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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13)화 (13/123)

13화 믿을 수도, 가까이할 수도 없는 사람

눈 부신 아침 햇살에 미오는 작은 소리로 웅얼댔다.

“너무 피곤해.”

숲에서 지낼 때보다 이곳에서 지내는 게 더 피곤했다. 안락한 침구에 맛있는 음식만 먹는데도 왜 그런지 신기한 일이었다.

“……뭐야.”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았다.

화들짝 놀란 미오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눈이 부어서 그렇구나.”

어제 잠들기 전에 울었더니 눈이 퉁퉁 부었다.

그나저나 뭔가 중요한 것을 잊은 것 같았다. 몸을 벌떡 세운 그녀가 속으로 날짜를 헤아려 봤다.

“왜 여우로 안 변했지?”

분명 잠들기 전만 해도 밤에 은밀하게 지오프리의 침실을 찾을 작정이었는데.

“또 그냥 잠들어 버렸어.”

겨우 떨어진 눈 사이로 보이는 다섯 손가락을 쫙 펼쳐서는 머리를 콩콩 두드렸다.

“……어휴.”

여우로 변해도, 사람으로 있어도 걱정은 끝이 없었다. 어제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던 그녀는 한 가지 추측을 할 수 있었다.

“그 집무실에서 그와 손이 닿아서인가?”

입술을 맞대지 않아도 되는 거였나.

사실 손만 닿은 것은 아니었다.

포옹한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그의 가슴에서 울리던 심장 소리와 짙은 체향, 귓가에서 맴돌던 낮은 음성에 미오의 볼이 다시 붉어졌다.

“……어지러워.”

꼭 입을 맞추지 않아도 되니까, 잘된 일이라고 하면 잘된 일이기는 했다. 이제까지 그에게 달려들었던 순간을 생각하면 머리에서 뜨거운 김이 피어올랐다.

‘아무도 못 봤으니까 다행이지.’

하지만 또 문제가 있었다.

그나마 알고 있었던 인간으로 변하는 조건이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점이다.

‘머리만 쓸어도 가능한 걸까? 입맞춤처럼 보름이라는 기간은 같을까?’

어쩌다 이런 제약이 있는 몸이 돼서는 내내 고민만 해야 하는지.

“……후.”

침대 이불을 걷고 앉은 미오의 입에서 긴 한숨이 터졌다.

“아! 답답해.”

창가를 몇 번 서성이던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미오는 이곳 사람들과 교류하는 게 싫어서 될 수 있으면 방에만 머물렀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하지만 밖에 나가는 것은 좀 꺼려졌다. 적극적으로 대화를 시도하는 로렌은 좀 부담스러웠고, 그녀만 보면 볼을 붉히는 사무엘도 약간 거북했다. 로렌과 사무엘이 출몰하는 장소를 제외하자, 공작가의 서재만 남았다.

‘또 책인가.’

책은 냄새만 맡아도 멀미가 날 것 같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서재에는 집사가 자주 드나들었지만, 그는 미오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벌떡 일어난 그녀가 곧장 서재로 향했다.

‘다행이야. 아무도 없는 것 같아.’

서재는 공작의 집무실과는 달리 웅장하게 꾸며져 있었다. 사면이 책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중간에는 길게 여러 줄 책장이 늘어서 있었다. 천장에는 디아나 여신의 전설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었다.

“꼭 도서관처럼 생겼어.”

가끔 기분 전환 삼아서 들르고는 했던 도서관 생각이 절로 났다. 좁은 고시원 방에는 창이 없어서, 항상 햇빛이 그리웠다. 두리번대던 그녀가 아무 데나 가서 앉아서 기지개를 켰다. 햇살이 쏟아지는 넓은 창밖을 내다보는데, 절로 콧노래가 흘렀다. 방을 벗어났다는 것만으로 제법 기분 전환이 되었다.

“이게 뭐지?”

