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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11)화 (11/123)

11화 복수의 불꽃은 시들지 않는다

카스피언 황궁, 황후의 응접실에는 적막한 고요가 감돌았다. 마주 앉은 카트리나와 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지 않은 채 각자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침묵을 깬 것은 포도주를 홀짝이던 벤이었다. 그의 푸른 눈이 노기로 번들거렸다.

“황후 폐하.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죠?”

아들의 비아냥대는 음성에 카트리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 역시 일이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들을 위해서 지오프리를 황태자 자리에서 끌어내렸고, 변방으로 쫓아냈다. 명목상 변경을 지키는 임무를 준 것이지, 사실상 죽으라는 것과 같았다. 제대로 된 식자재나 군용 물품을 공급해 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오프리가 돌아오면서 그녀의 계획은 완전히 어그러졌다.

‘자그마치 3년이야. 살아남은 것도 믿기 어려운데, 적을 섬멸했다고?’

연회장에서 멀쩡히 돌아온 그를 봤던 일을 떠올리자 머리에 열이 올랐다. 그 일로 화가 난 벤이 여러 날 그녀의 부름을 무시했다.

“황태자. 그 일이라면 아직 조사 중이랍니다.”

아들의 눈이 시뻘게진 것을 살피던 황후가 애써 침착을 가장했다. 변방으로 쫓아낸 전 황비의 아들이 버젓이 살아서 전장에서 공을 세웠다. 그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너저분한 일을 할 개가 필요하기는 했으니까.

‘하지만 어째서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거지?’

그녀가 보낸 감시꾼과 용병이 곳곳에 수두룩했고, 모두 지오프리를 노렸다. 그러니 이곳까지 무사히 온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죄다 쓸모없는 것들이야.’

돈만 밝히는 인간들이 제대로 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기다란 손톱을 튕기던 황후가 가만 고개를 젓는데, 벤이 크게 고함쳤다.

“화근이 멀쩡히 수도를 돌아다니는데, 인제 와서 조사하신다고요? 우리 눈앞에 나타나기 전에 손을 썼어야지요. 저한테 뭐라고 하셨습니까. 황후 폐하만 믿으라면서요!”

격분한 벤이 잔을 거칠게 탁자에 내려놓자 사방으로 포도주가 튀었다. 벌떡 서서 카펫에 흘러내린 붉은 액체를 내려다보던 그가 말을 이었다.

“약속하신 것과 매우 다르지 않습니까? 어머니.”

어머니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벤의 눈빛이 번들댔다. 이럴 때의 아들은 무척 위험했다. 그녀는 누군가 그들의 대화를 들을까 주변을 다시 살폈다. 하녀를 모두 물렸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황태자. 진정해요. 어차피 지금 그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카트리나의 말에 벤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불쌍한 황후 폐하. 거리에 한번 나가 보시죠. 무슨 소문이 도는지.”

비틀대던 벤이 창가로 걸어갔다.

카트리나와 같은 구불구불한 금발을 한 그가 한 손으로 앞머리를 거칠게 넘겼다.

‘그 녀석, 가진 것이라고는 무너져 가는 성 하나뿐인 주제에.’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지오프리의 눈빛이 짐승처럼 날카로웠다. 귀족들이야 그와 황후의 비위를 맞춘다고 굽실대지만, 바깥은 사정이 달랐다.

‘진짜 황태자는 지오프리라고 한다지?’

온갖 무서운 소문을 몰고 다니기는 했으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지오프리를 찬양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나왔다. 처음에는 작은 구멍이지만, 구멍이 점점 늘어나면 손바닥으로 터져 흐르는 민심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자를 내 눈앞에서 치워 주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럼요. 내가 약속했죠.”

다급해진 카트리나가 아들의 곁에 다가와서 그의 손을 끌어 잡았다.

“이 제국을 황태자에게 주겠노라고 약속한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뿐인 아들은 그녀의 세상 전부였다.

비록 카스피언 황제와의 불륜으로 낳은 아이였으나 벤은 출생부터 빛나는 보관을 쓸 운명임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어미를 믿어 주세요. 네?”

“말로만 지껄이는 것을 누가 믿겠습니까? 황후 폐하.”

카트리나의 손을 세차게 뿌리친 벤은 그녀의 어깨를 밀친 후 문 쪽으로 걸어갔다.

“저녁이라도 같이 들까 했는데…….”

카트리나가 혼자 중얼대자, 문손잡이를 돌리던 벤이 멈춰 섰다.

“황후 폐하가 약속을 지키신다면 식사든 뭐든 한번 생각해 보죠.”

벤은 그 말을 남기고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 문을 박차고 나갔다.

“……벤.”

아들을 향해 손을 내뻗던 카트리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무너졌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그녀의 푸른 눈에 서릿발이 어려 있었다.

* * *

몸이 푹 꺼지는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미오의 기분은 날아갈 것 같았다.

‘카스피언가의 손님이라.’

다시 생각해 봐도 그럴듯했다.

사실 이전까지의 죽음이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아니었다. 죽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 과정은 흐릿했다.

‘그래. 그게 맞는 거지.’

책 빙의도 억울한데, 끔찍한 기억까지 모조리 줬다면 아마 그녀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일상생활이 힘들었을 것이다.

‘지오프리 얼굴만 봐도 그대로 기절했을걸?’

침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미오가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만 문질러 봤다. 조용할 때 생각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었다.

‘여기는 책 속이지만…….’

모든 것이 책과 같지는 않았다.

‘책 속이지만, 어쨌든 나는 지금 이곳에서 살고 있어.’

그리고 또 하나, 지오프리는 지오프리인가? 책과 같이 흘러가지 않는다면 이곳의 지오프리를 원작의 지오프리와 같은 인물로 봐야 하는가. 아닌가.

