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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7)화 (7/123)

7화 달빛 아래 미남

딱 붙는 검은 바지에 헐렁한 셔츠만 걸치고 있던 지오프리가 단추를 마구 풀기 시작했다. 바닥으로 흰 셔츠가 떨어졌고, 그녀의 눈앞에 그의 탄탄한 등이 펼쳐졌다.

‘와! 밥 먹고 운동만 한 거야?’

그가 협탁에 놓인 물을 마시려고 팔을 뻗는데 잘 다져진 근육이 꿈틀댔다.

‘쩝…….’

입 안에 침이 한가득 고인 미오는 지오프리가 물을 마시는 모습을 슬쩍 훔쳐봤다.

‘왜 나도 목이 마르지.’

침대에 누우려는지 가죽 부츠를 벗은 그가 바지 허리춤에 손을 댔다. 그 바람에 미오의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크르르.(벗지 마! 그건 아니야!)

아니, 벗어도 뭐 상관없지만, 그러다 너 감기 걸릴 거야!

미오의 심장이 심하게 날뛰기 시작했고, 지오프리는 그녀의 소리에 그대로 뒤를 돌아봤다. 순간 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이 드러났고, 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은은한 빛이 그의 몸을 감쌌다. 항상 건조하고 사납던 지오프리의 얼굴이 슬퍼 보였다.

‘천하의 냉혈한이 왜 그런 눈을 하는 거야.’

입가에 흐른 물을 훔쳐 내던 그가 아련한 눈으로 달을 올려다보기까지 했다.

‘게다가 그 상처는 뭐야.’

지오프리의 몸은 정말 엉망이었다. 옆구리부터 가슴에 이르기까지 오래된 상흔이 가득했다. 미워해야만 하는 사내인데, 왜 상처를 보자 가슴이 아픈 건지…….

‘아무래도 나 우울증인가 봐.’

저 무지막지한 인간에게 목덜미를 잡힌 이후로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우울해진 미오가 주둥이를 아래로 떨구자, 지오프리가 다가섰다.

“……들개. 어디 달아날 생각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는 손가락 하나를 뻗더니 미오의 정수리를 강하게 긁으면서 협박했다.

―크르르.(나는 여우라고! 여우!)

미오의 낮은 으르렁 소리에 그는 어깨만 으쓱했다.

그녀는 돌아서는 지오프리의 모습을 눈이 빠질 것처럼 노려보았다. 그리고 앞발을 들어서 그의 손이 닿은 정수리를 서둘러 그루밍했다. 얼마나 불쾌한지 털을 죄다 뽑고 싶을 정도였다.

‘쳇, 없던 정도 죄다 달아나겠어.’

아까 살짝 불쌍하게 보였던 것도 모두 취소였다.

곧 지오프리는 침대에 누웠고, 협탁 위의 미오는 그를 연신 노려보기만 했다.

‘정말 짜증 나는 인간이야.’

몇 번이고 그녀를 죽인 장본인이자, 여우의 온 마음을 다 가져 버린 남자.

“……그만 자라.”

―끼잉.(뭐야!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거야?)

미오는 얼른 고개를 홱 돌렸다.

“……하.”

지오프리는 침대에 누워서 몇 번이고 몸을 뒤척였다. 바로 누웠다가 그녀 쪽으로 향하는가 싶더니, 곧 등을 돌렸다. 미오는 거슬리는 소리에 귀를 세운 채 적당할 때를 기다렸다. 곧 침대에서 곤한 숨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잠이 들었나 보군. 일단 물부터 마시자.’

아까부터 입 안의 침이 죄다 말라 버린 것 같았다.

‘이건 절대 지오프리 때문이 아니야!’

미오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훈제 고기가 너무 짜서 그래.’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 사실을 홀로 중얼대던 미오가 주변을 살폈다.

‘치사한 녀석, 물병 속 물을 다 마셨잖아.’

원래 물이 귀한 곳에서는 짐승을 위해 물을 조금 남겨 두기도 했다.

‘이기적인 놈.’

마실 수 있는 거라고는 지오프리의 입술이 닿은 컵에 남은 물뿐이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갈증이 너무 나서 참기 어려웠다. 미오는 긴 주둥이를 컵으로 밀어 넣고 목을 축였다. 좁은 컵에 주둥이가 꽉 끼는 바람에 물 한 모금 마시는 일도 쉽지 않았다.

‘휴, 그래도 이제 조금 살 것 같다.’

고개를 들어서 물기가 묻은 입 주변을 앞발로 손질하는데, 이불이 훌렁 내려가서 지오프리의 맨살이 다 드러났다.

‘……흠흠.’

얼굴에 자꾸 열이 올라서 미오는 작게 헛기침했다.

‘빨리 해치우자.’

다행히 협탁과 침대는 가깝게 붙어 있어서 무리하게 점프할 필요가 없었다. 소리 없이 침대로 건너간 미오가 등을 돌린 지오프리를 가만 응시했다.

‘이번에는 입술만 비비고 곧장 달아나는 거야.’

단단히 각오를 다진 미오는 침대 다리를 타고 은밀하게 그의 얼굴을 향해 다가섰다. 달빛이 미오에게 닿자 벽에 거대한 맹수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자는 얼굴은 천사가 따로 없네.’

가느다란 앞머리가 반듯한 이마로 흘러내렸고, 붓으로 그려 둔 것 같은 눈썹과 코와 입술이 미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텁텁한 침실의 공기, 밤이 만들어 내는 몽환적인 분위기.

‘지오프리의 체취 때문에 가슴이 답답해.’

침을 꿀꺽 삼킨 미오가 혀로 입술을 쓸었다.

‘이건 입맞춤 따위가 아니야. 생존을 위해서 살덩이를 비비는 것뿐이니까.’

