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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8)화 (8/123)

8화 불면의 밤

지오프리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제대로 잠을 이룬 적이 없었다. 길면 두어 시간 정도 선잠을 잤고, 남은 시간은 내내 몸을 뒤척였다. 언젠가부터 그는 아예 잠들기를 포기했다.

‘새로운 약을 지었답니다.’

이름난 약학자들에게서 수면제를 구했지만, 지오프리의 지독한 불면증은 전혀 낫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간밤에 한 번도 깨지 않았다.’

그것만큼 믿기 어려운 일이 또 있을까. 장장 5년 만에 취한 숙면으로 그의 감각은 평소보다 훨씬 기민했다. 누군가 흐느껴 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가 기절할 뻔했다.

‘꿈인 줄 알았지.’

지오프리의 품 안에 반짝이는 은발이 부서지고 있었다. 단단한 살을 가진 그와 다른 부드러운 살이 손끝에 닿았다. 안은 몸에서 은은하지만 끌리는 향기가 진동했다.

‘무언가에 홀린 게 분명해.’

상대가 벽 쪽으로 다가가서 무릎을 붙들고 앉자, 정신이 확 들었다.

“당장 입을 열지 않으면 곤란한 일이 생길 거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운 그가 베개 아래 단검을 꺼내 손에 쥔 채 이를 드러냈다. 당장에 단검을 미오에게 날리고도 남을 기세였다. 그녀는 덜덜 떨면서 웃으려고 애를 썼다.

‘무슨 짓을 하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네!’

게다가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은 그녀가 하는 게 더 어울리지 않나? 그리고 간밤에 그녀를 놓아주지 않은 것은 지오프리였다. 하지만 지금 그의 얼굴이 너무 흉흉해서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그게, 그게 제가 공작님을 너무 좋아해서 그랬습니다.”

“……나를 좋아해서라.”

단검의 등을 손끝으로 툭툭 치는 지오프리의 모습은 야차가 따로 없었다. 미오는 일단 위기를 모면하는 데 정신을 집중했다.

“잘못했습니다.”

사실은 너무 억울했다.

‘네가 나를 껴안고 안 놓아줘서 그런 거거든?’

하지만 그걸 말하자면 이야기가 너무 복잡해졌다.

‘내가 그 여우라고 할 수는 없잖아.’

그런 이유로 미오는 사내의 침대에 몰래 파고드는, 도덕이라고는 없는 여자가 되어 버렸다.

“무슨 수를 쓴 거지?”

“……네?”

지오프리가 아까보다 더 무서운 얼굴로 추궁하기 시작했다.

“네가 나를 무슨 수로 재웠는지 묻는 거다.”

미오는 어이가 없어서 입만 벙긋댔다.

‘아니, 저 혼자 잠만 잘 잤잖아.’

그녀가 지오프리를 재울 일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뭐라도 그가 이해할 만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면, 저 단검의 끝이…….

미오는 그녀의 목을 더듬대면서, 입을 열었다.

“아마 제가 쓰는 향수 때문이 아닐까요.”

사실 굶기 다반사인데 향수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음.”

지오프리는 침실에 퍼진 그녀의 체향에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수상해도 보통 수상한 인물이 아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그를 무방비하게 만든 데다, 이번에는 밤새 잠들게까지 하지 않았나.’

검을 빙글빙글 돌리던 그는 우연히 협탁을 쳐다봤다.

‘……어디 갔지.’

협탁 위에 있어야 할 여우가 온데간데없었다. 그가 마시던 컵 근처에 흰 털만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지오프리는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속삭였다.

“바른대로 말해라. 황후가 보냈나?”

이불을 치운 그가 몸을 세워서 미오가 있는 쪽으로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움직일 때마다 잘 발달한 근육이 꿈틀거렸고, 위험해 보이는 검은 눈빛이 미오를 꿰뚫을 것 같았다. 그의 협박에 그녀는 두 손을 한껏 흔들었다.

“아니에요. 절대로 아니에요.”

미오는 차가운 벽에 등을 바짝 붙이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망했어. 지금 나를 황후 쪽 첩자로 오해하는 거야?’

