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10)화 (10/123)

10화 진짜 좋아하는 게 아닌데요

미오가 혼자 히죽대는데, 로렌이 차를 준비해 줬다.

“이제 배가 불러서요.”

그녀의 사양에도 로렌은 데운 찻물로 차를 우려낸 후에 금색 테두리가 둘린 예쁜 잔에 홍차를 따라 주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초콜릿이 박힌 쿠키를 권했다.

보기만 해도 배가 터질 것 같아서 미오는 손사래 쳤다. 접시를 더 가까이 밀면서 로렌이 말을 덧붙였다.

“원래 디저트를 먹는 배는 따로 있는 법이랍니다.”

자꾸 권하는 것을 거절하기가 힘들어서 작은 것을 하나 집어 들었다. 한 입 베어 물자 고소하고 달콤한 맛에 미오의 눈이 절로 감겼다. 쿠키를 와그작와그작 먹는 미오를 바라보는 로렌의 표정이 밝았다.

‘인생이란 한 치 앞을 모르는 법이야.’

빙의하게 될 줄도 몰랐고, 이렇게 카스피언 공작가의 손님이 된 것도 의외였다.

‘그러니까 언제 지오프리가 내 목에 칼을 들이댈지도 모르는 거야.’

그래서 미오는 기회가 있을 때 저 깃털 같은 침대에 몸을 내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로렌은 그녀를 보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것 좀 보세요.”

로렌이 어디선가 먼지가 잔뜩 쌓인 책을 하나 들고 나타났다. 그녀는 책장을 넘기면서 연신 감탄을 연발했다. 심드렁한 표정을 한 미오는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하나도 안 궁금한데요.’

그때 로렌이 화첩을 미오 앞에 내밀었고, 엉겁결에 그림을 보게 되었다.

“어때요. 너무 사랑스럽죠?”

“……?”

작은 초상화를 모아 둔 화첩에는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에 녹색 눈을 가진 미녀가 아기를 안고 있었다.

‘엄마랑 아들인가 봐.’

엄마의 손을 꼭 쥔 귀여운 아이에게 절로 눈길이 갔다.

“……그렇네요.”

어린아이를 딱히 좋아하지 않는 그녀의 눈에도 아이는 퍽 귀여웠다. 통통한 볼에 홍조가 어려 있었고, 검은 눈이 얼굴의 반은 될 것 같았다.

‘구불거리는 검은 곱슬머리가 꼭 새끼 양 같아.’

어머니의 품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주인님은 지금과 별로 달라지신 게 없죠.”

“……네?”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기가 지오프리라고?

믿을 수 없어서 미오는 초상화를 여러 번 확인했다. 자세히 보니까 그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공작님은 저래 보여도 속정이 깊은 분이랍니다.”

로렌의 말에 미오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목을 더듬더듬 쓸어내렸다.

‘네. 속정이 두 번만 깊었다가는 정말 큰일이 났을 거예요.’

그나저나 왜 이런 과거의 초상화를 보여 주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지금의 냉혈한 지오프리와 너무 다른 아이의 초상화를 다시 살펴보았다. 그러자 로렌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귀여워서 눈을 못 떼겠죠?”

“……그게―.”

귀여워서 보는 게 아니지만 지금 그녀는 부정하기도 힘들었다.

‘지금 나는 카스피언 공작을 짝사랑하는 여자를 연기 중이니까.’

미오가 우물대자 로렌이 그녀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그나저나 어제 입혀 드린 잠옷 말입니다. 마음에 드셨나요?”

“……에?”

속이 훤히 비치는 잠옷을 그녀가 좋아할 이유가 없었다.

‘그것 때문에 아침에 무슨 망신을 당했는데……!’

돌봐 준 로렌에게 화를 낼 수 없어서 남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그게 신혼부부에게 제일로 인기가 많다고 하더군요.”

그 말에 미오의 코에서 더운 김이 팍 터졌다.

‘맙소사.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람.’

로렌의 머릿속에는 어느새 미오와 공작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신혼부부가 되어 있는 것일까?

‘이봐요. 로렌. 그건 진짜 아니에요.’

비혼주의는 아니었으니, 언젠가 결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베개 아래 단검을 넣고 자는 남자는 아니야. 아니고말고.’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가씨.”

부끄러운 게 아니라 끔찍해서 대답하지 않은 건데, 로렌은 자기 마음대로 생각해 버렸다. 그때 미오의 이마를 식히는 서늘한 바람 한 줄기가 느껴졌다.

“공작님. 오셨습니까.”

뒤를 돌아보자 인상을 잔뜩 찌푸린 지오프리가 문가에 서 있었다. 눈빛이 얼마나 흉흉한지 미오는 그대로 체할 것 같았다.

“에구머니나! 집사가 부탁한 일을 깜빡했네요.”

급한 일이 생각났다는 로렌이 방에서 빠져나가자, 그와 단둘만 남게 되었다.

“……허락도 없이 남의 물건에 손대지 마.”

성큼성큼 다가선 그는 탁자 위에 놓인 화첩을 탁 덮었다. 억울한 마음에 미오는 볼멘소리를 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건 로렌이 보여 준 거예요.”

“보나 마나 누군가 졸라 댔겠지.”

“……아.”

이런 오해를 받다니 속이 뒤틀렸지만, 꾹 참아야 했다.

“처분을 내리도록 하겠다.”

탁자 위로 검은 가죽 장갑을 내던진 그가 미오의 옆자리에 삐뚜름하게 앉았다.

“……처분.”

