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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9)화 (9/123)

9화 낯설되 낯설지 않은

“사무엘, 변방의 상황을 보고하도록.”

변방을 입에 담는 지오프리의 이마가 절로 구겨졌다.

얼마 전까지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않으면서 뒹굴었던 제국의 경계 지역이 눈에 선했다. 잔뜩 기합이 든 사무엘이 보고를 시작했다.

“이제 침입자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복구 작업이 한창이라고 합니다.”

지오프리는 읽던 서신을 내려 둔 채 긴 한숨을 쉬었다.

“그 여자 쪽은 어때.”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사무엘은 퍽 충직했으나, 그는 약간 말귀가 어두운 경향이 있었다. 그러자 지오프리가 탁자에 굴러다니는 표창을 만지작대면서 되물었다.

“누구겠나?”

그제야 얼굴이 환해진 사무엘이 손을 모아서 흔들었다.

“……아. 작은 마―이 아니라, 미오 님 말이죠.”

“무슨 헛소리야.”

“그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미오를 수상하게 여긴 지오프리는 첫날에 사무엘에게 그녀의 신변 조사를 맡겼다. 하지만 귀족도 아닌 평민 출신인 여인의 배경을 알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아시다시피 그곳에 살던 이가 많이 다치거나 죽었고, 타지방으로 옮긴 사례가 많아서요.”

변방 지역에 머무는 아군에게 연통했으나, 별 뾰족한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사무엘은 유난히 가라앉은 주인의 얼굴을 조심스레 살폈다.

‘로렌이 거짓말을 한 건 아닐 텐데…….’

‘사무엘 님. 곧 카스피언가에도 봄이 올 것 같습니다.’

아침이면 늘 두통에 시달리는 지오프리를 위해 차를 가져다주고 오겠다고 했던 그녀가 잔뜩 흥분한 채로 돌아온 것이다. 로렌의 말로는 두 사람이 아침에 퍽 다정했단다.

‘봄이 오기에는 공작님의 얼굴이 너무 살벌한데?’

어쩌면 로렌이 뭔가 잘못 알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지오프리의 서늘한 음성에 금방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병원 목록도 가져온 거겠지.”

사무엘은 조금 실망한 얼굴로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공작은 미오를 이곳에서 내보낼 작정인 게 분명했다. 사무엘은 성한 데 한 곳 없는 가냘픈 미오를 떠올리자,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주인의 명이 우선이었고, 이런 개인적인 감상은 접어 둬야 했다.

“네. 당장 입원 가능한 병원 목록입니다.”

“이곳은 부상병들이 주로 가는 곳이 아닌가?”

서류의 목록을 훑던 지오프리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네. 귀족들은 입원하는 경우가 없으니까요. 대체로 평민을 위한 구제 기관이 전부입니다.”

사무엘의 설명에 지오프리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구제 기관이라고 하면 벼룩이 득실거리는 침대에 모포 한 장이 전부인 경우가 허다했다. 그곳이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수상한 자를 공작가에 계속 머물게 할 수 없는 법인데…….’

그런 곳에 그 약해 빠진 여자를 보내자니 왠지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카스피언 공작님! 사랑해요!’

순간 달뜬 얼굴로 사랑 고백을 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미오의 손이 스쳤던 피부가 여전히 홧홧했다. 목 뒤부터 시작된 생경한 감각에 갑자기 숨이 턱턱 막혔다.

‘아마도 병원 생활을 견디지 못할 거야.’

제대로 걷지도 못해서 넘어지는 여자가 아닌가. 병원에 가서 죽어 버리면 그녀의 배후와 목적을 알아낼 수 없게 된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고민이 어느 정도 사라졌다.

“공작님, 미오 님을 어디로 모시면 되나요.”

지오프리는 쥐고 있던 병원 목록을 잔뜩 구겨서 그대로 내던졌다.

“일단 이곳에 두는 편이 나을 것 같군.”