‘뭐야. 이건 마치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급의 질문인데?’

그 오만한 얼굴을 떠올렸더니 골치가 지끈댔다. 사실 이런 것보다 그녀의 건강이 제일 문제였다. 숲에서 오래 굶었더니 몸이 말이 아니었다. 움직일 때마다 뼈마디에서 소리가 났고, 조금만 걸으면 어지러웠다.

‘이래서야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

괜히 약해지자 몇 안 되는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녀석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어딘가 다녀온다고 하는 사이에 내가 숲을 떠났으니, 다시 만날 수 없겠지.’

항상 먹이를 남겨 주던 북극곰과 향긋한 과일과 풀이 있는 곳을 알려 주던 사슴은 그녀의 유일한 친구였다.

‘우습게도 인간 친구는 하나도 사귀지 못했어.’

별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원래도 그녀에게는 친구가 별로 없었으니까.

“우울한 생각은 그만!”

친구들은 그녀처럼 아둔하지 않으니까, 잘 먹고 잘살고 있을 게 분명하다.

“내가 제일 허술하니까, 나만 정신 차리면 되는 거야.”

그나저나 오늘은 굉장히 중요한 날이었다.

‘보름의 마지막 날이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오프리와―.

그 생각을 하자 미오의 얼굴에 먹구름이 잔뜩 꼈다. 하지만 내키지 않는다고 움직이지 않으면, 손해를 보는 것은 그녀 쪽이었다. 로렌이 가져다준 아침 식사를 한 미오가 창가에 기대서 있을 때였다.

똑똑 소리가 들리더니 하늘색 단발머리를 한 남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제가 방해한 것은 아닌가요.”

“……아니에요.”

숲에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이지만, 여기에서 내색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이곳에서 저 남자를 보는 것은 처음이니까.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공작님의 일을 보좌하고 있는 사무엘 베일이라고 합니다.”

볼을 살짝 붉힌 사무엘이 수줍게 인사를 건넸다.

“저는 미오라고 해요.”

이렇게 인사를 나누자니 참 어색했다. 이곳 모두는 그녀가 지오프리의 열렬한 팬인 줄 아니까 말이다.

“다름이 아니라 공작님이 잠시 자리를 청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모셔 가려고 왔습니다.”

그래서 저, 미는 의자를 가져온 거구나.

급히 몸을 돌린 미오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꼭 밥 먹고 나면 만나게 되는 것 같아.’

소화나 좀 되면 그때 얼굴을 봐도 될 텐데.

게다가 오늘 밤엔 그의 침실에 몰래 숨어들 작정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딱히 얼굴을 볼 이유가 없는데…….’

하지만 생각은 생각에 그쳤고, 그의 청을 받아들였다. 지오프리의 팬이라면 거절하는 게 이상할 테니.

사무엘이 그녀가 의자에 앉는 것을 돕더니 천천히 밀기 시작했다.

“집무실이 같은 층에 있어서 금방입니다.”

부드러운 카펫이 깔린 복도를 지나면서 미오는 그녀의 뒤에 선 남자에 대해서 생각 중이었다. 동안이긴 해도 공작의 일을 거드는 것을 보면 성년은 훌쩍 넘었을 것이다.

‘성도 있는 걸 보면 귀족일 테고.’

호감 가는 외모에 동그란 눈을 한 사무엘은 제법 귀여웠다. 이런 상대와 함께라면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아직 가 보지 않은 길이라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갑자기 가슴속이 희망으로 차올랐다.

‘금발의 푸른 눈 왕자님은 아니지만, 나쁘지 않아.’

이번에 세운 목표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지오프리가 아닌 다른 남자를 찾아봐야 했다.

‘가까운 곳에 해결의 실마리가 있는 법이야.’

사무엘과 결혼식을 올리고, 숲에서 과일을 따는 그림을 그려 봤다.

그때 사무엘이 말을 거는 바람에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몸은 좀 어떠세요.”

그의 음성에는 진실함이 깃들어 있었다.

‘진짜로 나를 걱정해 주고 있어. 너무 자상하다.’

지오프리는 협박하거나 목에 칼만 들이댔지, 그녀의 상태를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이제 많이 좋아졌답니다.”

그렇게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면서 복도를 가로질렀고, 드디어 카스피언 공작의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짙은 색의 문은 거인이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컸다.

‘이 안에 그가 있어.’

침을 꿀꺽 삼키는데 천천히 문이 열렸다.

“공작님. 모시고 왔습니다.”

“이제 나가 봐.”

“……아. 네.”

해가 잘 비치는 커다란 창 앞에 앉은 터라 지오프리의 목소리만 들렸다.

“……음.”

이상하게 지오프리와 단둘이 있으면 숨이 막혔다. 머리가 뜨거워지고, 코에서 김이 났다. 아랫배가 살짝 간질간질하기도 했다. 앉은 의자에서 미오가 끙 소리를 내자, 그가 벌떡 일어나서 창의 반을 커튼으로 가렸다.

“이제 만족하나?”

또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로렌이나 사무엘의 말은 전부 알아듣겠는데, 이상하게 지오프리의 말은 해석이 잘 안 되었다.

“내가 보고 싶었던 거 아닌가?”

‘……하.’

짝사랑하는 그의 얼굴을 보게 되었으니 감격하는 척할 때라는 말이었다.

‘아니, 잘생긴 네 얼굴이 싫은 건 아닌데, 그 정도는 아니거든…….’

게다가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뻔뻔하기까지 했다.

“그럼요. 밤새 보고 싶어서 잠을 이루지 못했는걸요.”

고통과 수치심으로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미오는 허벅지를 꼬집으면서 간신히 웃는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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