그런 오해라면 당장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지오프리가 황후와 사이가 나쁘다는 것은 제국 코흘리개 아이도 알 정도였으니까.

‘아무도 나를 안 보냈어!’

그녀는 황후의 얼굴도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관심이 없던 탓에 책에서 읽은 것도 거의 없었으니, 정말 억울했다. 미오는 그녀의 결백을 무슨 수로 주장해야 하나 고민해 봤다.

‘뭐야. 증명할 수가 없잖아.’

그러려면 미오가 이곳에 온 진짜 이유를 밝혀야 하는데.

‘그럴 수야 없지. 그나저나 왜 저렇게 무섭게 다가오는 거지.’

그가 미오를 향해서 엎드린 채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음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지오프리의 얼굴 위로 포식자의 그림자가 언뜻 스쳤다. 아무래도 극도의 스트레스 때문에 헛것이 보이는 게 틀림없었다.

‘인간 따위 하나도 안 무서워.’

없던 힘을 쥐어짜 낸 미오가 이를 악물었다.

‘잊지 마! 너는 숲의 맹수야!’

미오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상의 공격을 생각해 냈다. 눈을 질끈 감은 그녀는 그대로 팔을 뻗어서 지오프리의 목을 감싸 안았다.

“카스피언 공작님! 사랑해요!”

“…….”

미오의 두 손이 단단한 그의 근육에 닿자, 지오프리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를 안은 미오의 어깨가 심하게 흔들렸다.

‘정말 미쳤나 봐.’

무턱대고 끌어안기는 했지만, 이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제 손을 떼도 되는 걸까.’

뒷일을 생각하던 미오의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두근댔다. 게다가 대충 위기를 모면하려고 생각해 낸 거라서 너무 연극 같아 보였다.

‘이런 말에 지오프리가 속을 리가 없잖아.’

지오프리는 피도 눈물도 없는 그런 인간이니까.

‘에라! 모르겠다.’

미오는 그대로 더 강하게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엉거주춤 엎드린 지오프리의 어깨에 기대자 절로 숨이 가빠졌다.

‘좋은 냄새가 나.’

그녀의 입술이 지오프리의 맨 등에 닿자 이번에는 그가 움찔댔다.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이 깨진 것은 열린 문 사이로 차를 가져오던 로렌이 찻잔을 깨뜨리면서였다.

“……에구머니나! 제가 실례를―. 계, 계속하세요.”

얼마나 놀랐는지 그녀가 인사도 없이 그대로 문을 쾅 닫았다. 미오는 허둥대며 사라지는 로렌을 향해서 속으로 중얼댔다.

‘저기, 그런 게 아닌데요.’

정말 누가 봐도 오해하기 딱 좋은 장면이었다. 가뜩이나 로렌은 그녀가 공작님을 짝사랑한다고 믿고 있으니까.

“당장 이 손 치워라.”

지오프리가 꿈틀대자 미오가 황급히 몸을 뒤로 물렸다.

‘……망했어.’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밤에 옆에서 잔 데다 그에게 사랑한다고 외치고, 매달리기까지 했으니까.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들킬까 봐 고개를 푹 숙였다. 뒤늦게 밀려드는 수치심은 전부 그녀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내가 지오프리라도 이런 여자는 정말 싫을 것 같네.’

미오의 얼굴에 먹구름이 잔뜩 끼었다. 그때 지오프리의 입술에서 긴 한숨이 터졌다.

“그래, 이름이 뭐라고?”

“……미오, 미오입니다.”

“그냥 그것뿐인가.”

그가 성을 묻자 미오는 당황스러웠다. 원래 이름은 구미오지만, 여기에서는 쓸 수 없었다.

“변변찮은 가문이라 말씀드려도 모르실 겁니다. 귀족이 아니라서요.”

귀족이 아닌 게 아니라 이곳 출신도, 인간도 아니라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말해.”

성을 밝히지 않으면 다시 칼부림이 날 판이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딱딱 꺾어 대면서 불안한 눈을 했다. 달리 떠오르는 단어가 없었다.