그 말에 문득 독약을 마시고 쓰러지던 그녀가 떠올랐다. 바닥에 데구루루 구르던 작은 유리병이 깨졌고, 반짝이는 조각에 누군가의 눈물이 떨어졌다.

지오프리의 다음 말을 가만 기다리던 그녀가 입술을 짓씹었다.

“긴장되나 보군.”

지오프리는 상대를 살피는 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황후 측에서 보냈다고 하기에는 허술한 구석이 너무 많아.’

하지만 여전히 무척 수상했다. 그냥 내치기에는 찝찝하고, 데리고 있자니 거슬리는 그런 존재였다.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두라고 했던가.’

어떤 구실을 만들어서 곁에 두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 한참 고민하던 지오프리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턱을 두드리다 입을 뗐다.

“카스피언 가문에서 책임지고 너를 치료를 해 주겠다.”

“……네?”

너무 의외의 말이었다.

‘검을 그렇게 들이댈 때는 언제고 왜 착한 척이야?’

놀란 그녀가 고개를 번쩍 들자, 지오프리의 서늘한 미모에 감탄이 흘렀다. 이마를 가벼이 덮은 검은 머리가 햇살에 반짝거렸고, 밤하늘 같은 눈 속에 온통 그녀가 빠져 있는 것 같았다. 간신히 정신 차린 미오가 말을 더듬댔다.

“하, 하지만 꼭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의 호의라니 꺼림칙했다.

“나를 그리 좋아한다니 무척 기뻐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비아냥대는 말투에 미오의 볼이 타오를 것처럼 붉어졌다.

‘인제 와서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 늦었어.’

미오가 시뻘게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서 고개를 푹 숙이자, 지오프리가 말을 이었다.

“어쨌든 나 때문에 다치기도 했으니까…….”

보상이라면 황금이나 말 같은 것을 줘야 하지 않나?

미오가 입술을 삐죽대는데, 그가 눈을 빛냈다.

“수도에 머무를 거처가 따로 있는 건가?”

아무리 봐도 부유함과는 거리가 먼 미오의 행색을 살피던 그가 물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요.”

수도는커녕 카스피언 제국 어디를 가도 미오의 집은 없었다.

“그러면 어디 연락할 친척은?”

“없, 없습니다.”

급한 김에 지어낸 라고푸스라는 가문은 그녀가 시조가 될 판인데, 친척이 있을 리가 없었다.

“몸이 다 나은 건가?”

“그런 건 아니지만 지금처럼 매일 의원에게 보일 것까지는 아닌 것 같아요.”

호기롭게 답했지만, 몸이 좋지는 않았다. 지오프리는 앉은 의자를 조금 더 밀어서 미오 가까이에 붙였다.

“그러면 나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더더욱 없는 것 같군.”

지오프리는 궁지에 몰린 그녀의 상황을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도대체 뭔데.’

약간 떨어져 앉아서 그녀의 등을 노려보는 지오프리 때문에 미오는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그날 말이야.”

한층 낮아진 그의 음성에 미오가 몸을 돌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자고 있는데, 날 덮치려고 했던 그날 기억하지?”

‘……덮치다니!’

잔뜩 화를 내려던 미오가 입을 다물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그녀가 지오프리의 입술을 향해서 돌진한 것은 사실이었다.

“일단 이렇게 하는 게 좋겠군.”

갑자기 그가 일어나서 미오가 앉은 의자를 들어서 완전히 돌려 버렸다. 결국, 지오프리와 마주 보고 앉게 된 미오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은 눈을 보고 대화를 나눠야 해.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눈은 그러지 못하거든.”

결국, 그가 인간 거짓말 탐지기니까, 거짓말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엄포였다.

‘그래. 도전을 받아 주지.’

미오는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기억합니다.”

“내 배 위에 이렇게 앉아 있다가, 바닥으로 굴렀지.”

지오프리가 손가락으로 그녀가 앉아 있던 그의 식스 팩을 가리켰다. 딱히 기억하고 싶지 않은 몹쓸 재연이었다.

“……네.”

엄밀히 말하자면 지오프리의 식스 팩을 두 발로 마구 밟았다. 그건 영영 모를 거라고 생각하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 부상에 나도 책임이 있으니까.”

아무래도 몸에 난 여러 상처를 그날 생긴 것으로 오해하는 것 같았다. 물론 낙상하면서 다리를 살짝 삔 것은 사실이지만, 대체로 숲에서 포식자에게 쫓기거나 굶으면서 생긴 것들이었다.

“……하지만.”

“네가 어딜 가서 나 때문에 다쳤다고 말하면 가문의 명예가 실추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잔말 말고 여기에서 치료를 받도록 해. 나는 내 책임을 다할 작정이니까.”

“……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데, 그는 벌떡 일어서더니 인사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니까 자기한테 안 좋은 소문이라도 날까 봐 이러는 거다?”

웬 호의인가 했더니, 가문의 평판 때문이라니.

‘정말 지오프리답지 뭐야. 이기적인 녀석.’

씩씩대던 미오는 탁자에 남은 식은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래. 차라리 잘되었어.’

당장 이 집을 떠날 생각도 아니었는데. 다 나을 때까지 카스피언가의 손님으로 머무를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횡재냐고. 숲에서 거의 죽을 뻔한 고비도 여러 번 넘겼던 미오는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지오프리가 근처에 있으니 이용하기도 쉽고, 또 여기는 침대도 푹신하고 밥도 맛있으니까!’

이대로 건강을 회복한 후에 그녀의 이상형을 찾아서 각인하면 처음으로 해피 엔딩을 맺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행복한 상상에 미오의 얼굴이 반짝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