황후에게 정보를 넘길 첩자인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 것이다.

“……네! 잘 알겠습니다.”

지오프리의 의중을 알 리 없는 사무엘이 싱글벙글 웃었다.

* * *

지오프리가 나간 침실에서 한참 고민하던 미오는 다시 이불을 덮고 누웠다.

“도대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지오프리가 화가 난 건지, 어떤 건지 알아낼 길이 없었다. 책의 내용을 떠올려 보려고 했지만, 이미 원작과는 거리가 멀었다.

“시작과 결말만 늘 같았으니까…….”

미오가 사우나 앞에서 트럭에 치였다 일어나 보니 눈앞에서 새가 푸드덕거렸다.

‘내가 왜 숲에 있는 거지?’

도시 한가운데서 교통사고가 났는데, 왜 병원이 아닌지 의문스러웠다. 어지러워서 머리를 마구 흔드는데, 주변의 사소한 소음이 크게 들렸다. 냇물이 흐르는 소리, 벌이 내는 소리.

그때 나뭇가지에 앉은 새의 통통한 뱃살에 군침이 흘렀다.

‘왜 비둘기가 맛있어 보이지?’

살아 있는 새를 보면서 입맛을 다시는 것은 분명 정상이 아니었다.

‘내가 어디 잘못됐나 봐.’

넘어지면서 머리를 심하게 다쳤을지도 모른다. 놀란 미오가 몸을 일으키려다가 이번에는 비명을 질렀다. 손이 온통 털로 덮여 있었다.

‘내가 짐승이 되었―.’

처음 여우의 몸으로 눈을 뜬 날 그대로 기절했었다.

미오는 몸을 벌떡 세워 앉았다. 그리고 다섯 손가락이 있는 손을 짝 펼쳐서 유심히 들여다봤다.

“뭐야. 그때 생각은 별로 하고 싶지 않다고.”

여우 수인이 된 것에 적응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 모른다.

그녀가 다시 침대에 벌러덩 눕자, 침대가 살짝 삐걱댔다.

“어쨌거나 지금이 꼭 꿈만 같아.”

이곳에 온 후 이런 대접을 받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숲은 너무 추웠고, 항상 배가 고팠던 기억뿐이었다.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들었던 미오가 맛있는 냄새에 눈을 떴다. 로렌이 방 한편에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일어나셨나요?”

“이게 다 뭐죠.”

자다가 일어난 직후라 다정한 음성이 나오지 않았다. 자는데 누가 몰래 방에 들어와 있는 게 썩 좋지 않았다.

‘지오프리의 마음도 백번 이해가 되기는 해.’

하지만 불쾌했던 감정은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에 점점 희미해졌다. 미오가 몸을 일으키자, 탁자 위에 차려진 다양한 요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로렌은 다양한 요리를 자랑스레 선보였다.

“의원이 이제 환자식 말고 기운이 나는 식사를 하는 편이 좋다고 하더군요. 이건 주방장 케이가 만든 특제 소스를 끼얹은 돼지고기랍니다.”

“저기 무화과를 곁들인 파이에는 닭고기가 들어 있답니다.”

“이건 훈제 고기를 얇게 썰어서 만든 카나페인데, 입맛을 돋우어 줄 거예요.”

미오는 굉장한 요리 설명에 전혀 동요하지 않는 척했다. 하지만 자꾸 옆을 힐끔거리게 되었다.

‘나는 음식 하나에 넘어가는 쉬운 짐승이 아니야.’

친하지 않은 사람이 베푸는 호의는 무조건 의심하는 법이다. 여전히 경계심 가득한 얼굴을 한 미오를 보던 로렌이 손짓했다.

“아직 아무것도 안 드셨잖아요. 어서 와서 드세요.”

“나는 괜, 괜찮아요.”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미오가 음식을 거절하자 로렌이 다정하게 입을 열었다.