단단히 마음먹은 그녀가 지오프리의 붉은 입술을 향해서 살며시 다가섰다. 눈을 질끈 감은 미오가 그의 입술에 닿자 순식간에 여우에서 인간의 몸으로 변했다.

‘됐다! 이제 바로 튀어야지.’

고기로 배도 채워 뒀고, 정신도 똑바로 차렸으니 일이 술술 풀리는 듯 보였다.

“……?”

묵직한 각목 같은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기 전까지는 말이다. 미오는 잠결에 지오프리가 그녀를 껴안자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침착하자. 침착해야만 해.’

호랑이한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지오프리를 깨우지 않고, 그의 팔을 치우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미오가 조심스레 빠져나가 보려고 애썼지만, 지오프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울고 싶다.’

한 번의 접촉으로 보름이라는 시간밖에 얻을 수 없는데, 이렇게 소중한 시간을 지오프리의 품속에 갇힌 채 보내야 한다니.

‘팔을 확 깨물까.’

미오는 베개 아래 둔 단검과 침대맡에 세워 둔 그의 기다란 검을 살펴보다 고개를 저었다. 섣불리 건드렸다가 바로 칼침을 맞게 될 것이다.

‘진짜 미치겠네.’

미오는 벽을 응시한 채 입술을 움찔거렸다. 너무 속상해서 울음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책으로 들어온 것은 그녀의 자의가 아니었다.

‘게다가 책에서는 이런 작고 하찮은 여우가 아니었잖아.’

《목을 비틀어 너를 취하고》에서 지오프리를 짝사랑하는 여우 수인의 본체는 분명히 거대하다고 나와 있었다. 하지만 미오는 얼핏 보면 흰 털을 가진 개로 보이는 게 현실이었다. 풍성한 꼬리만 아니었으면 정말이지, 그랬다.

‘슬슬 지친다. 지쳐.’

따뜻한 물에 피로를 푼 후 배를 그득하게 채우니 자꾸 노곤해졌다.

‘구미오. 정신 차려. 여기에서 자면 너는 내일부터 여우가 아니라, 개야. 개!’

선잠이 들었던 미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눈에 힘을 주었다. 벽에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다정한 한 쌍처럼 어른댔다.

‘그림자로는 저렇게 보이는구나.’

세상에 둘도 없는 원수 사이에 불과한데 말이다. 미오는 두 손을 뻗어서 허리에 감긴 손을 치우려고 다시 힘을 줬다. 될 때까지 하지 싶어서 졸음을 참아 가면서 조심스레 팔을 밀고 몸을 버둥댔다.

그러나 잠시 후.

툭, 지오프리의 팔목을 꽉 잡은 손 하나가 아래로 힘없이 처졌다. 이내 침실 내부를 울리는 숨소리가 하나 더 늘었다.

* * *

꿈속에서 미오는 북극곰이 남겨 둔 먹이를 먹은 후 배를 두드렸다. 배가 부르니 세상이 전부 아름다웠다.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있을까.’

그녀는 풍성한 꼬리를 흔들면서, 자연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미오의 천적 늑대가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크르르.(저리 가! 나 살도 별로 없어.)

하지만 대화를 할 생각이 없는지 늑대는 그대로 미오의 허리를 꽉 물었다.

‘이 비열한 새끼!’

얼마나 아픈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나쁜 놈에게서 벗어나려고 몸을 버둥댔는데, 도망갈 수 없었다. 숨이 막히고 허리가 너무 아파서 이대로 죽는구나 싶었다.

“……헉!”

고통에 허덕이던 미오가 눈을 떴을 때는 사방이 온통 환했다.

‘악몽도 이런 악몽이 없다니까…….’

하지만 깼는데도 허리가 어쩐지 묵직했다.

‘이게 뭐야!’

고개를 내리자 지오프리의 커다란 손이 족쇄처럼 그녀를 휘감고 있었다.

‘나 지금 여기에서 그대로 잔 거야?’

도대체 무슨 변명을 해야 할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아니야. 이제라도 달아나면 다 해결되는 거니까.’

부정적이고 우울한 생각은 스트레스만 불러올 뿐이었다. 미오는 충격적인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애썼다.

‘좋아. 하나 둘 셋 하면 이 팔을 밀어 내고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거야.’

그녀가 전력을 다한다면 지오프리가 검을 휘두르기 전에 침실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나 둘 셋!’

미오가 있는 힘을 다해서 그의 팔을 밀어 냈다. 하지만 팔은 떨어지기는커녕 그녀의 허리를 더 힘껏 껴안았다. 그녀의 어깨가 지오프리의 벗은 가슴에 닿을 정도였다.

‘나한테 왜 이래.’

서러움에 북받친 그녀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미오는 고아였다.

그냥 처음부터 부모님은 없었기에, 그러려니 했다.

가끔 외로웠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노력한다고 없는 가족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쯤은 일찌감치 깨달은 터였다. 성인이 되어서 더는 보육원에서 지낼 수 없었던 미오는 한 평 남짓의 고시원에 살았다.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던 중에 죽은 것도 억울한데, 책 속에서도 툭하면 죽다니…….

“흑, 흑…….”

결국, 터져 나오는 소리를 참을 수 없었던 미오는 크게 흐느꼈다.

“……대단한 근성이군.”

“……!”

평소보다 훨씬 낮은 음성이 그녀의 귀를 간지럽혔다. 눈물은 금세 말랐고 미오는 초조함에 입술을 짓이겼다.

“왜 우리가 한 침대에 있는 거지.”

“음, 그게…….”

미오는 그녀를 안은 팔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서 얼른 벽에 찰싹 달라붙었다.

“아니지.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부터 불어.”

눈을 가늘게 뜬 지오프리의 입술을 타고 살벌한 음성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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