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싫은데 얼굴은 자꾸만 보게 되는
힘들게 답을 했지만, 지오프리는 별로 신경도 안 쓰는 눈치였다. 미오는 드레스 위에 주먹을 불끈 쥔 채 몸을 덜덜 떨었다.
‘버텨야만 해.’
이렇게 싫은 얼굴을 하면 그녀가 했던 거짓말을 죄다 들켜 버릴 것이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심호흡하자 겨우 가슴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한고비를 넘겼어.’
어둠이 익숙해지자 집무실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공작가의 집무실치고는 퍽 단출했다. 빽빽한 책꽂이와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가 전부였으니까. 주변을 두리번대는데 지오프리가 짧게 입을 뗐다.
“내가 뭐라고 했었지?”
대화할 때는 눈을 봐야 한다는 그의 말이 생각난 미오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아직 커튼을 붙들고 있던 지오프리와 눈이 마주쳤다.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는 얼굴이 조금 수척해 보였다. 셔츠는 잔뜩 구겨져 있었고,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수염이 났네.’
흐트러진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서 눈을 떼기 어려웠다. 평소보다 깊어진 눈매에 얼굴에 야릇한 기운이 흘렀다. 그의 미모를 훑던 미오의 시선은 어느새 풀어 헤쳐진 셔츠의 가슴팍에 이르렀다. 그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고, 짧은 감탄사까지 뱉었다.
“내가 잘생긴 건 알고 있지만, 그런 눈빛은 좀 부담스럽군.”
“아, 그게…….”
“나를 한입에 꿀꺽할 것 같은 표정이거든.”
끙.
급히 입가를 훔치던 미오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냉혈한이라는 설명은 읽었지만, 저렇게 왕자병이 있는 줄은 몰랐다. 게다가 그녀는 떳떳했다.
‘길 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봐. 반짝이고 아름다운 것에 시선을 뺏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그녀가 딴청을 부리자 지오프리가 셔츠의 단추를 채우면서 중얼댔다.
“부끄러운 것을 모르는 건가?”
“저야 공작님의 팬이니까…….”
미오가 아주 작게 속삭이자 어깨를 한번 으쓱한 그가 자리에 앉았다. 지오프리가 서류를 집어 들자 영문을 알 까닭이 없는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답했다.
“내가 바빠서 이곳으로 부른 거다.”
“바쁘시면 저는 나가 보겠습니다.”
편안하게 잘 쉬고 있던 그녀는 벌써 침대가 그리웠다. 미오의 말에 지오프리가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여기 있어. 내 손님은 내 눈으로 직접 살펴야 하니까.”
얼핏 들으면 손님을 제대로 대접하겠다는 것 같지만, 결론은 그녀를 직접 감시하겠다는 말이었다. 의심을 거두지 않는 지오프리를 보면서 미오는 내내 웃는 얼굴을 유지하느라 입가가 떨렸다.
“앞으로 외부 일정이 있는 날을 제외하고는 점심은 같이 먹도록 하지.”
“아니―.”
너무 놀라서 고민도 하기도 전에 답이 튀어나왔다. 지오프리와 마주 보고 식사한다는 상상만으로도 체기가 밀려들었으니까. 그녀의 말에 은색 안경테를 만지작대던 지오프리가 싱긋 웃었다.
“손님과 식사하는 건 카스피언가의 오랜 전통인 데다, 분명 좋아할 줄 알았는데 아닌가?”
왠지 다 알면서 떠보는 것 같은 지오프리 때문에 등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제가 너무 떨려서 그래요. 공작님을 앞에 두고 뭘 먹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
말하는데 속이 울렁대서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건 알아서 잘 극복할 문제인 것 같군.”
그 말을 끝낸 지오프리가 본격적으로 서류에 몰두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바라보던 미오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다야?’
미오가 소심하게 그를 노려봤지만, 지오프리는 전혀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도대체 나는 뭘 하라는 거야? 자기 일하는 모습을 감상하라는 건가?’
절망적인 얼굴로 주변을 살펴봤지만, 이곳에는 온통 책밖에 없었다.
‘책이라면 지긋지긋한데…….’
죽기 전까지 책을 읽었고, 책 때문에 이런 비극이 발생했다. 그러다 원래 살던 좁은 고시원이 떠올랐다. 노트북을 올리면 책을 따로 둘 데가 없는 작은 책상은 항상 삐걱삐걱 소리가 났다.
‘나무 냄새가 참 좋아.’
미오가 손을 뻗어서 넓고 단단한 원목 책상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몸도 성하지 않은 그녀를 이곳에 앉혀 둔 것은 분명 무슨 목적이 있을 것이다.
‘나를 괴롭히려는 거겠지.’
하지만 미오는 그렇게 호락호락 당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의자의 바퀴를 민 그녀가 책장 근처로 다가갔다. 정치, 역사, 경제. 제목만 봐도 졸릴 것 같은 책이 한가득하였다. 옆으로 옮기자 전술이나 무기류에 관한 도감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평소에 이런 책만 읽는 거야?’
그러다 고개를 돌리자 책장 높은 곳에 익숙한 제목이 눈에 띄었다.
‘……《톰과 사과나무》, 《황금알을 낳는 닭》.’
아무리 봐도 매정한 지오프리와 어울리지 않는 책이었지만, 그나마 읽을 만한 건 저것뿐이었다.
앉은 채로 팔을 뻗었지만,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책을 빼낼 수가 없었다. 미오는 의자 팔걸이를 세게 움켜쥔 채 다리를 바닥에 내렸다. 하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는 탓에 무릎 아래가 후들댔다.
“조금만 더―.”
그때였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책장에 그늘이 깊게 드리워졌다. 그녀의 등 뒤에서 익숙한 체향이 느껴졌다.