그러다 고개를 내리는데 열린 창으로 바람이 불어서 서류 한 장이 그녀 앞으로 날아왔다. 꾸깃꾸깃한 것이 한참 고심하던 티가 역력했다. 슬쩍 보던 그녀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나랑 상관도 없는 일이잖아.”

멍하니 커다란 창을 내다보던 미오는 다시 종이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수학 교육의 폐해랄까. 몇몇 숫자만 보고서 머릿속으로 암산을 하게 되었다.

‘대충 여기에서 오류가 생긴 것 같은데.’

결국, 손을 뻗어서 다른 종이를 펼쳤다.

“식료품비 다음에 이걸 빼고 더하면…….”

미오는 새 종이에다 틀려서 여러 번 지운 부분을 새로 풀어서 적었다. 계산을 마치자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숫자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제 속 시원하네.”

시계를 언뜻 보자 지오프리와 점심을 먹을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점심을 대접하는 것이 카스피언가의 전통이니까요.”

정중한 것 같지만 묘하게 기분 나쁜 지오프리의 말을 따라 해 보았다.

‘또 늦었다고 욕하겠어.’

잠시 후 느린 걸음으로 그녀가 서재를 빠져나가자, 서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적막에 잠겼다.

* * *

지오프리를 빼면 카스피언가에서 가장 상대하기 힘든 사람은 바로 로렌이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교류하지 않으려는 미오의 빈틈을 강하게 파고들었다.

“디아나 여신도 정말 무심하기도 하시죠.”

치료를 받은 후 침대에서 쉬는 미오의 곁에 다가온 로렌이 푸딩을 건네주었다. 혼자 쉬고 싶었지만, 몽글몽글하고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푸딩을 외면하기는 힘들었다.

“무슨 일이 있나요.”

모르는 게 없는 로렌이 한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사냥 대회 말입니다. 우리 공작님을 위해서 개최한다고 하는데 그게 말이나 되느냐고요!”

푸딩을 살포시 떠서 입에 넣던 미오가 동그란 눈을 데굴거렸다.

모르긴 해도 사냥 대회는 귀족들만 즐기는 여흥이 아니던가. 열어 준다는데 그게 왜 나쁜 거지?

옆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로렌이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공작님이 3년 내내 제국을 지킨다고 검을 휘두르셨는데요. 지금 사냥 대회가 내키시겠습니까. 피라면 아주 질색하시는 분인데요.”

‘피로 목욕한다는 소문이 있는 지오프리가 피를 질색한다니?’

아무래도 그의 유모였던 로렌은 객관적으로 지오프리를 보는 것은 무리인 것 같았다.

“게다가 말입니다. 사냥 대회에 동반자를 대동하라고 했다네요. 카스피언 공작님하고 어울릴 만한 영애가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진답니까? 게다가 연애 한번 해 보지 않은 우리 순진한 공작님이 어디서 상대를 찾겠어요?”

로렌은 자꾸 상대에게 한쪽 눈을 깜빡댔지만, 미오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성의 지오프리가 왜 연애를 한 번도 못 해 본 거지? 원작에 따르면 그를 따르는 여인이 수도 없었는데…….

로렌의 말에는 또 틀린 부분이 있었다.

‘순진하기는 뭐가 순진해.’

그녀의 귓가에 은밀하게 속삭이거나 뒤에서 안는 모양새가 아주 능숙했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자 귀가 붉어져서 남은 푸딩을 먹을 생각이 아예 사라질 정도였다.

‘그나저나 사냥 대회라니 그런 게 있었나?’

책의 내용을 떠올려 봤지만, 정치나 궁중 암투 쪽은 건너뛰고 읽은 탓에 도무지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참, 그래서 오후 늦게 손님이 한 분 오실 겁니다. 아마 며칠 이곳에 머무르실 거예요.”

로렌은 말하기가 곤란한지 말하다 말고 머뭇댔다. 그사이 푸딩을 물린 미오가 손수건으로 입가를 훔치는데, 로렌이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며 미소 지었다.