“미오 라고푸스입니다.”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 성이었다. 책을 읽다가 북극여우에 관심이 생겨서 다큐멘터리도 챙겨 보고, 라틴어까지 찾아봤던 터라 알게 된 것이었다.

‘성이 북극여우라니…….’

수치심에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이는데, 지오프리가 서둘러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그는 셔츠를 찾아서 대충 몸에 꿴 후 커다란 손으로 배를 긁었다. 전신에 붉은 반점이라도 생긴 것처럼 울긋불긋하고 가려웠다. 심장이 산처럼 밀려드는 마수를 처치할 때보다 더욱더 세차게 뛰어 댔다.

‘도대체 정체가 뭐지.’

셔츠의 앞을 여민 지오프리가 천천히 침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 여인의 가느다란 목덜미가 한눈에 들어왔다.

‘정말 수상한 여인이야.’

지오프리를 향해서 내뱉는 그녀의 말은 거짓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달아오른 볼 하며, 촉촉한 눈이 진실을 전하고 있었다.

‘정말 나를 좋아한다고……?’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던 지오프리는 애써 평정을 되찾으려 애썼다.

‘설령 그렇다 해도 아무 상관 없는 일이다.’

사랑 따위를 믿는 순수한 소년은 이미 죽은 지 오래였으니까.

한편 지오프리의 처분을 기다리는 미오의 가슴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계획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일이 계속되고 있었다.

‘지오프리! 뜸 들이지 말고 무슨 말이라도 해 봐.’

입맛을 다시던 미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선의 끝에 그녀를 잔뜩 노려보는 지오프리가 있었다.

‘그만 노려봐! 안 그래도 지금 엄청나게 긴장하고 있거든?’

미오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한 손으로 머리를 괜히 매만졌다.

“……하.”

지오프리는 이런 상황에도 몸단장하는 상대를 보자 기가 막혔다.

‘나한테 잘 보이는 게 그만큼 중요한 건가?’

그러다 미오의 슈미즈 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옷감이 너무 얇아서 햇살의 각도에 따라서 언뜻언뜻 속살이 비쳤다. 봉긋한 가슴을 타고 잘록한 허리에 시선이 닿자 그의 볼이 확 달아올랐다.

“……흠.”

고개를 옆으로 돌린 지오프리가 의자에 걸쳐진 그의 가운을 홱 집어 던졌다.

“꼴사나워서 봐 줄 수가 없군.”

“……공작님!”

날아든 가운이 미오의 얼굴을 완전히 덮어 버렸다. 갑자기 어둠 속에 갇힌 그녀가 서둘러 가운을 내렸을 때는 지오프리가 이미 침실을 빠져나간 뒤였다. 너무 황당해서 미오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이게 뭐지? 지금 나더러 꼴사납다고 했어?”

입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뱉어 내면서 그녀가 씩씩거렸다.

내키지 않는 고백에 안아 주기까지 했는데, 돌아온 것은 거절보다 더한 무시.

“당장 나를 찌르거나 베는 것보다야 낫지만…….”

침대 아래로 비틀거리면서 내려온 그녀가 협탁을 붙잡고 옆에 길게 세워진 거울 앞에 가만 섰다.

“이 정도면 봐 줄 만하잖아.”

햇살이 정면으로 내려앉아서 흰색에 가까운 은발이 눈부시게 반짝댔다. 목 부분이 둥글게 파인 슈미즈가 무릎까지 내려왔고, 소매와 끝단에 정교한 레이스가 달려 있었다. 곧 심각한 문제를 발견했다.

“……헉.”

잠자리 날개 같은 슈미즈를 걸친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속살이 언뜻언뜻 비쳤다.

“이 꼴을 하고 지오프리한테 달려든 거야?”

미오는 그대로 풀썩 주저앉아서 두 손으로 가슴께를 가렸다. 그리고 엉금엉금 기어서 아까 집어 던졌던 지오프리의 가운을 다시 찾아 걸쳤다.

“로렌은 나한테 하필 왜 이런 슈미즈를 입힌 거야.”

잘 익은 사과처럼 달아오른 볼을 한 미오가 두 발로 바닥을 팡팡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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