자는 게 전부였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연애나 다른 것을 생각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눈뜬 후 싫어하는 게 생겼어.’
그건 바로 사냥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책 속 여우로 빙의한 그녀는 사냥꾼에게 쫓긴 것만 여러 번이었다. 지오프리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말이다.
‘화살에 몸이 꿰뚫리는 기분은 별로였던 것 같아.’
특히나 사냥개가 그녀의 목을 콱 물 때는 기분이 더욱더 안 좋았다. 그 감각을 어렴풋이 떠올린 미오가 그녀의 목을 더듬댔다.
‘어쩌면 좋지?’
그와 함께 있을 기회를 놓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지만, 사냥터에 제 발로 갈 수는 없었다.
“왜 그런 얼굴이지?”
초대장을 잔뜩 구기던 지오프리가 그녀를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미오는 침을 꿀꺽 삼키다가 뜻을 전했다.
“죄송하지만, 제 몸이 불편해서 힘들 것 같습니다.”
“음, 아무래도 그렇겠지.”
진지하게 청할 때는 언제고 지오프리는 너무 쉽게 물러났다.
‘뭐야. 원래 저런 성격이었나?’
고개를 갸웃하는데, 미오가 그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
‘마성의 매력이 있어서 여자가 줄줄 따라붙었고, 종국에는 미쳐서 살인을 밥 먹듯 했다는 것밖에는 몰라.’
왜 황태자 자리에서 폐위가 되었는지, 로렌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과거 그의 모습도 전혀 몰랐다. 단칼에 거절한 것이 괜히 민망해진 미오가 헛기침을 하자 그가 하녀에게 손짓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허브차가 곧 준비되었고, 그것은 미오의 앞에 놓였다.
“기침에는 허브차가 좋으니까, 자주 마시도록.”
그녀는 멍하니 잔을 내려다보면서 눈을 깜빡댔다.
‘지오프리가 호의를 베푼 거야?’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었나 가만 따져 봤다. 미오가 차를 마실 생각도 못 하고 있는데, 기사 하나가 헐레벌떡 식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공작님. 급한 전갈이 있습니다.”
흙먼지를 잔뜩 덮어쓴 모습이 어디 멀리서 온 게 분명했다. 지오프리는 작은 소리로 전령과 귓속말을 주고받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일어나야겠군. 마저 들고 일어나도록 하지.”
“……네.”
갑옷 소리를 내는 전령과 그가 사라지자 넓은 식당이 황량한 느낌으로 뒤덮였다. 어쩐지 허전한 기분에 미오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여우가 사냥터에 간다는 건 죽으러 가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퍽 지쳐 보이는 지오프리의 얼굴이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로렌한테서 괜한 말을 들어서 말이야.’
순진한 지오프리가 데리고 갈 영애를 어디서 구하겠냐고 잔뜩 걱정하던 중년 부인의 얼굴이 아른댔다.
“이런 기분 진짜 싫은데…….”
결국, 더 식사할 수 없었던 그녀도 벌떡 식탁에서 일어났다.
따뜻한 허브차가 채 식기도 전이었다.
* * *
방에서 대강 아침을 먹은 미오가 정원 산책에 나섰다.
“오늘은 산책이라도 좀 해야겠어.”
어제 지오프리가 그렇게 떠나 버린 점심 이후 미오는 방에서만 지냈다. 머리가 너무 복잡했고, 우울한 것 같기도 했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두 다리로 걷는 감각이 제법 익숙해졌다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이 하나 틀린 게 없다니까.’
배가 부르니 쓸데없는 생각이 절로 났다. 노란색의 드레스가 풀을 스치는 소리가 사각사각 듣기 좋았다.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은 우울해진답니다.’
로렌의 말이 맞는지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느릿하게 걷는데 라일락 꽃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슬슬 건강을 회복했으니 본격적으로 새로운 삶을 꾸릴 준비를 해야 할 때였다.
‘나를 죽일지도 모르는 지오프리 말고 젊은 데다 부자에 잘생긴 그런 남자를 찾는 거야.’
금발에 푸른 눈을 한 미남을 떠올리자, 함박웃음이 절로 났다. 그녀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주먹만 한 보석 반지를 내미는 미남의 모습에 없던 힘이 불끈 샘솟는 것 같았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내가 못 할 게 뭐가 있겠어.”
커다란 나무를 빙글빙글 돌면서 미오가 소원을 빌었다. 그러다 의외의 인물과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하던 것을 멈추게 되었다.
‘아니, 왜 지오프리가 정원 한가운데 있는 거지?’
더구나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미오는 얼른 사과한 다음에 몸을 홱 틀었다. 혼자 나무를 도는 모습을 지켜봤을 지오프리나 손님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왜 하필 저기서 차를 마시느냐고…….’
그렇게 움직이려는 찰나 사락사락 드레스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그녀의 팔을 세게 붙들었다. 놀란 미오가 고개를 돌리자 미인이 생긋 웃었다.
“어딜 가요. 그렇지 않아도 만나고 싶었는데 잘되었지 뭐예요.”