* * *

다시 지오프리와 함께하는 점심시간이 되었다. 이제 보조 기구 없이 걸을 수 있게 된 미오가 천천히 식당으로 들어섰다.

‘눈만 뜨면 점심시간이 되는 기분이야.’

그녀의 하루가 지오프리를 만나야 하는 이 끔찍한 시간을 기준으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먼저 와서 차를 마시던 지오프리가 쭈뼛대면서 앉는 미오를 보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늦었군.”

“죄송합니다.”

시중을 드는 하인이 의자를 밀어 넣어 주었고, 그녀의 잔에 차를 부어 주었다. 미오의 굼뜬 행동을 지켜보던 지오프리가 짧게 입을 뗐다.

“치료는 빠뜨리지 않고 받는 거지?”

“네.”

그의 음성에 빨리 나아서 그녀가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듬뿍 묻어났다.

‘걱정하지 마. 낫기만 하면 좋은 사람 찾아서 네 눈앞에 다시는 안 나타날 테니까.’

그녀가 바닥을 보면서 무시무시한 말을 퍼붓는데, 지오프리는 품속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서 알약 하나를 삼켰다.

“회복이 더디군.”

미오는 그녀의 회복 운운하면서 약을 먹는 그를 유심히 살폈다. 무슨 약이길래, 품속에 넣고 다니는 걸까.

그녀가 아무 답을 하지 않자, 지오프리가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그게.”

모두가 지오프리처럼 강인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회복이 더딘 것에는 그의 책임도 일부 있다. 덜 나은 몸으로 식사 때마다 매번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것은 퍽 괴로운 일이었다.

‘하긴 지오프리가 그런 사정을 알 턱이 있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곳의 요리가 아주 훌륭했다. 언제나 늘 좋은 부분을 찾아내려는 그녀의 긍정적인 성격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아스파라거스를 곁들인 메추리구이와 버섯과 가지 요리, 멜론 셔벗은 절묘하게 어울려서 먹는 내내 행복을 불러일으켰다.

‘인생 뭐 있어?’

이렇게 맛있는 것 먹고 기분 좋으면 그만인 거지, 뭐.

적당히 배가 부르자 순간 최종 목표도 까마득하게 멀게만 느껴졌다.

“잘 먹는군.”

어쩐지 빈정대는 것 같은 지오프리만 아니면 그 순간이 더 오래갔을 것이다.

“모두 공작님 덕분입니다.”

반쯤은 진심인 인사였다. 의원도 의원이지만, 이렇게 따뜻하게 잘 자고 배부르게 먹는 것은 생전 처음이었으니까.

“내가 원하는 게 하나 있다.”

“……네?”

건너편에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지오프리의 얼굴이 오늘따라 고혹적이었다. 창을 통해서 들어온 빛이 죄다 지오프리만 비춰 주고 있는지, 그 주변에 황홀한 반짝임이 피어올랐다. 깊은 눈매와 붉디붉은 입술에 시선을 완전히 빼앗겼다.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를 것 같은 미모야.’

잠시 멍하게 있던 그녀는 금방 정신을 차렸다.

카스피언 공작이 그녀에게 원할 게 뭐가 있지?

턱을 쳐든 오만한 표정이 어쩐지 은밀해 보였다. 의구심 가득한 얼굴을 한 미오가 고개를 갸웃댔다.

‘……설마.’

그녀는 며칠 전에 옷을 훌훌 벗던 지오프리를 떠올리면서 고기를 썰던 칼을 세게 움켜잡았다. 미오가 무슨 노력을 하기도 전에 그가 그녀에게 빠질 수 있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나한테 완전 반한 거야?’

그녀에게 반해서 미오를 완전히 소유하려고 들려는 걸까?

‘하지만 어림도 없어.’

그녀는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런 일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굳은 결심을 다지는 미오의 호박색 눈이 번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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