“이런 어쩌죠. 아가씨 드리려고 만든 건데, 안 드신다고 하면 다 내다 버리는 수밖에요.”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던 로렌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에 미오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버린다고? 저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자고로 음식을 버리면 벌을 받게 마련이다.

“버리는 건 안 되죠.”

미오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탁자로 조심스레 다가섰다. 눈 앞에 펼쳐진 음식이 영롱한 빛을 냈다.

‘좋은 일이 생길 징조일까.’

로렌이 빼 주는 의자에 걸터앉은 미오는 무심한 척 애를 썼다.

“잘 먹겠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버린다고 하니까, 먹는 거다.

절대로 음식에 자존심을 파는 건 아니다. 혼자 중얼대던 미오는 포크를 쥐고 고기를 한 입 먹었다.

“……!”

고기가 입에 들어오자 미오는 그대로 이성을 잃었다.

‘……이런 맛은 처음이야.’

입에 넣기만 했는데도 혀끝에서 그대로 녹아 버렸다. 고기를 접시로 옮겨 와서 포크로 해체하는데,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미오는 급한 마음에 고기를 그대로 손으로 쥐었다.

“에구머니나, 좀 천천히 드세요.”

미오가 그릇까지 씹어 먹을 것처럼 굴자, 로렌이 마실 것을 권했다. 양 볼 가득 부풀린 미오가 잠시 목을 축이더니, 다시 먹는 데 집중했다. 양손에 소스를 잔뜩 묻힌 채 고기를 먹는 미오를 보면서 로렌은 연신 싱글벙글하였다.

“같이 좀 드세요.”

민망한 표정을 한 미오의 말에 로렌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아가씨가 드시는 것만 봐도 배가 불러요.”

카스피언가에 얼마 만에 손님이 온 건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아가타 님이 살아 계실 때만 해도 황후에게 잘 보이려는 사람의 행렬이 끝도 없었다.

‘아가타 님이 돌아가신 후 모두 발길을 끊었지.’

황제와 불륜 관계에 있던 카트리나가 황후의 자리에 올랐고, 카스피언 공작가는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지오프리는 전장을 떠돌았고, 누구도 찾지 않는 거대한 저택은 흉흉한 소문만 만들어 냈다.

‘오래 살아서 뭐 하나 했더니, 이런 날을 보려고 내가 이날까지 버텼구나.’

이제 주인님도 수도에 돌아오셨고, 이리 어여쁜 분도 만나셨으니 그녀의 소원이 반은 이뤄진 셈이다.

“미오 님은 참 복스럽게 드시네요.”

미오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 로렌의 눈을 피하면서 대충 얼버무렸다.

“……쿨럭.”

“카스피언가의 음식이 입맛에 딱 맞는가 봐요.”

“그, 그런가 봐요.”

미오는 지금 너무 집중한 나머지 로렌이 하는 의미심장한 말을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먹을 수 있을 때 최대한 배를 채운다.’

이것은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본 수칙 중 하나였다. 미오는 충분히 고기를 먹은 다음에 손가락을 천천히 핥았다.

배가 부르자 딴생각이 들었다.

‘생각할수록 불쾌하네.’

한 번도 아닌데 고백을 전부 무시당했다.

‘외모 빼고 자기가 가진 게 뭐 있다고.’

심지어 그 외모조차도 미오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녀는 금발에 반짝이는 푸른 눈을 한 햇살 미남 쪽을 선호했다. 하지만 지오프리는 시꺼먼 머리에 눈은 더 짙었고, 전신에서는 냉기가 폴폴 흘렀다. 여러 번 거절당하자, 슬슬 오기가 생겼다.

‘여우 체면이 있지. 내가 널 유혹하고야 만다.’

온갖 매력을 발산해서 지오프리가 그녀에게 푹 빠지게 할 작정이었다.

‘지오프리가 나 때문에 펑펑 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잘생긴 그의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는 걸 상상하자 흥분으로 손끝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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