“이건가?”
책을 향해 뻗은 미오의 손 위로 그의 커다란 손이 뒤덮였다. 지오프리의 손바닥이 손등에 닿자, 미오의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거의 안기다시피 한 자세라서 그녀는 지오프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기, 이제 괜찮아요.”
심장이 너무 날뛰어서 뭘 읽으려고 했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서 파르르 떨렸고, 입 안의 침이 마르다 못해 목이 따가웠다.
“자. 받아.”
괜찮다는 그녀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지오프리가 미오의 가슴에 책을 안겼다. 그 바람에 손이 책장에서 떨어졌고, 곧장 그녀의 몸이 비틀거렸다.
“……이런.”
그의 가슴에 미오의 머리가 살짝 닿았다. 책을 끌어안은 미오의 어깨와 허리를 부여잡은 그가 낮게 속삭였다.
“이런데도 치료가 필요 없다고 하는 건가? 제대로 서지도 못하면서.”
명백한 무시에도 미오는 화를 낼 수 없었다. 지오프리를 의식하느라 목이 완전히 잠겨 버렸다. 머리가 이상한 감각에 빠져들어서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왜 이러는 거야.’
그의 품에 안기자 떨리기도 했지만, 어쩐지 그리운 기분이 느껴졌다.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생각에 미오는 덜컥 겁이 났다. 그녀는 강하게 힘을 주어서 그의 몸을 밀어 내려고 했다.
“공작님. 책 감사합니다.”
“울고 있는 건가?”
“아, 아닙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그녀의 음성이 푹 잠겨 있었다.
“내가 이러는 게 싫어서?”
어떤 답도 할 수 없던 미오가 책만 꼭 움켜쥐자 그가 고개를 깊숙하게 숙였다.
“내가 그렇게 좋은가?”
지오프리는 그녀가 그를 너무 좋아해서 운다고 착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맙소사. 정말 최악이야.’
하지만 지금 강하게 반박할 수 없는 처지인지라, 두통이 밀려들었다.
“저는 진정한 공작님의 팬인걸요.”
간신히 떨어지지 않는 입을 떼자 자괴감이 파도처럼 그녀를 덮쳤다. 그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지오프리는 곧장 몸을 뗐다. 말도 없이 책상으로 돌아간 그는 다시 서류를 넘겼다. 미오가 얼른 한 손으로 의자 손잡이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분명 넘어졌을 것이다.
‘……뭐야!’
친절한 척 뒤에서 몸을 받쳐 주고 책까지 뽑아 주길래 웬일인가 했더니 역시 지오프리는 지오프리였다.
‘저런 놈한테 뛰는 심장을 가지고 있다니…….’
간신히 의자에 앉았는데 절로 이가 으드득으드득 갈렸다.
‘참자.’
그에게 휘둘리는 게 오히려 꼴사납다는 생각에 책을 펼쳤다. 하지만 지오프리가 준 것은 그녀가 보려고 했던 책도 아니었다.
‘그럼 그렇지.’
표지에는 바다 근처에 앉아서 슬피 우는 여인이 그려져 있었다.
‘이 이야기는 안 내키는데…….’
빙의한 원작인 《목을 비틀어 너를 취하고》와 결말이 비슷했다. 두 작품 모두 사랑 때문에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여인이 나왔다.
“……휴.”
달리 할 일도 없는 터라 그녀는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책의 내용은 익히 잘 아는 내용이었다. 인어는 첫눈에 왕자에게 반했다. 여우가 숲에서 그녀를 해치지 않은 지오프리에게 묘한 감정을 품은 것처럼.
인어는 왕자를 만나려고 그녀의 고운 음성을 바닷속 마녀에게 넘겼다. 대가로 받은 것은 인간의 다리였지만, 인어는 이제 말할 수 없었다.
‘지오프리 근처에 있으려고 모든 걸 내팽개쳤지.’
바다에 빠진 왕자를 구한 것은 인어였고, 기습으로 쓰러진 지오프리를 구해 준 것은 여우였는데…….
왕자와 지오프리는 그들을 구해 준 사람을 착각해서는 다른 여인과 사랑에 빠져 버렸다.
‘둘 다 미련해 빠졌어.’
결말을 향해서 책을 읽어 내려가는데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뻔하다고 생각했던 이야기는 미오를 다시 울렸다. 눈가를 소매로 훔쳐 가던 그녀는 인어가 물거품이 되어서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대목에서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지금 지오프리를 외면하면 너는 살 수 있어.’
죽기 전에 누군가 여우에게 속삭였다.
멀리 달아나라고, 지오프리가 없는 어디론가 떠나라고.
하지만 여우는 그러지 않았다.
‘지오프리가 없는 곳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걸.’
보답받지 못한 슬픈 사랑에 일말의 후회가 없다는 듯 여우는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지오프리를 지키기 위해서.
기꺼이 아무도 모르는 희생을 했다.
화르르 타오르는 불길은 여우를 천천히 삼켰다.
“……흐끅.”
책을 덮은 미오가 소리 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죽음은 끔찍한 일이었다. 몇 번이나 겪어도 조금도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에 온몸이 난도질당한 기분이었다. 어깨를 부르르 떨면서 기막힌 운명을 원망했다.
‘이게 다 뭐람.’
잠시 후 한 손으로 눈을 비빈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아.”
서류를 읽고 있는 줄 알았던 지오프리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은색 안경테에 빛이 반사되었고, 안경알 너머 의문이 가득 담긴 그의 시선에 미오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슬픔으로 가득 찼던 가슴이 다시금 세차게 뛰었다.
‘빌어먹을 각인.’
이 모든 것은 그녀의 의지가 아니다.
가슴께를 움켜쥔 미오는 그렇게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