“아니, 저는 두 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요.”
“날씨가 좋아서 차가 얼마나 달콤한지 몰라요. 이리 와요.”
낯선 미인은 싫다는 미오를 강하게 잡아끌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울상을 짓던 미오가 티 테이블에 끌려왔고, 잠시 적막이 감돌았다. 가만 차를 들던 지오프리가 아까부터 미오를 시선으로 죽일 것처럼 노려봤다.
‘불편하다. 불편해.’
게다가 금발에 녹안을 한 여인도 미오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사방에서 그녀만 보는 게 싫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는데, 목이 뻐근했다.
‘그냥 기분 전환을 좀 하고 싶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시선으로 공격당하게 된 거지.
게다가 저 수상한 여자는 누구야?
그녀를 언제 봤다고 다짜고짜 손을 잡질 않나.
영 불쾌해서 남몰래 잡혔던 손을 허벅지에 쓱쓱 문질렀다.
“공작님. 차향이 너무 좋아요. 아마도 특별한 차겠죠?”
조용한 정원을 깨운 것은 낯선 여인의 음성이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나무 위에서 쉬고 있던 비둘기가 하늘로 푸드덕 날아올랐다.
“……음.”
지오프리는 아무런 답 없이 그의 앞에 앉은 미오를 응시했다. 하얀 목덜미를 내놓고 땅만 바라보는 미오를 향해서 인상을 구겼다.
‘죄지은 것도 아닌데 왜 저러고 있는 거지.’
애정 고백을 할 때는 그리 뻔뻔하게 굴더니 말이다. 지오프리는 상대의 진심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저 모습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목이 부러질 것 같아서 미오가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건너편에 앉은 여인이 호들갑스레 입을 뗐다.
“어머! 이제야 저를 봐 주시는 거예요?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라비니아 베일이라고 해요. 이곳에서 일하는 사무엘의 먼 친척이랍니다.”
거창한 소개에 미오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로렌이 말했던 손님이 바로 이 사람인가 보다. 한 박자 늦게 미오가 답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미오라고 해요. 여기 카스피언 공작님에게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뭔가 더 소개하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말이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 저는 여우 수인인데, 사실 책에 빙의했어요. 당신들 전부 책 속 등장인물이랍니다. 이렇게 소개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짧은 소개 후에 라비니아가 미오의 외양을 뚫어지게 훑었다.
“당신 머리카락 색이 진짜 독특해요. 제국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색이에요.”
햇빛을 받은 미오의 은발이 여러 갈래 반짝임을 자아냈다. 그녀의 신비로운 호박색 눈과 가냘픈 몸매를 훑던 라비니아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우리 사무엘 오빠와 잘 어울릴 것 같아요. 그렇지 않나요, 공작님?”
“……글쎄.”
지오프리의 성의 없는 답에 미오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둘 다 정말 짜증 나.’
초면에 뜬금없이 사무엘하고 엮어 대는 라비니아의 속이 너무 훤히 보였다. 아까부터 내내 차 맛 타령에 자기 머리가 어떠냐면서 관심을 애걸하는 것을 보면 라비니아는 공작을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더 기분이 나쁜 건 지오프리의 태도였다.
사무엘과 미오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눈빛이었다. 사무엘은 그래도 귀족가의 차남이고, 그녀는 내세울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모르는 법이라고!’
막말로 나중에 지오프리가 그녀에게 매달리고, 미오도 그 없이 못 사는 그런 사이가 될지 누가 알겠나.
‘아니야. 그건 너무 상상이 지나쳤어.’
찻잔을 만지작대던 미오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자, 라비니아가 앞에 있는 쿠키 접시를 밀었다.
“이런 쿠키 먹을 일 잘 없을 것 같은데 한번 드셔 보세요. 여기 요리사 솜씨가 일품이거든요.”
라비니아의 친절을 가장한 묘한 비아냥에 미오는 온몸으로 거부감을 느꼈다. 상대적으로 수수한 차림을 한 그녀를 깔보는 게 확실했다.
“감사합니다.”
귀족 아가씨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서, 일단 쿠키를 하나 집어 들었다. 그때 라비니아가 눈을 빛내면서 공작에게 말을 걸었다.
“공작님. 사냥 대회에 함께 갈 사람은 구하셨나요?”
“……아직.”
잔뜩 들뜬 표정을 지은 라비니아가 말을 이어 나갔다.
“아마도 여우 사냥을 하겠죠? 저는 말만 들었지. 아직 한 번도 참석해 본 적이 없답니다.”
마치 이 자리에 공작과 라비니아 두 사람만 있는 것처럼 굴었다.
‘진짜 열받네?’
라비니아가 공작을 짝사랑하든 말든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진짜 그의 옆자리를 노리는 거라면 지금은 좀 곤란했다. 탁자에 두 손을 다 올려 둔 미오가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지오프리를 올려다봤다.
‘지오프리는 내 거야.’
새로운 각인 상대를 찾을 때까지라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